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하는 한국 ‘아이히만’과 책임 지지 않는 정치

2024-05-28     손민석
▲ 손민석 <지록위마의 시대> 작가

우스갯말로 '모두가 알고는 있지만 아무도 실제로 읽어본 적이 없는 책'만이 고전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악의 평범성’에 대해 논한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도 그런 종류의 책이다. 유대인 대량학살 책임자로 체포된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기록한 이 책을 통해 아렌트는 ‘나치’라는 “절대악”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사유했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은 악인들이 평범하다거나 흔하다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근대국가의 관료제, 합리적 체계 그 자체가 인간을 잉여적인 존재, 아무런 특질도 개성도 없는 ‘관리대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저마다 개성을 지닌 인간의 다양성이 인정되지 않고 하나의 동질한 무언가로 환원될 때 근대국가에 의한 전(全) 사회적이고 전인간적인 지배, 즉 “전체주의”적 지배가 가능해진다. 이러한 관료제를 뒷받침하는 게 바로 관료들의 무(無)사유성이었고 그것이 바로 ‘악’의 근원이다. 아렌트에게 있어 ‘악’은 ‘결핍’으로부터 도출된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악’은 아렌트의 생각과 달리 근대국가의 법치질서, 합리적인 체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치밀한 법적 ‘사유’로부터 도출된다. ‘채 상병 사건’에서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 등과 입장을 함께 하는 유재은 법무관리관을 보며 든 생각이다.

채 상병 사건의 본질은 단순하다. 대통령(실)이 자의적으로 개입하고 간섭하다 사고가 난 것이다. 무리한 지시가 사고로 이어졌고, 그 사고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조직적으로 개입해 외압을 행사했다는 의심스러운 정황은 점점 사실로 판명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과 여당 측은 온갖 궤변을 늘어놓으며 특검을 거부하고 있지만, 그럴수록 점점 더 수렁 속으로 빠져든다.

이 단순한 사건에서 내 주목을 이끄는 건 유재은 법무관리관이다. 적어도 영상 속의 그는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당당했다. 이탄희 의원의 법 해석을 듣고 면전에서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비웃는다. 박주민 의원과의 청문회에서도 일관되게 자신의 법 해석을 밀고 나가며 법을 입안한 박주민의 해석이 틀렸다고 말한다.

장관에게 수사 지휘 권한이 있다는 그녀의 법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군의 개입을 방지하려는 군사법원법의 개정 취지 자체가 무너진다는 점에서, 그녀의 해석이 틀렸다는 건 명백해 보인다. 하지만 그녀가 정말로 자신의 해석을 철저하게 신뢰하고 있다면, 달리 해석할 여지에 대해 생각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녀는 ‘아이히만’과 같은 무사유의 산물이 아닐까?

애석하게도 그렇게 볼 여지는 없어 보인다. 이시원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과의 통화에 대해서 유 법무관리관은 ‘채 상병 사건’이 아니라 “군 사법 정책이나 제도”에 관해 논의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박정훈 대령한테 수사 외압을 넣었을 때도 ‘수사에 개입’하는 게 아니라 “평소 군사법원법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을 말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박주민·이탄희 의원의 비판에 대해서도 “법 해석의 차이”로 비틀어 버리는 걸 보고 있으면 그가 어떤 식으로 사안을 대하는지가 보인다. 사안에 직접 개입하지 않고 법에 대한 ‘해석’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간접적으로만 개입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정작 ‘책임’은 그러한 ‘해석’을 듣는 이에게로 ‘하청’된다. 이 ‘책임의 연쇄적 하청’ 속에서 ‘정치적 책임’은 결과적으로 가장 밑에 위치한 이들이 지거나 박정훈 대령과 같이 ‘계산하지 않는 이들’에게 전가된다. 법체계 내에서 ‘정치적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자의적인 권력행사를 제한하기 위해 도입된 법치주의가 역설적이게도 법적 책임으로부터만 벗어날 수 있으면 무엇이든 해도 되는 인치(人治)의 근거로 변질되고 있다.

사유하지 않고 관료제의 ‘부품’이 되어 ‘절대악’의 집행자가 됐던 아이히만과 달리 ‘한국의 아이히만’들은 법적 책임을 면피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사유’하며 ‘책임 없는 정치’를 구현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지금의 한국이 이 새로운 ‘아이히만’들을 징치할 수 있을까? ‘채 상병 사건’보다도 그 이후가 더 걱정되는 이유다.

<지록위마의 시대> 작가 (fpdlakstp@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