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의 힘! 기록이 기억을 지배한다

노항래 협동조합 은빛기획 대표

2024-04-17     편집부

나의 일, 나의 일터, 내가 살아 온 날을 기록해 보자. 전문작가의 글처럼 수려하고 논리적일 필요는 없다. 나의 삶이 꼭 성공적이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나의 삶을 기록하는 자체로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사회적기업인 협동조합 은빛기획이 노동자들과 퇴직예정자들에게 글쓰기, 자서전 쓰기를 제안한다. <편집자>
 

▲ 노항래 협동조합 은빛기획 대표

이 글을 쓰는 지금은 4월16일, 세월호 참사 10주년이다. 안산에서, 그리고 각 지역 여러 곳에서 그날 그 사건을 되새기는 행사가 열리고, 방송·신문 등 언론매체는 특집기사로 그 사건의 의미, 기억 속 참상을 불러내고 있다. 숙연한 마음이다. 유족들, 누구보다 이제 농익은 청년 시절을 지내고 있을 희생자의 친구들, 그들을 기억하는 그 세대 청춘들에게 위로와 응원을 전한다. 힘내시라! 님들 몫을 즐겁게 누리고 빛난 봄날을 만끽하시라!

마침 지난 일요일 안산 생명안전공원에서 전국민주시민합창축전이 열려, 대회 참가팀인 이소선합창단의 일원으로 안산을 찾아 하루를 보냈다. 전국에서 달려온 ‘노래하는 벗님들’과 이러저렇게 어울리니 나도 ‘노래 쫌~’ 하는 부류에 속한 듯 연대감과 동류의식에 어깨가 으쓱했다.

그날 행사에서 세월호 참사 가족 모임의 노래패 ‘4·16합창단’의 일원인 이미경 님을 만났다. 노래하는 가족들에게 박수를 보냈고, 가족들 앞에서 합창곡을 뽐내고 함께 노래하면서 위로와 다짐을 나누는 느낌이 충만했다.

이미경 님은 세월호 참사 당시 단원고 2학년6반 학생 이영만 군의 엄마다. 재능 많고, 재롱둥이였던 영만이를 잃고 안타까워 침몰하다가 털고 일어서 가족대책위 활동, 진상규명 투쟁에 나선 가족 중 한 사람이다. 가족 연극반, 합창단 등 가족 치유프로그램에 앞장서 참여했고 자신의 재능을 키워 이제는 어엿한 연극인으로 역량을 인정받고 있다. 그리고 그런 활동을 이어 아들을 기억하는 프로그램 ‘이영만 연극상’을 제정했다. 매년 영만이의 생일(2월19일)에 맞춰 역량 있는 신진 연극을 선정해서 포상하고, 젊은 연극인들에게 응원의 뜻을 키워 가고 있다. 그렇게 곁에 없는 영만이를 되살리기 위한 노력으로 자신을 위로하고, 영만이를 불러낸다.

그녀와의 인연 고리는 내가 최초 제안했고, 기획위원으로 참여해서 만든 열두 권의 책, <4·16 단원고 약전>이었다. 참담한 일, 304명이라는 어마어마한 희생자 숫자만큼이나 국민들을 눈물짓게 한 건 아마도 채 피어나지 못한 채 스러진 250명의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 11명 교사들, 그리고 또래 청년들의 이야기였을 게다.

경기도교육청에 교육감직 인수위원으로 참여할 기회가 있었던 나는 인수위원회에 이 사업을 제안하게 됐다. “250명 학생, 11명 희생 교사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자. 경기도의 학생들이 자신들의 친구, 선배의 얘기를 기억할 수 있도록 모든 학교에 책을 보급하는 경기도교육청 사업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우여곡절 끝에 경기교육청의 정식 사업으로 채택됐고, 발간위원회가 꾸려졌다. 제안자인 나도 발간위원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1년여 동안 ‘희생 학생, 교사의 간략한 전기 쓰기, 약전 작업’이 진행됐다.

되돌아보면 엄청난 일이었다. 140여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희생 학생마다 200자 원고 40매씩, 생애 경험이 더 많은 교사는 원고 80매씩으로 기준을 정했다. 작가들이 발간위원회가 정해 주는 일정에 맞춰 가족·친구·동료·이웃 인터뷰와 약전 쓰기 작업에 투입됐다. 눈물 나는 사연은 참여 작가 140명에게 수도 없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열두 권의 책이 발간됐다. ‘짧은 그리고 영원한’이라고 부제를 단 전집 경기도교육청 발행 <4·16 단원고 약전>이다.

이미경 님은 아이들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는 게 소중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내가 맡은 5반과 6반 학생들의 부모님들을 설득해 줬다. 자식 얘기를 꺼내고 싶지 않은 가족들에게 “작가에게 기억나는 거 얘기만 해라, 당신 아이 얘기만 빼놓을 거냐”고 독려했다. 그가 있어 가족들에게 먼저 간 자식의 삶을 구술하고 자료를 풀어내도록 할 수 있었다. 어찌 동지애가 생기지 않으리.

다시 이 책을 펼치니 내가 쓴 발간위원 소회의 글이 남이 쓴 글처럼 남아있다.

“기록이 기억을 지배합니다. 기억은 흐릿해지더라도 여러 계절 울며 말하고 울며 적은 이 기록이 우리의 기억을 초롱초롱하게 지켜서 별이 된, 우리 곁에 있어야 할 그들의 삶을 복원해 줄 것입니다. 우리가 잊지 않기를, 우리가 그들을 그토록 참혹하게 떠나보낸 장본인이라는 자각을 놓치지 않기를, 이 기록이 우리의 기억을 끊임없이 새롭게 닦아 주기를 소망하고 서원합니다.”

한 사람의 삶을 쓴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250여명의 학생과 교사의 삶을 쓴 작가 140여명의 글이 다 제각각이다. 각자의 삶은 제각각 다르고, 그 글을 쓰는 작가 역시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쓴 글은 다시는 곁에 있지 못하는 각 사람의 삶을 누군가에게 불러오고, 때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할 때 디딤돌이 되고, 나침판이 된다. 삶을 쓴다는 것, 기록은 그런 의미가 있다. 세상에, 이런 글쓰기 사례가 또 어디에 있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이미경 님이 이야기하듯, 이 책은 가족들에게도 전집이 다 배부됐는데, 그 가족들에게 먼저 간 가족을 사진보다 자세히, 어떤 기억보다 선명하게 되살려 두고두고 열어 보게 하는 기록으로 남았다. 내가 지난날 한 일 중 자부심으로 남을 만한 일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삶은 사건들의 집합이다. 기억에 남는 조각들만큼이나 수많은 사건이 모여 내 삶을 구성한다. 그런데 누구에게나 현재 삶을 구성하는 사건은 이미 다 지나갔다. 기억에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기억도 걷잡을 수 없이 스러진다. 그리고 결국 다 스러진다. 그래서 삶은 한낱 구름 같고 헛되고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런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기억을 붙잡아두는 것, 그걸 모아놓은 스토리다. 기억을 모아서 구성하고 체계를 부여하고 의미를 새겨두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자신 삶의 기억은 사건들을 엮은 스토리, 서사로 남아 있고 그래서 우리 각자는 살아있다. 그 스토리의 힘으로 오늘을 산다. 때로는 10년 전 먼저 간 파릇한 가족의 기억이 기록으로 남아서 그 삶을 잊지 않게 하고 남은 이를 응원하기도 한다.

이 연재 칼럼을 통해 제안하는 ‘생애사 쓰기’는 각자에게 있는 기억들의 집합 스토리를 문자와 영상으로 모아, 스러지지 않도록 재현하자는 것이다. 기억을 붙잡아 두는 것이다. 내게 남아 있는 스토리를 기록하자!

그렇게 재현된 스토리는 힘이 있다. 나는 누구이고 우리는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가를 보여준다. 그래서 다시 또 다시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개인이 그러하듯 조직도 마찬가지다. 어느 조직이든 태어나고 자라고 어려움을 겪고 난관을 이겨 내면서 오늘에 이른다. 여전히 넘어서야 할 여러 문제들이 있을 수 있고 도전과제가 남아있을 것이다. 그걸 돌아보고 기록하는 건 내일을 향해 가는 조직의 디딤돌이 된다. 이렇듯 지난날을 기록하는 작업을 통해 개인에게는 그의 삶을 알 수 있게 하고, 조직에게는 오늘을 진단하고 내일을 내다보게 한다. 그런 글쓰기, 영상작업을 제안하는 것이다.

거듭, 그날 꽃사태 같이 스러져간 젊음들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