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 쫓겨 오보까지 내면서

2024-05-31     이정호
▲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연합뉴스는 5월16일 낮 12시 정각에 ‘을지로위 이끈 우원식 … 파란 일으키며 입법부 수장 예약’이란 제목으로 우원식 의원이 추미애 의원을 누르고 민주당 국회의장 후보로 선출됐다고 보도했다.

2분 뒤 뉴시스는 ‘민주, 22대 국회의장 후보에 우원식 선출’이란 제목으로 보도했다. 뉴시스는 이 기사에서 우원식 의원이 ‘과반 득표’로 의장 후보에 확정됐다고 했다. 1분 뒤 12시3분엔 뉴스1이 ‘을지로위원장 출신 우원식 국회의장 사실상 확정’이라고 잇따라 보도했다. 같은 시각 조선일보도 ‘속보’란 문패를 붙여 ‘우원식, 추미애 꺾었다 … 민주당 국회의장 후보로 선출’이란 제목으로 잇따라 보도했다. ‘의총서 과반수 얻어 이변’이란 작은 제목을 달았다.

이재명 당대표의 마음이 6선의 추미애 의원에게 기울어진 가운데 5선의 우원식 의원이 추 의원을 이긴 이변이었다. 이후 수십 개 언론사가 달라붙어 똑같은 기사를 쏟아냈다.

언론은 우원식 의원의 승리가 ‘이변’이라 말하지만 정작 우 의원은 이재명 대표와 각을 세운 적이 거의 없다. 우 의원은 이 대표가 추진해 온 ‘기본사회위원회’ 수석부위원장도 맡았다. 또 당내 투표 사흘 전 추미애 의원은 “이재명 당대표가 내게만 의중을 전달했다”며 명(明)심은 내게 있다는 듯이 말했지만, 우원식 의원은 “진짜 친명은 바로 나”라고 기염을 토했다.

한두 시간쯤 지나자 ‘강성 당원들 부글부글’(뉴시스), ‘수박 나가라’(SBS), ‘추미애에 대한 불안감’(머니투데이), ‘조용한 강자 택했다’(더팩트), ‘민주 강성당원들 조국당 가겠다 항의’(강원도민일보) 등의 자극하는 제목을 단 기사를 쏟아냈다. 디지털타임스는 국정농단의 중심에 섰던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 씨가 우원식 후보의 승리 직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나라 망했네, 진짜” 같은 글도 기사화했다. 주요 정당 안팎에서 쏟아지는 싸움 구경꾼 같은 기사가 국민 삶에 도움이 될까.

가장 황당한 건 낮 12시에 발행하는 석간 문화일보였다. 문화일보는 이날 1면 머리에 투표 결과를 확인도 않고 ‘추미애 당선자가 민주당 총회에서 우원식 의원을 누르고 국회의장 후보로 선출됐다’고 오보했다. 물론 최종판에선 ‘우원식이 추미애 꺾었다’로 바로잡았지만, 뭐가 그리 급해서 확인도 하지 않고 윤전기를 돌렸을까.

정치부 기자들이 하루하루 먹고살려고 관종 정치꾼들 말을 받아쓰는 사이 지난 10일 폭발 사고로 5명이 전신 화상을 입은 전주 리싸이클링타운 폭발사고가 난지 6일이 지나서야 노동부가 작업중지명령을 내린 소식은 지역뉴스로 먼저 접해야 한다. 노동부 늑장 대응에 노동계가 반발한다는 소식은 전주MBC 등 극소수 매체만 다뤘다. 지난 4월13일 저녁 서울 신림동에서 오토바이 배달노동자를 치어 숨지게 한 벤츠 운전자는 마약 양성 반응을 보였다. 울산의 초등학교 2곳에선 식중독 의심 환자가 집단 발생했다. 지난 14일 낮 1시께 경기 안양시 만안구의 한 주상복합건물 신축 공사장에선 하청업체 소속 60대 노동자가 자재를 실어 옮기는 전동차와 건설용 리프트 사이에 끼여 숨졌지만 언론은 지난 16일 오후부터 보도했다.

정치권 기사는 시간에 쫓겨 오보까지 내면서 건설현장 60대 하청노동자 사망 사고는 만 이틀이 지나서야 보도한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