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효능감 ‘말살’ 시대

2024-07-12     김봉신
▲ 김봉신 메타보이스㈜ 부대표

해병대 채 상병 특검법안이 윤석열 대통령 거부권(재의요구권) 행사로 또 한 번 막혔다. 국회 의결 과정에서도 국민의힘 의원들이 집단적으로 거칠게 반발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여론의 흐름과는 전혀 다른 대통령과 여당의 행태를 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필자는 세계사 수업에서나 접하던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이 떠올랐다. 먼저, 만주에서 발원한 청이 명의 영토를 접수해 들어가면서 점령한 지역 내 주민들에게 변발을 강요했다는 내용이다. 변발이라는 게 북방민족의 풍습이라서 한족에게는 모욕적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이를 잘 알던 청은 변발을 거부하면 바로 처형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아이를 포함해 80만명을 학살했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도 있다. 이 같은 조치로 거의 자발적으로 변발을 하는 마을도 생겼다고 한다.

또 다른 역사 속 장면으로는, 몽골과 호라즘 왕국의 전쟁이다. 주장하는 측마다 다른 관점이겠으나, 공통적인 내용은 호라즘 왕국에 몽골이 사신을 보내 교역을 요구하거나 항복을 요구했는데 호라즘 술탄이 사신을 모두 죽여 몽골로 돌려보냈다는 데서 시작한다. 필자가 듣고 놀랐던 건, 몽골군이 호라즘 왕국의 일부 지역에서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을 다 죽였다는 이야기다. 여자나 아이나 가축을 포함해서 거의 모든 생명을 청소하듯 학살했다고 들었다. 이 소식이 서아시아를 넘어 유럽까지 퍼져 몽골군이 쉽게 항복을 받은 나라가 생겼다고도 들었다.

영화 속 장면도 이어졌다. ‘월드 인베이젼’(World Invasion)이라는 영화다. 외계인의 지구 침공을 다룬 영화인데, 외계인이 말 한마디 걸지도 않고 그냥 미국 서부에 인접한 바다로 낙하해 해변에 있는 사람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내용이다. 물론 미 해병대가 각고의 노력 끝에 방어의 실마리를 찾는다는 뻔한 스토리다. 필자가 기억하기로, 영화 속 이야기를 성립시키기 위해 중간에 넣은 대사 중 닥치는 대로 사람을 학살하는 이유가 저항의 의지마저 꺾기 위해서라는 내용이 있다. 앞선 두 가지 역사적 사실과도 맥락이 같다.

독자 중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와 여당 의원들의 행태가 아무리 여론과는 달라도 어떻게 저런 무자비한 학살을 연상하느냐고 되묻는다면, 그 주장이 맞다. 저런 학살극은 전혀 다른 장면이다. 다만 필자가 역사적 사실을 떠올린 것은 학살을 떠올린 게 아니라 '저항의 의지마저 상실케 하는 조치'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다. 즉 최근 대통령과 여당이 국회와 대결하는 과정을 본다면, 여론을 등에 업은 야당과는 달리 여론의 흐름을 역행하면서 ‘효능감을 조금도 느끼게 하지 않겠다’라는 의지를 느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정부 들어서 횟수에서 이미 기록적인 거부권 행사가 있었고, 그 과정을 전후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반대하는 여론이 상당히 우세했다. 지난 1월 전국지표조사(NBS) 결과를 보면 김건희 여사 특검법에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데 응답자 65%가 ‘잘못한 결정’이라고 했다고 하는데, 이는 3분의 2에 해당한다. ‘잘한 결정’이라는 응답은 23%에 그쳤다.

채 상병 특검법에 대한 한국갤럽의 여론조사도 비슷한 흐름이다. 지난 6월 4주(25~27일) 조사 결과, “현재 공수처와 경찰이 수사 중”이라는 문구를 넣고 “특별검사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그럴 필요 없다고 보십니까?”라는 문항에 “도입해야 한다”라는 응답이 63%로 나타났다. 국민 3분의 2가 채 상병 특검법에 찬성한다는 거다. 지난 5월 2주 조사결과보다 특검 찬성 응답이 6%포인트 많아졌다.

이렇듯 채 상병 특검 관련 도입 찬성 여론이 우세했고, 대통령의 거부권에는 반대하는 여론이 우세했다. 그럼에도 거부권 행사는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국민 다수의 요구가 있더라도 그에 전혀 호응하지 않음으로써 ‘효능감을 주지 않는’ 통치 스타일 같기도 하다.

그래서 필자는 ‘저항의지 무력화’를 연상했던 거다. 같은 맥락에서 이번 정부는 여러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대국민 사과도 쉽게 하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 시절 대국민 사과가 오히려 반정부 세력에게 효능감을 줘 연쇄적인 저항을 불러왔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겠다. 그러니 처음부터 얕잡아 보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저항에 반응하지 않겠다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전략적 판단은 ‘J곡선 혁명이론’을 통해서도 해석할 수 있다. 혁명이라는 게 절대 빈곤 상태에서 발생하는 게 아니고, 욕구를 충족하는 과정에서 기대하는 수준과 실제 충족된 수준 사이의 괴리가 생겼을 때 발생한다는 이론이다. 즉, 어느 정도 생활 수준이 상승하다가 기대한 수준과는 달리 삶의 질이 하락해 J곡선의 꺽이는 윗부분처럼 괴리가 커질 때 혁명이 발발한다는 것이다.

최근 유권자 욕구와 대통령 반응의 상호작용을 J곡선 혁명이론에 대입해서 본다면, 유권자의 기대를 높일 우려(?)가 있는 효능감을 줘서는 안 된다는 의지가 보인다. 즉 욕구에 반응해 효능감을 주면 더 높은 기대를 갖게 되고, 어느 순간 기대치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을 때 큰 저항을 불러올 수가 있다는 거다. 그러니 처음부터 효능감을 아예 주지 않는다면, 언젠가 닥칠 위기를 미연에 방지할 수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 느껴진다.

어쩌면 박근혜 정부 시절의 경험을 통해 얻은 이 같은 통치 전략은 집권 초기에는 유효했을지도 모르겠다. 국회의원 총선까지 다수 국민은 선거제도를 통해 심판하면 국민에게 주권을 잠깐 빌린 대통령의 태도에 뭔가 달라지는 변화가 생길 것으로 기대했을 수 있겠다. 그런데 여당의 참패로 끝난 4·10 총선 후에도 국정 기조는 바뀌지 않았고 거부권 행사 과정과 내용도 크게 바뀐 게 없다. 그리곤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발의해 달라는 국회 국민동의청원에 130만명이 참여했다고 한다.

이번 정부 집권 초기만을 본다면 효능감을 아예 주지 않는 게 더 좋다는 판단이 가능할 수 있겠지만, 조금 더 시간적 범위를 확장해서 지난 2016년 촛불부터 지금까지를 본다면 민심은 이미 J곡선의 꼭대기 정도에 올라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미 마음 속에서는 혁명이 일어날 수도 있을 정도로 대통령 반응에 대한 기대치와 실제 충족된 반응 간 차이가 커져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거다.

국민적 저항 의지마저 무력화할 수 있을 정도가 되려면, 역사적 사실에서 볼 수 있듯 상식을 뛰어넘을 정도의 압도적 폭력을 주저함 없이 행사해야 하는데 그건 아예 불가능하다. 또는 저항보다 더 달콤한 혜택을 주거나 곧 끝나니 참으라고 하는 등 피동적인 ‘전략적 인내’를 요구해야 하는데, 경제적 상황을 보면 그것도 별로 효과가 없을 것 같다.

메타보이스㈜ 부대표 (bongshinkim@naver.com)

[인용한 여론조사]

○ 전국지표조사(NBS) : 가상번호 전화면접 방식,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 자체조사
- 2024년 1월 2주 : 1월8~10일 조사

○ 한국갤럽 데일리오피니언 : 가상번호 전화면접 방식, 한국갤럽 자체조사
- 2024년 6월 4주 : 6월25~27일 조사

※ 더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