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중심성의 원칙, 그 절반의 허구 ⑤

2024-06-24     박태주
▲ 박태주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사회적 대화기구는 노사중심성 원칙을 뒷받침할 만큼 독립적인가

노사중심성 원칙을 실현하려면 사회적 대화기구가 정부로부터 독립해 자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어야 한다. 정부가 노사의 의사결정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해 놓고선 사회적 대화기구를 통해 우회적으로 개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능할까.

경제사회노동위원회는 대통령 자문기구다. 청와대(대통령실)가 경사노위 운영에 개입할 여지가 있다는 의미다. 사회적 대화가 대통령의 관심사라면 청와대 참모로서는 정보 수집을 넘어 직접 개입 유혹을 갖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경사노위가 “대통령께서 위원장과 상임위원을 위촉했으면 믿고 맡겨야 할 게 아닌가” 볼멘소리 하며 마이웨이를 외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경사노위의 예산은 전액이 고용노동부 예산항목으로 편성된다. 또한 사무처 지원인력을 고용노동부(행정안전부 1명)로부터 파견받는다. 상임위원은 법률로 규정된 사무처장이지만 파견 공무원에 대해서는 평가권도 갖지 못한다(이는 노동부에서 파견된 운영국장의 소관이다). 이들은 1~2년의 파견기간을 거치면 되돌아간다는 점에서 경사노위 직원이라기보다는 노동부 직원이라는 정체성을 갖는다. 자체 채용한 직원(전문위원 및 실무관)도 모두 공무원 신분이다.

경사노위에서 민간인이라면 위원장과 상임위원 두 명뿐이다. 2년의 임기로 대통령이 위촉한다. 우스갯소리겠지만 상임위원으로서 나는 한참 동안 내 신분이 차관급 정무직 공무원인 줄 알았다. 월급과 수당은 물론 사무실 크기나 예우도 거기에 맞춰 이뤄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상임위원을 ‘차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위원장과 상임위원을 정부측 위원으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정혜윤, 2023 참고). 게다가 경사노위 위원장은 고용노동부 국정감사에 피감기관장으로 출석한다. 경사노위 위원장과 상임위원은 정부측 위원인가, 경사노위 위원인가.

대통령 후견의 사회적 대화?

경사노위로서는 예산과 인력은 물론 사회적 대화의 진행조차 청와대의 권위에 기댈 수밖에 없는 처지다. 실제로 2018년 1월 말 출범한 노사정대표자회의만 하더라도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양대 노총 위원장을 만나 성사시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서도 지적했지만 노사정대표자회의의 소집을 둘러싸고 민주노총이 참여할 때까지 연기하자는 노동부 장관과 개문발차하자는 노사정위원회 사이의 갈등에서 노사정위원회의 손을 들어 준 것도 청와대였다.

최저임금 산입범위의 확대 건으로 양대 노총이 노사정대표자회의를 떠났을 때도 대통령이 직접 양대 노총 위원장을 만나 대화는 계속 이뤄져야 한다고 당부했다. 2018년 7월의 일이었다(얼마 후 양대 노총은 복귀했다). 민주노총의 정기대의원대회를 사흘 앞둔 2019년 1월25일 문재인 대통령은 양대 노총 위원장을 만나 대화를 나눴다. 당시 민주노총 정기대대 핵심 안건은 경사노위 참여 여부였다.

경사노위가 제 발로 청와대의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사무실 이전이 그런 경우다. 2017년 7월 초, 노사정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위촉하겠다는 제안을 수용하면서 그 자리에서 제기한 민원은 노사정위원회의 이전이었다. 당시 노사정위원회는 정부서울청사에 있었던 탓에 일반인은 물론 노사의 출입조차 까다로웠다(심지어 상임위원인 나조차 신분증을 놓고 나가면 들어오기가 힘들 정도였다). 사회적 대화기구는 노사가 지나가다가도 들를 수 있는 트인 공간이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경사노위 사무실은 2018년 1월, 현재의 새문안로로 옮겼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대통령의 관심을 팔아 기획재정부 예산실장을 만나 예산 증액을 요청하고 행안부 장관을 만나 인력 증원을 부탁했다. 예산도, 전문위원도 늘었다. 사회적 대화에 대한 대통령의 관심과 대통령 자문기구로서의 위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회적 대화의 제도적인 조건도, 전략적 선택을 위한 주체의 의지도 없는 상태에서 사회적 대화는 청와대(대통령)의 의지와 지원에 기대 진행된 셈이었다. 이른바 ‘대통령 후견의 사회적 대화’(social dialogue sponsored by the president)였다.

노사정위원회 동의 없는 경사노위 출범

민주노총이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 사회적 대화기구의 독립성과 전문성 강화를 제안한 것도 노사중심성의 원칙과 관련을 갖는다. 민주노총은 △정부 종속성 탈피(기획·예산·인력·의제개발· 회의 운영 등) △전문가그룹 대폭 충원(전국단위 노사단체의 추천 또는 파견 방식 적극 활용) △사무국 운영에서 독립성과 책임성 강화(운영위원회 보고의무)를 요청했다(2018년 3월22일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 회의 자료).

한국노총은 한 걸음 나아가 경사노위를 독립위원회로 개편하자고 제안하고 나섰다. 국가인권위원회와 같은 위상을 갖자는 것이었다. 독립성을 필요로 했지만 자기 두 발로 설 능력도 갖지 못한 경사노위가 독립성을 주장하는 건 모험일 수도 있었다. 실제로 한국노총은 “(경사노위가 독립하게 되면) 관련 부처의 비협조와 합의사항 이행강제의 어려움이 따를 수 있고 (중략) 위원회의 영향력 약화라는 문제점을 노정할 우려가 있다”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임상훈·손영우, 2017). 결과적으로 경사노위의 독립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되 대통령 자문기구라는 위상을 유지하는 걸로 논의를 마무리했다.

대통령 자문기구로서 경사노위가 청와대의 개입을 차단할 방법은 없다. 더욱이 문재인 정부는 ‘청와대 정부’라 불릴 만큼 청와대의 규모와 권한이 컸던 정부였다(박상훈, 2018). 이런 상황에서 경사노위의 독립성 부재가 문제로 불거진 결정적인 계기는 경사노위 출범을 둘러싼 청와대와 경사노위 사이 이견이었다. 민주노총을 뺀 채로 출범하자는 청와대 의견을 전달받은 것이다. 경사노위 참여 여부를 결정하려던 2018년 10월17일 민주노총의 임시대의원대회가 무산된 직후였다.

민주노총 임시대대는 무산됐지만 4개월 후인 2019년 1월 정기대대를 열 예정이었다. 그때까지 기다리며 민주노총이 참가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나가면 민주노총의 경사노위 참가도 가능할 것이라는 게 나와 위원장의 판단이었다. 민주노총은 노사정대표자회의를 통해 이미 사회적 대화에 참여하는 중이었다. 구성과 운영원칙을 포함해 경제사회노동위원회법도 새로 만들기로 합의했다.

사회적 대화와 관련해서는 3차 노사정대표자회의(2018년 4월23일)에서 “노사관계발전을 위한 법·제도·관행 개선위원회” 등 4개의 의제별 위원회를 5월부터 발족하기로 합의했다(△안전한 일터를 위한 산업안전위원회 △사회안전망 개선위원회 △경제의 디지털 전환과 노동의 미래위원회 등). 양질의 일자리 창출, 양극화 해소, 노동기본권의 보장, 4차 산업혁명과 저출산·고령화 대응 등은 1차 노사정대표자회의(2018년 1월31일)에서 이미 확정한 의제들이었다. 또한 양대 노총이 제안한 11개의 산업·업종별 협의회를 ‘가까운 시일 내에 대표자회의를 통해 결정’하기로 의견을 모았다(해운·버스운송·금융·공공·자동차·조선·민간서비스·보건의료·건설·전자·제조 등). 의제별·업종별 사회적 대화가 본궤도에 오르면 민주노총 소속 산별노조·연맹도 경사노위 참가를 거부하기가 어려울 거라는 짐작이 있었다.

임시대대가 무산된 이후 민주노총도 비공식적 라인을 통해 2019년 1월 정기대대까지 경사노위의 출범을 미뤄달라는 요청을 보내왔다. 상임위원으로서 동의했다. 하지만 위로부터의 결정이 전달되면서 이 약속은 무용지물이 됐다. 문성현 위원장과 함께 청와대에 들어가 정태호 일자리수석을 만났다. 경사노위 출범을 연기해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이미 결정난 사항이라는 간단하고도 명료한 답변뿐이었다. 2018년 11월22일, 경사노위는 출범했다. 문재인 정부 시절 노사정위원회가 저지른 마지막 실책이었다. 나의 판단은 그렇다.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tjpark0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