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한 시범사업 여파?] 필리핀 가사노동자 임금체불 상태로 첫 출근
임금 지급일 두고 시범사업 도입단계부터 노동부 '혼선'
필리핀 가사노동자가 지난달 20일 급여 일부를 지급받지 못한 상태로 3일 첫 출근했다. 임금체불 원인으로 서울시와 고용노동부의 무리한 사업 추친이 꼽힌다.
노동부·업체, 임금 지급일 두고 설명 엇갈려
필리핀 가사노동자는 지난달 6일 입국해 이달 2일까지 160시간의 특화교육을 받고 이날부터 142개 가정을 대상으로 서비스에 들어갔다. 이들은 출근하기 전부터 체불임금으로 몸살을 앓았다. 사실 이같은 혼선은 시범사업 도입 당시부터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다. 필리핀 가사노동자 업무 투입 전 교육 비용을 누가 부담할지를 두고 노동당국과 시범사업 참여 업체 간 논란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업체측은 필리핀 가사노동자가 업무에 투입되기 전 1개월 교육 기간에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사실에 난색을 표했다. 시범사업이 6개월 뒤에도 지속될지 불확실한 상황에서 1개월치 임금을 더 지급해야 한다는 사실에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다.
결국 노동부가 임금 지원 등을 제안하고 업체가 이를 수용하면서 일단락됐다. 방식은 사업주가 유급휴가를 주고 교육을 시키되, 관련 임금 지원을 정부가 하는 것이다. 현재 시행 중인 단순취업(E-9) 비자 특화훈련 제도와 동일한 방식이다. 해당 제도는 사업주가 E-9 노동자에게 유급휴가를 주고 사업장 조기 적응을 위한 한국어·문화, 산업안전, 직무기초교육 등을 실시하는 내용이다. 고용주가 노동자에게 통상임금에 해당하는 금액 이상의 임금을 지급하면 정부가 최저임금 150% 한도 내에서 비용을 지원하는 것으로, 훈련비와 월 33만원 한도로 숙식비도 산업인력공단이 부담한다.
이후 임금지급일을 두고 노동부와 업체 사이에 혼선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매일노동뉴스>가 확인한 결과 지난 7월 필리핀 가사노동자 근로계약서 작성 당시 노동부는 업체측에 “근로계약서상 임금 지급일은 매달 20일인데 대상근무일 기간이 언제냐”고 문의했고 업체측은 “근무일은 1~31일이며 익월 20일이 임금 지급일”이라고 답했다. 노동부도 8월20일 임금이 체불될 수밖에 없는 업체 사정을 사전에 인지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필리핀 가사서비스 사업에 참여하는 업체 관계자 ㄱ씨는 “내부 급여 지급 관행에 따라 급여 지급일을 8월20일이 아닌 9월20일로 노동부에 미리 얘기했었다”며 “가사관리사는 매번 근무시간을 체크하기가 어려워 익월 첫째 주에 고객과 가사관리사에 시간 정산을 요청하고, 사실관계 확인을 통해 임금을 지급했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필리핀 가사노동자 숙소비 지급도 9월20일 지급하기로 약속했다.
이와 관련해 노동부 관계자는 “사업을 진행하면서 임금 지급일(익월 20일 지급)과 관련해 논의됐을 수 있지만, (노동부가) 그렇게 해도 명시적으로 법 위반이 아니라고 답변한 것은 아니다”며 “사업 추진 과정에서 임금은 첫 달 지급하는 것이 맞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정부가 주도해 사업 시작하더니, 업체에 떠맡겨
임금체불 여부를 판단하는 관건은 근로계약서상 임금 지급일을 어떻게 약정했는지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근로계약서에는 매달 20일 임금을 지급하기로 했는데, 언제부터 언제까지 일한 급여를 20일에 지급하기로 했는지 명시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의 입장을 종합하면 근로계약을 체결한 뒤 교육을 했다면, 원칙적으로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 다만 이달 일한 임금을 다음달 20일에 지급하기로 했다면 업체는 임금체불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다.
노동부는 시범사업 참여 업체의 임금 기산점(임금지급 기준이 되는 근무일)을 어떻게 산정해야 할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다. 노동부 관계자는 “임금 지급의 기준이 되는 기산점을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에 대해서 짚어보고 있다”고 부연했다.
물론 임금지급일이 너무 늦으면 문제일 수 있다. 유성규 공인노무사는 "근로기준법에서 임금은 매월 1회 이상 일정한 날짜를 정해 지급하도록 규정한다"며 "임금 지급 기간이 (일한 기간과) 간격이 너무 길 경우 노동부는 법 위반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필리핀 가사노동자의 임금체불 문제 근원에는 정부 주도의 주먹구구식 외국인력 도입 정책이 있다는 지적이다. 조혁진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고용허가제도(E-9)는 업계에서 내국인을 채용할 수 없으니 외국인을 채용하게 해 달라고 주장하고, 정부가 업계의 요구를 수용해 외국인력 고용을 허가하는 대신 교육과 운영을 책임지고 하라는 것이 기본 구조”라며 “가사서비스의 경우 처음부터 업계의 요구라기보다 서울시가 주장해 시작한 사업으로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것”이라고 비판했다. 조 연구위원은 “인력중개업의 특성상 가사서비스업계는 수익이 많이 날 수 없다”며 “이런 사업의 특성을 알지 못한 채 서울시가 무리하게 사업을 추진한 것이 문제의 원인”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