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이길 줄 알았다”] 아사히글라스 불법파견 민·형사 모두 ‘노동자 손’
2015년 5월 메르스 초입에 시작해 3천299일 만 … 부당노동행위 불인정 “사용자 맞지만 의도 없다”
“사건번호 2022다265635, 2022다265642 근로에 관한 소송 병합사건 원고 피청구인 차헌호 외 21명, 피고 선고인 AGC화인테크노한국 주식회사. 주문 상고를 모두 기각한다.”
짧은 선고를 들은 탁선호 변호사(법무법인 여는)가 두 주먹을 움켜줬다. 찰나의 조용한 환희가 재판정을 휩쓸었다. 맨 앞줄에 앉은 차헌호 금속노조 아사히글라스비정규직지회장의 표정은 볼 수 없었다. 법정경비가 소란을 제지했다. 무미건조한 대법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2018두44611 사건 부당노동행위 구제 재심판정 취소 원고 AGC화인테크노한국 주식회사 피고 상고인 중앙노동위원장. 피고 보조참가인 상고인 전국금속노동조합 외 22인. 상고를 모두 기각한다.” 탁 변호사는 이번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어깨가 떨어졌다. 차 지회장의 표정은 여전히 볼 수 없었다.
대법원 3부는 11일 오전 아사히글라스(현 AGC화인테크노한국) 사내하청 노동자가 제기한 근로자지위확인 소송과 사용자쪽의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 위반, 그리고 아사히글라스가 중앙노동위원회의 부당노동행위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행정소송을 모두 선고했다.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은 1·2심에 이어 이날 대법원도 노동자 손을 들어줬고, 파견법 위반에 대해서는 사용자를 무죄로 선고한 2심 판결을 파기해 대구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다만 부당노동행위는 인정하지 않았다. 뒷맛은 썼지만 9년이나 길거리에서, 천막에서 싸워 온 아사히글라스 사내하청 노동자 22명은 마침내 비정규직의 멍에를 벗었다.
뇌출혈 쓰러진 조남달씨 “너무 오래 걸렸다”
9년 전, 그러니까 2015년 5월29일. 그날은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이 한창 확산하던 때다. 코로나19도 아닌 메르스 사태의 초입이었다. 그날 구미공단의 한 작은 LCD 공장에 노조가 생겼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그해 6월30일, 조합원들은 문자로 해고 통보를 받고 길거리에 내몰렸다. 이후 대통령이 탄핵당하고, 대선을 두 번이나 치르고,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셧다운됐다가 회복할 동안 이들은 공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상고 기각, 파기환송.” 짧고 건조한 여덟 음절을 듣기까지 걸린 기간은 꼬박 9년, 무려 3천299일이다. 그렇게 길 줄은 몰랐다.
“당연한 판결입니다. 그저 너무 오래 걸렸습니다.” 지난 4월 거리의 투쟁을 이어 오다 뇌출혈로 쓰러진 조남달(55)씨의 목소리는 의외로 담담했다. 재활 중인 조씨는 이날 서울을 찾지 못했다. 아직도 6개월이나 더 재활을 해야 할 처지인데 어스름은 느낄 수 없었다. 조씨는 “지난 9년간 힘들었지만 당연히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고 싸웠다”며 “이런 상황이 얼마나 지속될까 하는 생각에 지치기도 했지만 다른 투쟁사업장 연대를 하면서 버텼다”고 말했다. 아내와 두 아들의 지지도 힘이 됐다고 한다.
조씨의 말처럼 노동자들은 해고 이후 다양한 곳에 연대했다. 스스로를 “들꽃”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구미 한국옵티칼하이테크 농성장에서 차 지회장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차 지회장은 “다양한 연대를 하면서 우리 스스로 단단하게 뭉칠 수 있었다”며 “비정규직 철폐투쟁 사업장에서 나타나는 사용자쪽의 회유 시도에 대한 대응 등을 미리 학습하면서 긴 기간을 버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정규직 돼 공장으로 “다시 노조활동”
이번 판결에서 주목된 것은 근로자지위확인 소송보다 부당노동행위 인정 여부였다. 탁선호 변호사는 이날 선고 뒤 대법원 앞 기자회견에서 “오늘 불법파견 선고는 그간 판례에 비춰 당연한 것으로, 패소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며 “아사히글라스가 하청노동자 노동력을 사용해 이윤을 창출하고도 사용자 책임을 회피한 것에 직접고용 의무를 부담한다는 것으로 상식적이고 당연한 판결”이라고 말했다.
부당노동행위는 사정이 다르다. 노동자들은 지회결성 한 달만에 아사히글라스가 사내하청업체와의 도급계약을 해지한 것은 부당노동행위라고 주장해 왔다. 이날 재판부는 사내하청 노동자에 대한 아사히글라스의 사용자성은 인정하면서도 부당노동행위 의도는 인정하지 않았다. 탁 변호사는 “사용자쪽이 사업장 인력을 재편할 필요성이 있었다고 소명한 대목을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대법원이 실질적 지배력설에 따라 사용자성을 판단하는 경향이 지속된 것으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2·3조 개정에 더 당위성이 실린다. 금속노조는 이날 성명을 내고 “하청노동자의 노조활동에 원청이 부당하게 개입하는 부당노동행위를 바로잡지 못하면 그 영향은 모든 현장의 간접고용·하청·비정규 노동자에게 갈 것”이라며 “대법원은 이를 직시하라”고 꼬집었다.
아사히글라스 ‘정규직’들은 곧 공장으로 돌아간다. 탁 변호사는 “소송 직후 사용자쪽 법률 대리인으로부터 출근 안내를 해야 하니 소송인 연락처를 묻는 전화를 받았다”고 소개했다. 차 지회장은 “이제는 공장으로 돌아가 10년 전 시작했던 노조활동을 다시 시작할 것”이라며 “이제 1막이 끝났고 당당하게 현장에서 2막을 열어 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향후 노조활동은 노조법 개정을 겨냥하고 있다. 차 지회장은 “불법파견이 범죄라는 게 그대로 드러난 현장이 화성 아리셀 참사”라며 “만연한 파견 문제를 죄가 없다며 눈 감고 죄가 있어도 고작 벌금 700만원만 매기는 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손잡고(손배가압류를잡자!손에손을잡고)는 선고 뒤 논평에서 “국회는 즉각 노란봉투법을 입법해 기업 불법행위로부터 노동자의 노동권을 보호해야 한다”며 “윤석열 대통령은 거부권(재의요구권)으로 기업 불법을 옹호하는 작태를 그만두라”고 촉구했다.
아사히글라스(현 AGC화인테크노한국)는 경북 구미공단에 위치한 외국인투자기업으로 LCD 유리기판을 생산한다. 금속노조 아사히글라스비정규직지회 설립 당시 정규직은 900명 규모로, 사내하청은 지티에스·건호·우영 3개 업체 300명을 고용했다.
비정규직 차별은 심했다. 금속노조에 따르면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9년간 최저임금을 받았고 1년 중 4일은 3교대, 주말은 주야 맞교대 12시간 근무를 섰다. 점심시간은 고작 20분이었다. 비정규직이 업무상 실수를 저지르면 붉은 조끼를 징벌적으로 입히기도 했다. 사정이 이런데도 외국인투자기업의 지위를 갖고 50년간 토지 12만평 무상임대, 국세 5년간 전액 감면, 지방세 15년간 감면 혜택을 누렸다.
결국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2015년 5월 지회를 만들었다. 그러자 아사히글라스는 조합원이 속한 사내하청 지티에스와 도급계약을 해지했고, 노동자 178명은 문자로 해고를 통보받았다. 기나긴 싸움의 시작이었다.
이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