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파견 기간 ‘승진’ 대법원 첫 인정

원청 필요에 따라 원·하청 오간 노동자 … 대법 “묵시적 근로계약 승진 인정해야”

2024-07-12     강석영 기자
자료사진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원청 필요에 따라 원·하청을 오간 노동자에 대해 원청과 묵시적 근로계약관계를 인정하고 비정규직 기간 호봉은 물론 승진도 인정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불법파견이나 부당해고 사건에서 사용자의 불법행위 기간 피해노동자의 호봉은 물론 심사가 필요한 승진도 인정될 가능성이 커졌다.

30여년간 원청 정규직→하청노동자→원청 비정규직

대법원 민사2부(주심 이동원 대법관)는 지난 11일 김아무개씨가 방산업체 한화에어로스페이스㈜를 상대로 낸 호봉정정 등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부산고법으로 돌려보냈다.

김씨는 1990년 8월 삼성항공산업(현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정규직으로 입사해 운전업무를 수행했다. 주로 방산물자 수송 차량을 운전했다. 1998년 외환위기가 발생하자 사측은 운전업무를 외주화했다. 총무팀 소속 운전담당자를 ‘가짜 사장’으로 내세워 하청업체를 차리게 했다. 김씨 등 운전직 노동자들은 같은해 하청업체로 소속이 바뀌었다. 하청업체가 2016년 폐업하면서 김씨는 원청 촉탁직으로 재입사했고 2018년 7월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됐다.

김씨는 20년 가까이 하청노동자로 일하며 원청의 지휘·감독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1990년 8월 원청 최초 입사날부터 계속근로를 인정하고, 이에 따른 승진을 반영해 호봉을 정정해달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쟁점은 근속에 따라 자동으로 올라가는 호봉뿐만 아니라 심사가 필요한 승진까지 인정할 수 있냐였다. 1심은 근로관계 형식만 따져 김씨와 원청 사이 묵시적 근로계약관계부터 성립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2심은 이를 뒤집고 1990년 8월부터 김씨의 계속근로를 인정해 부장 3년차로 호봉을 정정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부산고법 창원민사1부(재판장 김관용 부장판사)는 원고 패소로 판결한 1심 판결이 잘못됐다며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했다. 재판부는 하청업체가 껍데기뿐이라며 원청과의 묵시적 근로계약관계가 성립됐다고 판단했다. 원청이 핵심 자산인 차량을 모두 소유한 점, 원청이 전적으로 배차를 지시하는 점, 도급비 대부분 하청노동자 인건비인 점 등을 이유로 들었다.

아울러 원청이 김씨에게 부장 3년차 호봉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원청 취업규칙상 대리-과장-차장-부장 등 승격마다 3~6년 표준 체류연한이 있는 점, 김씨가 1990년 입사 뒤 1998년 퇴사까지 8차례 모두 정기승급한 점 등을 이유로 들었다.

대법 “어느 직급까지 승격했을지 인정해야”

이미지투데이

대법원도 노동자측 손을 들어줬다. 김씨와 원청의 묵시적 근로계약관계가 성립됐다고 보고, 원청 취업규칙에 따라 김씨가 어느 직급까지 승진했을지 살펴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원청 소속 노동자 중 운전업무를 수행한 다른 노동자가 있었는지를 살펴, 그러한 노동자가 있다면 동일직군·직종의 직급 및 임금체계를 김씨에게 적용해야 한다”고 봤다.

그러면서 “만일 그러한 노동자가 없다면 김씨와 같은 운전직에 적용할 수 있는 적정한 다른 직군·직종의 직급 및 임금 체계가 있는지 등을 심리·판단해야 한다”며 “그러한 직군·직종이 승격 제도를 두고 있다면, 원청이 실시한 해당 직군·직종의 승격 심사의 내용과 승격 현황 등을 심리해 김씨가 어느 직급까지 승격했을 것인지를 합리적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다만 원심의 승격 산정방식이 잘못됐다며 이 부분을 파기환송했다. 김씨와 같은 운전직과 비교할 만한 직군·직종이 원청노동자 중 없다는 이유였다. 이 사건을 심리할 부산고법은 향후 근로내용과 가치, 사용사업주 근로조건 체계 등에 따라 김씨의 근로조건을 정할 것으로 보인다. 앞서 대법원은 지난 3월 한국도로공사 불법파견 사건에서 파견노동자와 동종·유사 업무를 수행한 사용사업주의 노동자가 없는 경우 법원이 근로조건을 적용할 수 있다는 법리를 제시했다.

김씨를 대리한 김두현 변호사(법무법인 여는)는 “고과 점수와 심사가 필요한 승진에 대해 기존 법원은 추단할 수 없다며 인정하지 않았다”며 “대법원이 비정규직 기간 승진을 감안할 필요성을 인정할 수 있다고 명시적으로 판단한 부분이 주목할 만하다”고 의의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