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을 바꾸는 사람들④] 김도윤 타투이스트, 편견·낙인 딛고 노조 설립한 ‘룰 메이커’

‘파인 타투’ 장르 선도자가 노조 활동가로 … “합법화 넘어 예술인 인정까지 나아가야”

2024-09-19     어고은 기자

2024년 매일노동뉴스가 노동을 바꾸는 사람들을 찾아갑니다. 바뀌지 않을 것 같은 부조리한 노동의 세계에 작지만 확실한 균열을 내고 변화를 만드는 이들입니다. <편집자>

▲ 정기훈 기자

“기존에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을 한번 시도하고 그걸 계속 이어 나가면 그 다음부터는 ‘룰’이 돼요.”

‘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타투이스트 김도윤(44)씨는 기존에 형성된 관행이나 문화를 깨고 새로운 룰을 만들어 나가는 사람이다. 타투 시술부터 타투스튜디오 운영방침까지 김씨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시도하고 꾸준히 이행해 왔다. 2006년 타투를 시작할 때부터 혐오·음란·반종교적 주제는 의뢰를 받지 않았다. 현재 작업실은 소속된 타투이스트의 수입에서 일정 수수료를 떼는 방식이 아니라 작업자 수입에 비례해 공간 대여 등을 공동 분담하는 형태로 운영된다.

김도윤씨의 실험 정신은 2020년 노조설립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한국에서 타투가 불법인 탓에 신고 협박과 고객 갑질에 취약한 타투이스트들에게 든든한 울타리를 만들어 주고, 노동의 가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였다. 세계적 타투이스트이자 국내 최초 타투이스트 노조를 만든 주역, 김도윤 화섬식품노조 타투유니온지회 사무장을 지난 11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에 위치한 타투스튜디오 ‘잉크트월(INKEDWALL)’에서 만났다.

예술적 표현부터 아픔 치유까지,
 한국 타투 세계화 함께한 인물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김씨는 졸업 이후 IT회사에서 UX디자이너로 일했다. 일도 재밌었고 사람들도 좋았다. 그런데 임금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당시 같은 전공에 비슷한 경력의 또래에 비해서는 조금 더 높은 연봉을 받았지만 디자인업계 자체가 과로와 박봉으로 악명이 높았다. “내가 가진 능력이나 기술이 사회에서 왜 이렇게 형편없게 평가를 받는지 의문”이었다는 김씨는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곳을 찾다 타투이스트라는 직업을 알게 됐다.

김씨는 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타투의 세계에 입문했다. 일은 적성에 맞았다. 아내에게 “한국에서 제일 잘하는 사람이 될게”라고 말할 정도로 자신감도 있었다. 바로 전업으로 일할 순 없었다. 불법 낙인과 불안정한 수요 탓이었다. 김씨는 본인의 이름을 내걸고 첫 타투 작업을 한 2006년부터 8년간 회사를 옮기기도 하고 모바일 게임회사 창업을 하는 등 ‘투잡러’로 살았다. 2014년 비로소 서울 방배동에 첫 타투스튜디오를 열었다. 불법 낙인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수요가 폭증하던 시기였다. 인스타그램 홍보를 시작하며 전 세계에서 한국 타투업계를 눈여겨 보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다른 사람에게 위협을 주려는 목적으로 타투를 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대부분 예술적 영감을 본인 몸에 표현하는 용도로 타투를 해요. 타투이스트는 한 사람에게 가장 가치 있는 그림을 선사하는 일인 것 같아요. 다수의 사람이 아니라 특정한 개인에게 맞춰져 있고, 그 사람이 평생 간직할 수 있는 그림이요.”

‘파인 타투(일명 K-타투)’ 장르를 개척한 한국 타투이스트 가운데 한 명이기도 하다. 타투 경력 19년 차인 그는 지인에게 무료로 시술한 첫 사자 타투부터 지금까지 모든 작업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김씨에게 타투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최고의 희열을 느낄 수 있는” 직업이다. 최근에는 사고로 손가락을 잃은 고객의 손가락 마디에 손톱을 그리고, 유방암 환자에게 유륜을 그리는 일도 했다. 타투는 예술적 영감의 표현이자 아픔을 치유하는 작업이다.

“내가 사랑하는 직업, 노동의 가치 높여야”

타투이스트로서 어느 정도 돈도 벌고 명예도 얻은, 직업적 성취를 이룬 김씨는 2020년 왜 노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까. 그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무한한 애정은, 타투이스트의 취약한 노동환경을 바꿔야 한다는 문제의식으로 이어졌다. 매년 타투이스트 1~2명이 신고를 당하거나 고객에게 협박을 당해서 자살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2019년 김씨 주변의 한 타투이스트도 그렇게 세상을 등졌다.

“노조를 만들어서 타투노동자들의 노동 가치를 높이고 싶었어요. 제가 사랑하는 직업을 비하하는 것을 참기 힘들었어요.”

타투이스트들의 노동은 한국에서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1992년 문신을 의료행위로 규정한 대법원 판결 이후 한국에서 이뤄지는 대부분 타투 시술은 불법으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의료법 27조와 보건범죄 단속에 관한 특별조치법(보건범죄단속법) 5조에 따라 의사 면허가 없는 타투 시술은 단속 대상이다. 타투가 불법이라는 점을 악용해 ‘신고하겠다’고 협박한 뒤 돈을 뜯어내는 등 고객 갑질에 내몰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김씨는 국내 첫 타투 노조를 2020년 2월 화섬식품노조에 결성하고 나서 타투 합법화를 위한 투쟁에 매진해 왔다. 초기 타투유니온지회장을 맡았고 현재 사무장으로 일하고 있다. 노조설립 이후 4년간 관련법 개정을 위해 지난한 싸움을 이어 왔지만 21대 국회에서도 결국 좌절됐다. 김씨는 타투가 의료행위가 아닌 예술이라고 강조한다.

“모든 직업은 교차 영역이 있어요. 요식업 종사자들도 식중독을 예방하기 위해 요리와 관련한 지식뿐만 아니라 요리 영역 바깥의 지식이 필요하잖아요. 타투는 90% 정도가 미술이고, 나머지 10% 정도는 외적인 지식이 필요해요. 교차 영역이 있다고 해서 타투의 본질을 의료행위라고 할 수 있나요. 사람 몸에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작업자가) 계속 공부해야 하고, 국가로부터 관리도 받아야 해요. 양심에만 맡겨놓을 수 없는 영역이 있는 것은 맞아요. 그러니까 더욱더 소비자들이 안전하게 타투를 받을 수 있도록 합법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기훈 기자


타투이스트 건강검진·멸균지침 ‘좋은 선례’ 만들어

불법이라는 현실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노조가 생기고 나서 달라진 점도 많다. 김씨는 좋은 선례이자 새로운 룰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우선 지회 조합원들은 녹색병원에서 연 1회 타투이스트 직업적 환경에 맞게 설계된 건강검진을 받을 수 있게 됐다.

“노조에 가입하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지만 일단 노조에 가입하고 나면 ‘괜찮은 회사’에 취직한 것 같은 느낌을 (조합원들에게) 주고 싶었어요. 노조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 그 효용성을 몸으로 느끼게 하는 방법 중 하나이기도 했어요.”

지회는 2020년 11월 녹색병원과 함께 ‘세계 최고 수준’ 타투이스트 감염관리 지침을 만들기도 했다. 활동명 ‘조각’ 타투이스트가 기부한 2천만원을 토대로 지회 조합원들은 녹색병원에서 해당 지침에 따른 작업 절차와 감염 예방법 등을 교육받을 수 있다.

물론 불법 신분에 프리랜서 혹은 자영업자라는 고용형태 탓에 노조활동이 쉽지만은 않다. 전국적으로 흩어져 일하는 직업적 특성상 일단 모이는 것 자체가 어렵다. 현재 조합원은 약 700명이다.

“그림 그리는 사람들 성향이 밖에 나와서 한데 모이려고 하지 않아요(웃음).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라이브 방송 등을 통해 소통을 하기도 하는데요. 꼭 어딘가에 모이지 않더라도 와해되지 않고, 하나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조직을 꾸릴 수 있는 게 목표입니다.”

합법화 이후도 과제다. 김도윤씨는 타투이스트에 대한 사회적 인정과 제대로 된 평가를 위한 제도개선이 궁극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법제화 이후 국가가 임의로 타투이스트 자격 기준을 정해서 예술에 급수를 매기는 식으로 변화하지는 않을지 우려돼요. 이걸 막기 위해서라도 ‘타투=예술’로 인식하고 이를 보장하는 제도가 필요해요. 예술인으로서 법적 지위를 인정받기 위한 활동들을 연내에 본격화할 계획이에요. 가장 큰 목표는 타투노동자의 노동 가치를 지키는 것입니다. 타투 법제화는 이를 위한 단계일 뿐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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