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저임금의 저주에 걸린 사회적 대화 ③
한국노총, 항의(voice)로써 노사정대표자회의 불참
민주노총에 이어 한국노총이 노사정대표자회에 불참하면서 사회적 대화는 중단됐다. 양대 노총이 백투백(back to back)으로 노사정대표자회의를 떠났지만 속내까지 같은 것은 아니었다. “사회적 대화는 죽었다.” 한국노총의 표현은 세고 거칠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복귀를 전제로 한 으름장이었다. 주먹을 쓰려면 말이 거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사회적 대화에 대한 이탈(exit)이 아니라 항의(voice)의 표현이었다. 한국노총이 노사정대표자회의을 떠난다고 선언했지만 떠날 준비도, 떠날 의사도 없었다. 최저임금 산입범위의 확대와 관련해 한국노총도 ‘뭔가’를 보여줄 필요가 있을 뿐이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한국노총은 누구보다 사회적 대화에 적극적이었다. 한국노총은 문재인 대통령 후보와 ‘대선 승리 노동존중 정책협약’을 맺고 노동존중을 위한 “법 개정은 사회적 대화를 통해 추진한다”라고 합의했다(2017년 5월1일).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이후 김주영 한국노총 위원장은 이른바 ‘9·26선언’을 통해 대통령이 참여하는 8자 회의를 제안했다. 사회적 대화를 거부하고 있는 민주노총을 빼더라도 사회적 대화는 제 갈 길을 가야 한다는 속내를 담았다.
사회적 대화기구 개편안에 대한 민주노총의 내부 논의가 지체되자 독자 입법안을 발의하겠다고 나선 것도 한국노총이었다. 2018년 4월 중순의 일이었다. 민주노총에 끌려가다간 ‘개혁을 위한 대통령의 시간’을 놓칠 수 있다는 명분이었다. 민주노총과의 주도권 다툼을 너머 민주노총 배제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김주영 위원장 자신이 사회적 대화의 효과를 몸으로 체득한 ‘사회적 대화파’였다. 결정적인 계기는 2004년 6월, 노사정위원회 공공특위는 전력도매시장의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정부가 추진하던 배전분할을 중단하기로 합의했다. 산업자원부는 합의를 수용해 한국전력의 분할을 중단했다. 노동조합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당시 전력노조 위원장이 김주영 위원장이었다.
한국노총 내부에서 사회적 대화를 체계적으로 거부하는 정파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었다. 산별 위원장이나 지역본부 의장들에게 사회적 대화는 정부와 조합원을 잇는 정책통로였다. 그 통로를 타고 때로는 민원사항이 전달되기도 했다. 길을 닦아 놓으면 소금장수도 깍정이도 지나가는 법이다. 사회적 대화의 결과에 대한 찬반은 있었지만 사회적 대화 자체에 대한 찬반은 없었다. 결과에 대한 찬반 논의가 치열하긴 했지만 집행부의 의지가 꺾인 적도 없었다. 더욱이 한국노총은 사회적 대화를 독점하면서 사실상의 거부권을 행사해 온 ‘사회적 권력’이었다.
민주노총, 이탈(exit)로써 노사정대표자회의 불참
민주노총의 사정은 달랐다. 새로 등장한 집행부가 사회적 대화를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내부의 반대는 건재했다. 지도부의 공약이 조합원에 대한 약속이고 국민에 대한 선언이었지만, 그것이 정파의 이해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 지도력은 취약했고 갈잎처럼 흔들렸다. 최저임금 산입범위가 확대되면서 노사정대표자회의 불참을 선언한 것은 정부·여당에 대한 항의의 표시였지만, 내부의 반대를 무마하기 위한 타협이기도 했다. 무게중심은 후자에 놓였다. 총을 들고 외부를 경계하면서도 지도부의 시선은 내부로 향하고 있었다.
민주노총의 불참 선언은 정파 간 힘 관계 속에서 사회적 대화에 복귀하지 못하는 자충수가 될 수도 있었다. 민주노총이 불참을 선언하기 전날, 민주노총 부위원장 한 명이 출근길이라며 노사정위원회를 들렀다.
“민주노총이 최저임금을 빌미로 노사정대표자회의에 불참을 선언하면 사회적 대화에 복귀할 명분을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렇잖아도 김명환 위원장은 연말 내로는 복귀가 어려울 것이라고 밝혔다.”
“민주노총은 노사정대표자회의를 건널목으로 삼아 사회적 대화에 복귀하는 절차를 밟았는데 그걸 지금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경사노위 출범을 내년까지 늦추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민주노총은 최저임금 산입범위라는 보퉁이를 건지려다 사회적 대화랑 노동존중사회를 몽땅 물에 떠내려 보낼 수 있다.”
“민주노총으로서도 사회적 대화는 중요하다. 건건이 민주노총의 의견이 관철되지 않으면 사회적 대화에 불참하겠다고 경고하고 나서는 것은 옳지 않다는 데 동의한다. 내부에서도 그렇게 얘기해 왔다. 그러나 이번 건은 다르다. 최저임금 산입범위가 확대되면 민주노총이 그냥 지나갈 수는 없다.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민주노총으로서는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게를 못 잡으니 게를 잡는 구럭까지 내버리겠다는 전술이었다. 민주노총은 벌써부터 적잖은 개혁 과제를 대화의 의제로 제안해 두고 있었다. 노동기본권 보장과 ILO 기본협약 비준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나 조선산업을 필두로 전개되는 구조조정에 대한 대응도 죄다 민주노총이 제기한 의제들이었다. 민주노총은 10개 가까운 업종별 협의회의 구성도 제안해 두고 있었다.
노사정대표자회의 실무협의회를 열어 사회적 대화의 후속조치를 논의한 건 민주노총이 불참을 선언하기 나흘 전인 5월18일이었다. 당분간 의제별·업종별 위원회 설치에 집중하기로 합의했다. 이 자리에서 민주노총은 거듭 구조조정과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다룰 특위 구성을 요구했다. 경총의 반대는 요지부동이었다. 민주노총은 두 특위 구성이 관철되지 않으면 노사정대표자회의의 참가도 재고하겠다는 게 상집위의 결정이라는 사실을 전했다. 4월22일, 운영위원회에서 백석근 사무총장이 같은 말을 했다가 철회한 바로 그 말이었다. ‘불참’이 양치기 소년의 말이 돼가고 있었다.
민주노총 소속 보건의료노조가 보건의료협의회의 설치를 요청한 것도, 김용범 금융위원회 부위원장과 통화해 금융산업협의회의 사측 대표(은행연합회·금융산업사용자협의회)와 노측 대표(한국노총의 금융노조와 민주노총의 사무금융노조)의 구성을 최종 합의한 것도 그날이었다. 금속노조 지도부는 구조조정과 간접고용(불법파견) 문제를 다룰 위원회 설치를 요청하러 몇 차례나 노사정위원회를 다녀갔다.
잊힌 의제가 된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
한바탕 소동을 겪었지만 그때뿐이었다. 민주노총은 정책보고서(2018년 5월)를 발간하고 한국노총은 긴급토론회(2018년 6월)를 열어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가 최저임금의 인상에 미치는 부정적인 효과가 매우 크다는 사실을 알렸다. 거기까지였다.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는 잊힌 의제가 됐다. 최저임금위원회도, 경제사회노동위원회도 이 쟁점을 비껴갔고, 양대 노총이 어떤 속내로 노사정대표자회의를 떠났든 누구도 이 문제를 의제로 제안하지 않았다. 2018년 국회를 통과한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는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다.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가 저임금 노동자에게 미치는 영향보다는 사회적 대화를 둘러싼 논쟁의 연료로 소비된 것은 아닌지 의혹을 가질 수 있는 대목이다.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는 국회를 통과했고 양대 노총은 노사정대표자회의를 떠났다. 사회적 대화에 관한 모든 논의는 일시에 중단됐다. 부산스레 잔치를 준비하다 일꾼들이 한꺼번에 떠나버린 뒤의 허탈 같은 것이었다. 문재인 대통령과 양대 노총 위원장의 면담(2018년 7월3일)을 발판으로 삼아 양대 노총이 노사정대표자회의에 복귀한 것은 9월 초였다. 하지만 의제도 분위기도 바뀌어 있었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출범 여부가 쟁점이었다. 민주노총이 불참과 탈퇴를 조자룡의 헌 칼처럼 쓰는 맞은편에는 민주노총을 사회적 대화에서 배제하려는 움직임이 가동되고 있었다.
전 경사노위 상임위원 (tjpark0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