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상 질병 가능성 제기에] “노출 기준 초과 없어” 삼성의 동문서답
노동부 고시 “노출기준 이하도 직업성 질병” … 반올림 “삼성전자 무책임”
삼성전자 1차 하청업체 케이엠텍에서 갤럭시 휴대전화를 조립하던 스물한 살 청년 수현(가명)씨가 급성 골수성 백혈병에 걸린 소식이 지난 17일 알려졌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침이 반올림은 수현씨를 대리해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를 신청했다. 같은날 원청인 삼성전자는 “케이엠텍의 작업환경은 전문기관이 매년 측정해 노동부에 제출하는데 노출기준 초과 등 문제가 없었다”며 “특히 해당 환자가 근무한 조립공정은 작업환경 측정 대상 물질(화학물질)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관련법상 작업환경측정 대상도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며 밝혔다. 업무상 질병일 가능성을 사실상 부인한 것으로 해석된다.
작업환경 측정 대상으로 구분된 유해물질을 직접 취급하지 않는 공정에서도 저농도 노출로 인한 산재 판례가 쌓인 상황에서 무책임한 답변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특히 노출 기준 이하의 유해물질에 노출돼도 직업병이 발생할 수 있다는 내용은 고용노동부 고시에도 나와있다.
법원 “유해물질 직접 안 다뤄도, 노출 가능성 있어”
서울행정법원은 2014년 11월 삼성전자 반도체 조립라인에서 검사공정을 담당해 공정 자체의 특성상 유기용제나 화학물질을 직접 취급하지 않은 노동자 유아무개씨에게 발병한 재생 불량성 빈혈을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했다. 당시 법원은 “공정 자체의 특성상 유기용제나 화학물질을 직접 취급하지 않았으나, 비록 저농도일지라도 벤젠 등의 화학물질이 검출됐을 뿐 아니라, 측정하지 않은 여러 유해 화학물질이 실제로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판결문을 통해 “검사공정 자체 내에서 고온테스트 과정에서 반도체 칩의 구성물질이 열분해돼 생성·유출됐을 가능성이 높다”며 “유해물질의 검출량이 작업환경 노출 허용기준 미만이라 할지라도 저농도로 장기간 노출될 경우 건강상 장애를 초래할 개연성이 있다”고 판시했다. 유씨는 고등학교 3학년 재학 중인 2001년 7월 삼성전자에 입사했고, 이듬해 11월 재생 불량성 빈혈을 진단 받았다. 이 판결은 공단이 항소를 포기하면서 확정됐다. 이후에도 유사한 판결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작업환경측정 결과 유해물질의 노출기준이 낮아도 업무상 질병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에 가깝다. 노동부 고시 ‘화학물질 및 물리적 인자의 노출기준’ 3조4항에 따르면 “유해인자에 대한 감수성은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고, 노출기준 이하의 작업환경에서도 직업성 질병이 발병되는 경우가 있으므로 노출기준은 직업병 진단에 사용하거나 노출기준 이하의 작업환경이라는 이유만으로 직업성 질병의 이환(발병)을 부정하는 근거 또는 반증자료로 사용해선 안 된다”고 분명히 하고 있다.
“고온 압착 과정, 유해물질 노출 가능성 있어”
같은 맥락에서 수현씨의 사례를 봐야 한다는 게 안전보건 전문가 지적이다. 수현씨는 휴대폰 내부에 들어가는 플라스틱 부품을 조립하고, 고열로 휴대전화 뒷면을 부착하는 업무 등을 수행했다. 수현씨가 제조한 갤럭시 S21~S23은 방수 기능이 있는 휴대전화로 접착제와 접착테이프를 발라 뒷면을 압착하는데, 이 과정에서 유해물질에 노출됐을 것으로 반올림은 추정한다. 이 외에도 휴대전화 조립 과정에서 앞선 공정에서 유해물질이 잔류함에 따른 영향, 휴대전화 테스트 과정에서 전자파 등 종합적인 요인이 수현씨 백혈병 발병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진실을 밝히기 쉽지만은 않다. 회사는 작업환경측정 보고서 제출을 거부했다. 고용노동부 구미지청도 회사쪽이 원치 않는다는 이유로 작업환경측정보고서를 공유하지 않았다. 노동부 구미지청은 “작업환경측정 보고서는 지청이 생산한 문서가 아니라 사업장이 생산한 것으로 함부로 의견 없이 줄 수 없다”고 밝혔다. 사업장의 비공개 요청에도 지청의 판단에 따라 공개를 결정할 수 있지만, 최소 30일의 간격을 둬야 해 당장 공개가 어렵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노동자가 일했던 사업장의 작업환경측정보고서를 받으려면 한 달여를 기다려야 한다.
반올림은 “고온 압착과정에서 접착제 성분 등이 녹아 휘발성 유기화합물 및 벤젠, 포름알데히드와 같은 백혈병을 유발하는 발암성 성분이 발생할 수 있다”며 “보다 면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종란 공인노무사(반올림)는 “삼성이 답변에서 보여준 태도는 그동안의 작업환경측정 결과 문제가 없다는 식”이라며“작업환경측정 결과가 얼마나 한계가 많은 제도인지 10년 넘게 이야기했는데 성의 없는 태도”라고 비판했다. 이 노무사는 “삼성전자가 노동자 생명과 건강을 위해 전향적인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