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하청노동자 “이대로 살 수 없다”
파업 뒤 2년간 시급 1천460원 올라 … 저임금·체불·폐업·재해 4중고
“이대로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노동자가 1평 남짓한 철제구조물에 제 몸을 가두고 외쳤던 구호가 또다시 울렸다. 이번에도 조선소 하청노동자다. 금속노조는 22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한화오션(옛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 51일 파업 타결 2년 기자간담회를 열고 여전한 저임금과 고용불안, 가중되는 재해 위험을 고발했다.
“수백억 흑자 한화오션, 하청 임금은 몇백 원 인상
2년 전 파업에 참여했던 이아무개(46)씨는 파업을 마친 뒤 시급이 350원 올랐다. 이듬해 고용노동부는 한화오션을 비롯한 원청 조선사와 상생협약을 체결했는데, 그해 이씨 임금은 650원 올랐다. 올해 이씨의 시급은 1만1천730원으로 파업 직전인 2021년과 비교하면 고작 1천460원 오르는 데 그쳤다. 14.2% 오른 셈인데 같은 기간 물가는 2021년 1.5%, 2022년 5.1%, 2023년 5%, 2024년 2.5%가 올랐다.
이씨는 “특근과 잔업을 안 하면 한달 270만원 정도 번다”며 “조선업이 호황이고 한화오션은 수백억 흑자를 내도 하청노동자 임금은 1년에 고작 몇백 원 오르다 보니 아예 조선소를 떠나거나 사내협력사 상용직(본공)을 그만두고 상대적으로 시급이 높은 물량팀으로 가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이씨는 본공의 임금을 인상하고 상여금도 높여달라고 요구했다. 2년 전과 같다. 2022년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은 2016년 일괄 삭감한 상여금 550% 원상회복과 본공 임금인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임금 대신 늘어난 건 프로젝트팀, 임시업체 등으로 불리는 또 다른 물량팀과 이주노동자였다.
처우가 제자리이니 본공은 늘지 않는다. 한화오션 한 조립업체의 7월 기준 인력을 살펴보면 관리 사무직 10명, 본공 37명, 직시급제 8명, 촉탁직 6명, 이주노동자 28명, 재하도급 물량팀 40명이다. 129명 중 제대로 근로계약을 체결해 일하는 정규직은 관리직과 본공 47명에 그친다. 이씨는 “조선업 호황이 얼마나 갈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본공을 계속 줄이면 앞으로 10~15년 뒤 내국인 본공을 구할 수 없게 될 것”이라며 “그러면 한국 조선업이 지금 같은 위치를 유지할 수 있겠느냐”고 개탄했다.
노동시장 이중구조 “해소”라더니 ‘확산’해
2년 전 조선소 하청노동자 파업을 겪은 정부는 그해부터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해소하겠다고 공언했다. 그 결과물이 지난해 2월27일 체결한 조선업 상생협약이다. 협약서 문구는 미려하다. 원청은 적정 기성금을 지급하고, 하청은 임금인상률을 높여 원하청 간 보상 수준 격차를 최소화하는 합의를 포함해 △일한 만큼 정당한 보상을 위한 숙련 중심 임금체계 개편과 정부 지원 △에스크로 결제제도 적극 활용을 통해 하청노동자 임금체불 예방 △상시적 업무에 재하도급(물량팀) 사용 최소화 및 재하도급을 프로젝트 협력사로 전환 노력 △하청 보험료 성실납부를 전제로 원청의 하청 보험료 납부 지원방안 모색 및 정부의 연체금 면제 등이다. 협약을 체결할 당시 노동부는 “협약은 끝이 아닌 시작으로, 앞으로 정부는 조선업 상생협의체를 노조가 참여하는 공동협의회로 발전시키고 상생임금위원회를 중심으로 업종별 이중구조 실태조사를 실시하는 등 다른 업종으로 확산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2년이 지난 현재 노조는 배제돼 있고, 상생임금위는 흐지부지됐다. 오직 타 업종 확산만 이뤄졌다.
이 사이 조선소는 황폐화됐다. 지난해 말부터 임금체불이 또다시 불거졌다. 조선소 또 다른 하청노동자 강아무개씨는 “지회가 자체 집계한 한화오션 하청업체 임금체불은 지난 2월15일 5억원에서 6월15일은 15억원으로 그 규모가 3배 늘었다”며 “다수의 한화오션 하청업체는 은행에서 대출받거나 다음달 기성금을 미리 받는 형태로 한화오션에서 돈을 빌리지 않으면 하청노동자 임금을 체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쟁의조정서 드러난 기성금 후려치기 실태
결국 견디다 못한 하청업체 폐업도 줄을 잇고 있다는 주장이다. 하청업체 위기를 엿볼 수 있는 지표가 있다. 지난 19일 경남지방노동위원회에서 열린 한화오션 하청업체 20곳과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지회장 김형수)의 단체교섭 쟁의조정 회의다. 강씨는 “하청업체가 경남지노위에 제출한 경영자료에 따르면 20곳 중 2023년 수천만 원이라도 흑자를 낸 기업은 극히 드물고, 대부분 1억~2억원에서 많게는 10억원까지 적자를 냈다”며 “신생 업체든 십수 년 된 업체든 경영이 제 궤도에 오르지 못해 업체 폐업이 잇따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배경에는 고질적인 기성금 후려치기 문제가 있다. 원청이 하청인 사내협력사에게 기성금을 자의적으로 책정해 지급하는 관행이다. 한화오션은 전신인 대우조선해양 시절 불공정거래가 적발돼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2018년과 2020년 두 차례에 걸쳐 261억원에 달하는 과징금을 부과받기도 했다. 한화오션뿐 아니라 삼성중공업도 불공정거래로 적발됐지만 좀처럼 시정되지 않고 있다. <본지 6월17일자 2면 [조선업 불공정거래] 공사는 ‘지금’ 계약은 ‘나중’ 대금은 ‘절반’ 참조>
기성금을 적게 받으면 노동자 임금체불은 필연적이다. 강씨는 “150명을 투입한 공사에 100명분 기성금을 받으면 50명분 임금은 자연히 체불된다”며 “이런 구조가 수년간 쌓여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지급구조는 에스크로제도로도 구제가 불가능하다. 에스크로제도란 중간업체를 낀 도급계약에서 노동자 임금을 약정된 별도 계좌에 이체해 중간업자의 접근을 차단하는 제도다. 그러나 애초에 지급된 금액이 노동자 임금에 미치지 못한다면 에스크로제도에 묶어 놓는 방식은 무용하다.
의사소통 힘든 이주노동자, 재해 위험 노출
이 밖에 상생협약과 별도로 추진한 정부의 조선업 대책은 현장에 또 다른 어려움을 낳고 있다. 이주노동자 문제다. 사내협력사 본공 부족 사태를 해결하겠다며 정부가 비자 범위를 확대해 이주노동자 4천명을 현장에 투입했지만 오히려 산업재해만 늘고 있다. 실제 올해 6월까지 발생한 9건의 조선소 중대재해로 사망한 노동자 13명 중 2명이 이주노동자다.
이날 하청노동자들은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실질적인 조선업 정상화를 촉구했다. 김형수 지회장은 “빅3 조선소 모두 올해 1분기 수백억 원 영업이익을 기록했지만 하청노동자는 변함 없이 저임금과 임금체불, 4대 보험료 체납, 업체 폐업에 따른 고통을 겪고 있다”며 “이름뿐인 상생협약으로 조선소 현장은 손톱만큼도 나아지지 않았다. 생색내기 협약이 아니라 하청노동자에게 노동 3권을 실질적으로 주고 원청과 단체교섭을 하도록 노조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를 개정하고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 말라”고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