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O ‘Decent Work’는 ‘양질의 일자리’가 아니다

2024-10-10     윤효원
▲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국제노동기구(ILO) 홈페이지 상단에 ‘Advancing social justice, promoting decent work’라는 구호가 나온다. ‘social justice’는 ‘사회정의’로 쉽게 해석되지만, ‘decent work’는 우리나라에서 ‘양질의 일자리’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다.

‘괜찮은’이나 ‘적당한’ 정도의 뜻을 가진 ‘decent’를 ‘양질’로 번역하는 게 올바를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선진국은 물론 후진국에서도 실현해야 하는 보편적 기준을 채택하는 ILO의 역할을 고려할 때 ‘양질의 일자리’는 무리한 번역이라는 판단이다. 영어사전에서 ‘양질’을 검색하면 ‘high quality’ 혹은 ‘good quality’라는 답이 나온다.

2017년 9월 서울시는 ILO와 함께 ‘International Forum on Transforming Cities for Decent Work’라는 행사를 개최했고, 우리말로 ‘좋은 일자리 도시 국제포럼’이라 했다. 당시 방한한 ILO의 이상헌 박사에게 ‘good work’라면 될 텐데 왜 ‘decent work’라 했는지 물어봤다. 이 박사는 영어의 세계에서는 ‘decent’가 ‘good’보다 하위의 개념이라 했다. 스페인어 같은 라틴어의 세계에서는 반대라고도 했다. 노동자 출신 룰라 대통령으로 유명한 브라질 노동자당(PT)이 선거 구호로 ‘Brazil Decente’을 내세운 적도 있다.

우리와 같은 한자권 나라인 중국은 ‘体面劳动’혹은 ‘体面工作’이라 한다. ‘체면을 지키는 일자리’ ‘품위나 명예를 유지하는 일자리’라는 뜻이다. 일본은 마땅한 말을 찾기 어려웠던지 영어 발음을 자기 문자인 가타카나로 그대로 표기한 ‘ディーセント・ワーク’을 사용한다. 독일에서는 ‘인간의 존엄을 존중하는’ 또는 ‘인간답게’라는 뜻을 가진 ‘Menschenwürdige’로 쓴다.

ILO의 ‘Decent Work’는 1999년에 도입됐다. 당시 사무총장이었던 후안 소마비아(Juan Somavia)는 이 개념을 ILO의 핵심 목표로 제시했다. 소마비아 총장은 1999년 ILO 연차총회인 국제노동대회에서 “단순히 일자리 수를 늘리는 것뿐만 아니라, 일자리의 질도 중시하고, 일자리가 사회적 통합, 경제적 안정, 지속가능한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 목표로서 ‘Decent Work’를 주창했다.

ILO에 따르면 ‘Decent Work’는 (1) 고용기회 제공 (2) 노동권 보장 (3) 사회적 보호 확대 (4) 사회적 대화 촉진의 네 가지 전략적 목표를 가진다. ILO는 네 가지 전략적 목표의 달성 여부를 측정할 수 있는 지표도 개발해 놓고 있다. 나아가 ‘Decent Work’ 개념은 국제연합(UN)의 ‘2030 지속가능발전목표(SDGs)’에서 8번 목표가 됐다.

인간의 체면과 품위와 명예를 지킬 수 있는 일자리는 ‘양질의 일자리’밖에 없을까. ‘저질의 일자리’에서는 체면과 품위와 명예를 지킬 수 없는 것일까. 세상만물이 명암이 있고 음양이 있다. 이런 이치를 생각한다면 모든 일자리가 양질이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양질의 일자리도 있고, 저질의 일자리도 있는 것이다. 특히 플랫폼 경제로 이행하면서 ‘양질의 일자리’와 더불어 ‘저질의 일자리’도 대량으로 창출되고 있다.

‘Decent Work’의 기둥인 고용기회, 노동권 보장, 사회적 보호 확대, 사회적 대화가 ‘양질의 일자리’를 저절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반면에 네 개의 기둥은 노동자가 ‘일의 세계’(The world of work)에서 인간으로서 체면과 품위와 명예를 지킬 수 있게 만든다.

이러한 사정들을 고려할 때, ‘양질의 일자리’라는 번역은 ILO의 핵심 정책인 ‘Decent Work’의 실천적 맥락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아 보인다. 노동시장 상층에 분포하는 소수 ‘양질의 일자리’뿐만 아니라 하층에 존재하는 다수 ‘저질의 일자리’에도 고용기회, 노동권 보장, 사회적 보호 확대, 사회적 대화가 적용돼야 하기 때문이다.

윤효원 객원기자/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webmaster@labor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