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중심성의 원칙, 그 절반의 허구 ③

2024-05-27     박태주
▲ 박태주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노사중심성의 원칙이 노사의 자율적 협의를 바탕으로 한다면 이는 결국 노사 파트너십에 의존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노사는 정부의 개입 없이 갈등 의제를 협의할 정도로 파트너십을 갖고 있을까.

파트너십은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고 상호이익을 위해 노사가 함께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노사관계는 구조화된 적대감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지속적인 이익갈등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노사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흔히 투쟁이 거론된다. 하지만 투쟁이 늘 노조가 ‘의존할 수 있는 위협’(a credible threat)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단체교섭이나 사회적 대화가 동원되는 배경이기도 하다.

단체교섭이 그렇듯 파트너십이 투쟁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대화도 마찬가지다. 사실 “대화냐, 투쟁이냐”라는 양자택일의 접근이 노사관계를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투쟁이 대화를 지원하고 대화가 투쟁을 촉발하면서 투쟁과 대화는 함께 가기 마련이다. 전쟁이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라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다시 말해 단체교섭이나 사회적 대화는 한편으로는 계급 타협의 표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갈등과 투쟁의 불쏘시개라는 두 개의 얼굴을 동전의 양면처럼 갖는다. 파트너십과 노사협력을 등치하면 안 되는 이유다. 그럼 우리나라 노사관계에서 노사중심성의 원칙을 뒷받침할 만한 파트너십은 있을까.

노정교섭, 상대 존재에 대한 부정

파트너십의 첫 번째 조건은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협의는 없애야 할 적을 상대로 벌이는 전쟁이 아니다. 상대방을 인정한다는 것은 노사 사이에는 이해의 이질성이 있으며 각자는 이를 추구할 권리를 갖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상대방이 없어져 주기를 바라는 당사자와 파트너십을 형성하는 게 과연 가능한가.” 영국에서 마르크스주의를 기반으로 노사관계를 연구한 켈리(J. Kelly)가 묻는 질문이다.

이런 점에서 민주노총의 경총 해체투쟁(2020년 4월)이나 삼성전자서비스에서 단체교섭을 지연하는 등 노조 와해를 시도한 경총의 부당노동행위(2024년 2월16일 서울중앙지법 판결)는 어느 것도 상대방을 인정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더욱이 민주노총의 경총 해체투쟁은 민주노총이 ‘코로나19 노사정 협의’를 제안한 직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대화하자며 따귀를 때리는 일일 수도 있지만 민주노총 내에서 사회적 대화를 반대하는 진영이 사회적 대화를 제안한 지도부를 불신하고 판을 깨려는 움직임으로 보일 만도 했다.

‘노정교섭’이란 말이 있다. 그 역시 사회적 대화의 한 형태라고 하지만 극히 예외적인 형태일 뿐이다. 사회적 대화는 합의로써 마무리되는 교섭이 아닐뿐더러 공공부문이 아닌 한 정부는 교섭 당사자로서 책임을 지는 것도 아니다. 정부는 임의적인 협의 상대에 지나지 않는다. 사용자단체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정부가 노정교섭에 나서기도 쉽지 않다.

노정교섭의 선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공공기관 지방 이전(2005년)과 보건의료노조의 노정합의(2021년)가 대표적이다. 공공기관 지방 이전에 관한 노정협약에는 공공연맹, 금융노조, 그리고 공공운수노조가 당시 건설교통부 장관 및 균형발전위원회 위원장과 함께 당사자로 참여했다. 보건의료노조가 보건복지부 장관과 맺은 노정합의는 산별교섭과 노정협의를 묶는 모델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하지만 두 사례는 정부가 실질적인 정책 결정권을 가진 데다 사용자단체의 암묵적인 동의를 바탕으로 삼았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는 공공기관 노동이사제의 도입을 합의한(2020년 11월) 경제사회노동위원회 공공기관위원회가 노동조합과 정부(및 전문가)로 구성됐다는 사실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일반적으로 노정교섭이라고 말할 때 문제는 그것이 앞서 말한 정부의존적인 노사관계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사용자단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표현이라는 점이다. 노사가 중심이 돼 사회적 대화를 하기로 합의한 마당에 노조가 사용자단체를 배제한 노정교섭을 요구한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다. 경사노위 참가가 좌절됐다고 노사협의의 중요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대화가 아니라도 노사관계 일반에서 핵심 행위자는 노동조합과 사용자(단체)다.

문재인 정부의 초기에 당시 김주영 한국노총 위원장은 사회적 대화의 재개를 요청하는 ‘9·26 선언’(2017년)을 앞두고 대한상의를 방문하는가 하면 박용만 회장과 호프미팅(2021년 9월)을 하면서 대화의 물꼬를 텄다. 호프미팅은 후임 김동명 위원장 시절에도 이어졌으며 박용만 회장은 퇴임 직전에도 한국노총을 방문했다(2021년 2월). 방명록에는 “늘 대화의 자리에 힘들게 같이 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라고 적었다.

협의, 양보 통해 상호이익 주고받는 과정

노사 사이의 파트너십을 가능케 하는 두 번째 전제는 그것이 상호이익(mutual gains)에 기반을 둬야 한다는 점이다. 어느 일방이 지속적으로 챙기고 다른 일방이 지속적으로 퍼주는 관계가 지속될 수는 없다. “양보 없이는 성과도 없다.”(김연철, 2016)

상호이익은 양보를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노사는 협의 과정에서 ‘양보할 능력’을 갖고 있을까. 노동조합의 경우 양보는 무엇보다 노동조합 내부정치 문제다. 지도부의 양보를 조합원이 수용할 수 있을까. 지도부는 조합 내에서 그 양보를 관철하고 이행을 강제할 역량이 있을까. 이 질문은 한국에서 사회적 대화가 가능할까를 둘러싼 논쟁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경총에 대해선 후술한다).

우리나라의 노사관계는 기업별 조직체계를 근간으로 한다. 중앙의 결정을 하부단위에 강제할 수 있는 중앙집중적인 정상조직(peak organizations)의 부재를 말하는 지점이다. 양대 노총은 중앙의 결정을 ‘관료적이고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조합 내부에 관철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지 않다. 그 대안으로 흔히 노조 민주주의가 거론되지만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는 듯이 보이지도 않는다(민주주의가 그렇듯이 노조 민주주의 역시 다양하게 정의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조합원이 의사결정에 직접 참여하는 것으로 본다).

먼저 한국노총은 중앙집중적인 조직구조를 갖춘 것도, 노조 민주주의가 활성화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사회적 대화에 관해선 일반적으로 지도부의 입장은 관철된다. 사회적 대화 참여 여부는 물론 잠정협약에 대한 지도부의 결정이 거부된 적은 없다. 중앙의 관료주의도 있겠지만 사회적 대화에 대한 실용적 접근과 상대적으로 정파색이 옅은 내부정치가 지도부의 리더십을 유지하는 기반이 되는 듯이 보인다. 집행부(가령 중앙임원과 산별 및 지역대표로 구성되는 중앙집행위원회) 내부의 권력 구도가 위원장 중심으로 짜인 탓도 있을 것이다.

민주노총의 경우 노조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형식을 빈’ ‘이념집단을 넘어 권력파벌로 바뀐’ 정파구도에 의해 왜곡되고 있다. 규약에 조합원 총회(조합원 직접 민주주의)가 규정돼 있지만 임원선거에서나 활용될 뿐 중요 정책의 결정장치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문재인 정부 시절만 하더라도 경사노위 참가와 관련해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한 정기대의원대회(2019년 1월)나, 합의안은 마련했지만 협약식에는 참가하지 못한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2020년 7월)이 조합원총회에 회부됐다면 어땠을까 궁금한 이유다. 그것은 민주노총을 솥뚜껑처럼 짓누르고 있는 정파적 소수의 결정권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는 노사 사이 파트너십이 취약성과 지도부의 제한된 의사결정능력으로 인해 ‘사회적 대화를 하기가 매우 어려운 나라’에 속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정부는 되지도 않을 나무에 물을 주면서 사회적 대화를 추구해 왔을까. 한국에서 사회적 대화의 추구는 환상(illusory corporatism)에 불과한 것일까, 이 지점에서 정부의 역할은 없을까. 이어지는 글에서는 노사중심성 원칙에서 정부 역할을 살펴본다.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tjpark0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