최저임금의 저주에 걸린 사회적 대화 ④

2024-11-11     박태주
▲ 박태주 전 경사노위 상임위원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정을 앞두고 사회적 대화는 결과적으로 세 차례에 걸쳐 시도됐다. 구체적으로 △양대 노총과 경총이 최저임금위원회에서 다시 논의하는 방안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 one-day, one-point 대화로 합의안을 마련해 국회에 전달하는 방안 △대통령이 국회를 통과한 개정 최저임금법을 공포하기 전에 노사가 합의안를 마련해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를 건의하는 방안이었다. 최저임금위에서 논의하는 안은 국회가 거부했고, one-day 사회적 대화는 민주노총이, 그리고 개정법에 대한 대통령 거부권 건의는 한국노총이 각각 거부했다. 최저임금 산입범위가 국회로 넘어오기 직전에 최저임금위에서 합의할 기회도 있었지만 민주노총이 불참함으로써 물거품이 됐다.

최저임금 인상이 최저임금 산입범위의 확대로 이어지면서 남긴 후유증은 컸다.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은 물론 경제·사회정책의 원줄기를 흔들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였다. 먼저 문재인 정부가 노동존중사회 구축을 국정지표로 삼았지만 그 수단으로 삼았던 사회적 대화는 멈춰 서고 말았다. 고용지표 악화와 내수경기 불황이 최저임금 인상 탓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그 불똥은 소득주도성장 정책으로 튀었다. 소득주도성장 정책이 최저임금 인상을 주요한 정책내용으로 삼았던 탓이다. 실제로 2018년 6월27일에는 소득주도성장을 총괄했던 홍장표 경제수석이 청와대를 떠났다(홍장표 전 수석은 문재인 정부 출범 석 달이 안 된 9월8일, 소득주도성장위원회 초대 위원장으로 임명됐다). 최저임금의 터널을 통과하면서 문재인 정부의 사회·경제정책의 브랜드였던 소득주도성장 정책은 댓진 먹은 뱀처럼 기력을 잃고 말았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겨우 일 년이 갓 지난 때의 일이었다.

최저임금위도 파행을 면치 못했다.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를 담은 최저임금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한국노총에 이어 민주노총이 최저임금위를 떠났다. 한국노총은 최저임금 결정시한을 앞두고 복귀했지만(6월30일) 민주노총은 끝내 되돌아오지 않았다. 민주노총에게는 최저임금 산입범위의 확대를 철회해야 한다는 명분이 미조직·취약노동자의 임금인상이라는 실익보다 더 중했던 걸까. “민주노총의 최저임금위 불참이 어떤 실익을 냈는지도 평가해 봄 직하다. … 내년 논의 과정에서도 참여하지 않을 것인지 묻고 싶다.”. 김종진 당시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의 지적이다.(매일노동뉴스, 2018. 7. 21.)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 재논의” 제안했지만…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는 임금체계 개편과 연관된다. 갯바위에 따개비 달라붙듯 기본급에 매달린 각종 수당을 줄이는 것, 즉 임금체계를 기본급 중심으로 개편하는 작업을 말한다.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통상임금과 맞추는 것도 과제다. 이러한 과제들 역시 사회적 대화의 의제에 속한다. 사회적 대화를 거부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다.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는 6월11일, 양대 노총이 노사정대표자회의에 복귀할 것을 요청하는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문성현 위원장은 “최저임금 제도와 관련해 노사가 합의하는 그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사회적 대화의 장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며 재논의를 추진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를 보완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도 제시했다. 문 위원장이 제시한 것은 △근로장려세제(EITC) 개선과 실업부조제도 도입을 포함한 사회안전망 강화 △최저임금법 개정으로 영향을 받는 저임금 노동자 지원방안 △통상임금 산입범위 확대 등 임금제도 개선 △중소기업·소상공인의 지급능력 제고 방안이었다.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둘러싸고 네 번째 시도된 사회적 대화였다.

경총의 반응은 차가웠다. “노사정위원회가 제안한 최저임금에 대한 논의는 노사갈등만 야기할 뿐이다. 특히 논의 의제로 ‘통상임금 산입범위 확대’까지 언급된 것은 적절치 않다.” 한국노총은 아예 “사회적 대화는 죽었다”라는 성명서로 응답했다. “국회는 이(한국노총의 경고)를 깡그리 무시한 채 졸속적인 최저임금법 개악안을 강행 처리했다. 최저임금법이 죽고 사회적 대화도 죽었다.” 민주노총은 정부·여당에 대한 입장표명이 없다며 비판했다.

조선일보는 그래도 조선일보라 하지 않은 말까지 용케 찾아내 발표내용을 뻥튀기했다. “문성현 노사정위원회 위원장이 노동계에 최저임금 관련 재협상을 제안했다. … 청와대가 노사정위를 직접 챙기는 상황이라 단순히 문 위원장의 의사로만 볼 수 없다는 얘기가 나온다.” 문 위원장의 제안에 청와대의 의중이 실렸다고 지레짐작해 청와대를 물고 들어가는 수법이 역시 ‘조선일보’ 스러웠다.(2018. 6. 12.)

사회적 대화, 문재인 정부의 약한 고리?

사회적 대화는 문재인 정부가 내건 노동존중사회 구축이라는 국정과제를 수행하는 핵심 경로라는 점에서 문재인 정부의 약한 고리이기도 했다.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이 사회적 대화와 무관하게 결정된 정부 정책이나 국회의 입법활동에 대한 불만을 사회적 대화에다 퍼붓는 이유를 설명한다. 사회적 대화가 대통령의 관심 사항이고 노동정책의 중심이라면, 사회적 대화에 대한 타격이야말로 정책의 정곡을 찌르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양대 노총은 사회적 대화를 걸고넘어짐으로써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를 저지하려고 든 것도 마찬가지였다.

2007년 프랑스 노동법 1조는 “정부가 진행 중인 집단적·개인적 노동관계, 고용, 직업훈련에 관한 모든 개정안은 노사단체와 사전협의의 대상”이라고 명시했다(손영우, 2018). 하지만 한국은 프랑스가 아니다. 사회적 대화의 영역이 있는가 하면 정부나 국회의 영역이 따로 있다. 그런 만큼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정책은 언제든 노동계와 충돌할 소지를 안고 있다. 그때마다 노조가 사회적 대화 불참을 선언한다면 사회적 대화는 노동계의 볼모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이지 사회적 대화는 노사단체가 정부를 위해 곁다리로 참가해 주는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는 걸까.

다시 묻는 질문 “사회적 대화란 무엇인가”

사회적 대화로부터의 철수가 노동계의 상투적인 전술이 된다는 사실은 “사회적 대화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다시 묻게 만든다. 사회적 대화란 노동계가 참여하는 정책 결정 거버넌스일까, 아니면 노동계를 포섭하기 위한 고도의 계급 타협 전술일까. 그래서 노동에게 사회적 대화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랑니 같은 걸까.

사회적 대화는 노사가 정책의 결정 과정에 개입하는 노동정치의 일환이다. 정부의 정책독점을 막는, 다시 말해 권력을 공유함으로써 민주주의를 공고하게 다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기업의 테두리에 갇힌 노조에게 정책이나 입법은 손이 닿지 않는 영역이었고 저항의 대상이기 마련이었다. 사회적 대화는 바로 이 지점, 초기업의 차원에서 노동정치의 부재를 ‘노동 있는 민주주의’로 돌려놓는 과정이다.

2017년 12월, 민주노총 보건의료노조 위원장 선거에서 나순자 후보조가 내세운 구호는 “저지의 시대에서 쟁취의 시대로 가자”였다. 당시 나는 그것을 “저항에서 정치로”(from protest to politics)라는 구호로 이해했다. 쟁취의 시대로 향하는 간선도로가 사회적 대화라는 사실을 내포했는지는 그 후 당선된 나순자 위원장에게 물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사회적 대화는 저지의 정치를 넘어 형성의 정치이며, 나 위원장의 표현에 따르면 쟁취에 해당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하에서는 주제를 바꿔 쟁취의 정치로서 사회적 대화에 대해 살펴본다. 문재인 정부에서의 사회적 대화가 갖는 성격과 특징도 따져 볼 작정이다. “사회적 대화는 무엇인가”라는 건 최저임금 사태를 겪으면서 절실하게 떠오른 질문이었다. 또한 그것은 이 시점에서 윤석열 정부의 사회적 대화를 비교·평가하는 잣대가 되는 것은 물론, 윤석열 시대를 넘어 사회적 대화를 설계하는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전 경사노위 상임위원 (tjpark0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