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스펙이 아니고 스토리다

노항래 협동조합 은빛기획 대표

2024-03-06     노항래

나의 일, 나의 일터, 내가 살아 온 날을 기록해 보자. 전문작가의 글처럼 수려하고 논리적일 필요는 없다. 나의 삶이 꼭 성공적이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나의 삶을 기록하는 자체로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사회적기업인 협동조합 은빛기획이 노동자들과 퇴직예정자들에게 글쓰기, 자서전 쓰기를 제안한다. <편집자>

▲노항래 협동조합 은빛기획 대표

엊그제 나는 한 대학의 학생이 됐다.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에 대학 학부생이 된 것이다. 학부 3학년. 지난 겨울에 꼭 41년 전 떠났던 대학에 재입학 신청을 했고, 심사위원회를 통과했다는 통지를 받았다. 학교 안내대로 수강 신청과 등록 절차를 거쳐 늦깎이 복학생이 된 것이다.

40년도 더 어린 세대 청년들 사이에 앉아 수업을 들으며 내 삶을 돌아본다. 대학은 무얼 하는 곳인가. 나는 이 대학을 왜 떠났던가. 무슨 일들을 겪어 왔나. 무엇을 더 배우고 다시 무엇에 도전할 것인가.

봄꽃 같은 청년들 사이에 귀밑머리 희끗한 ‘아저씨, 또는 할아버지’로 앉아 있는 처지는 좀 민망하고 수줍다. 그래도 속 다짐한다. ‘부끄러울 일이 아니다. 어깨를 펴고 고개를 들자.’ 혹 같이 배우는 젊은 학생들이 내가 살아온 삶을 궁금해할 때, 나는 ‘나 때는 말이야’ 하며 꼰대처럼 말하지 않고, 냉정하게 성찰하는 자세로 우리 세대가 살아 낸 삶을 전할 수 있을까.

41년 만의 복학, 나의 인생 스토리

1980년대 초 대학에 들어가 가장 먼저 듣고 고민한 사회적 사건은 역시 광주학살·광주민주항쟁이었다. 그해 나는 스무 살이었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군사반란 세력이 국민 가슴에 총을 쏘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 한 20대 청년에게 눈에 보이는 권력은 악의 화신, 거짓말 덩어리였다. 그 권력을 구성하는 모든 것, 그런 권력에 대해 한마디도 못 하는, 심지어 그 권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으로 설명하는 언론과 교단의 선생들까지 마찬가지라고 느꼈다. 그때부터 수업 대신 의식화 학습이라는 숨겨진 진실 찾기 공부에 더 관심을 갖게 됐고, ‘학생운동’에 몰입한 건 당연했다. 그렇게 문제학생이 됐다.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권력자들이 보지도 듣지도 말라는 불온한 사상을 빨아들였다. 레닌과 모택동, 그람시와 체 게바라, 호지명과 말콤 엑스, 구띠에레즈와 안병무, 김구에서부터 김일성까지. 그렇게 빨리 그렇게 많은 세계관과 역사적 경험담을 ‘반독재 민주화, 노동자 민중이 주인 되는 나라’라는 틀에 끌어당겼다. 광주에서 총칼에 쓰러진 청년들처럼 나도 그렇게 스러질 줄 알았고, 대단한 사명감으로 달떠 살았다.

3학년 1학기가 시작한 지 몇 주 뒤 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에게 자취방에서 연행됐고, 1주일 동안 보안사 수사실 등을 끌려다닌 후 군에 강제 입대했다. 징역에 보내지 않고 군에 입대시키는 걸 아버지는 고맙게 여겼는데, 정작 나는 구속되는 것보다 더 길게 ‘포로 생활’을 하게 된 게 억울했다.

탈영은 하지 않았다. 제대하자마자 용접 일부터 배웠다. 노동자가 주인 되는 나라를 꿈꾸며 평생을 기름밥 먹으며 살리라 생각했다. 복학을 강권하는 아버님에게 “학교에 돌아가 그 교수들에게 배울 게 하나도 없다. 민중들 속에서 배워 떳떳하게 살겠다”며 고집을 부렸고, 집을 나왔다. 그렇게 대학을 내 마음에서 지웠다. 노동운동에 그깟 졸업장을 뭐에 쓰랴 생각했다.

그때부터 내 마음속에 ‘노동은 신성한 것, 노동자는 존중받아야 하는 집단, 노동조합·노동운동은 차별을 바로잡고 정의를 세우는 사회적 실천’이라는 관념이 자리 잡았다. 그렇게 생각해야 내 선택이 변호되는 것이기도 했다. 사회가 바뀌고, 우리 사회의 민주적 변화를 따라가면서도 이런 생각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후일 정당이나 공조직에서 일하게 되고, 나중에는 공공기관의 경영자를 맡기도 했지만 대학을 떠난 뒤 41년 동안 ‘노동 존중’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그러다가 뒤늦게 41년 만에 그때 그렇게 타의로 등지고 나온 그 대학의 문을 두드렸고, 다시 들어서게 됐다. 흔치 않은 이력이다.

이런 내 유전을 모르지 않는 아들이 어느 날 술자리에서 내게 물었다. “아빠는 취업에 쓸 것도 아니면서 왜 복학하는 거야?” 좀 당혹스런 질문이었다. 그날 갑작스레 튀어나온 내 답변이 가관이다. “인생은 스펙이 아니고 스토리야. 내게 아직 써야 할 스토리가 남아 있는 거지”. 곱씹어 보면 그럴싸한 대답이기도 하다.

이 술자리 방담에서 튀어나온 말, ‘스토리’가 오늘 하고 싶은 얘기의 주제다. 삶은 스토리다!

동년배들에게 하는 제안 “내 삶을 쓰자”

우리는 다 이러저런 곡절을 지나 살아왔고 살아간다. 더구나 우리 세대, 50~60대는 가장 큰 사회적 변동의 한복판을 건너온 세대여서 다른 세대들보다 더 많은 곡절, 더 많은 이야기거리를 만들어 내며 살아왔다. 오랜만에 만나는 동년배들과 술잔이라도 나누다 보면 영웅담 같은 과거 얘기 한 대목 없는 이가 없다.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개발도상국’을 운위하던 사회에서 G10·최첨단 정보화 사회로 바뀌는 변화를 경험했다. 보릿고개를 넘던 시절의 얘기부터 음식물 쓰레기가 넘쳐나고, 탄소배출 주역 세대가 되기까지 겪어 온 날들이 무진장이다. 무엇보다 권위주의 통치를 털어 내고 사회 각 부문에 민주주의 제도를 받아들이고, 시대적 변화를 이끌고 체험해 온 세대이기도 하다. 민주화 운동도, IMF 사태도, 정치적 격변도 곁에서 겪었다. 개인적 성취도 다른 어느 세대에 뒤지지 않게 무궁무진하다. 그런 사회적 변화에 끼이고 맞물리며 겪어 낸 개인적 변화 역시 작을 수 없다. 물론 아쉬운 것, 실패담이 없을 수 없다. 사회가 좋아진 줄 알았는데 도로 그 자리, 어찌 보면 더 나빠진 건 아닌지 살피게 되는 것도 없지 않다.

이런 이야기와 기억들이 한 개인에게 머물면 스러지는 추억이 될 것이지만, 말로 공유되고 글로 남겨지면 그건 한 개인의 기록이 된다. 그런 이야기들이 쌓이면 시대사가 되고, 역사가 된다. 그런 기록들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개인에게는 자기 삶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고, 조직이나 사회로서는 우리 세대가 겪어온 날들이 기록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근년 인상적으로 본 책 한 권을 소개한다. <자기 역사를 쓴다는 것>. 일본인 다치바나 다카시가 쓴,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개인이 삶을 기록하는 방법’이라는 부제가 붙은, 생애사 쓰기 사례집이다. 이 책은 15년 전 필자가 일본의 릿교대학(이 대학은 윤동주 시인이 일제강점기 재학했던 학교다) 평생교육원에서 자서전 쓰기 강좌를 진행한 경험과 이 강좌에 참여한 학생들의 기록을 엮어 만들었다.

15년 전은 나름 의미가 없지 않다. 바로 우리 베이비부머 세대와 비견되는, 일본의 다출생 세대 ‘단카이 세대’(1945년 전후부터 1950년까지 태어난 세대)가 기존의 정규 노동시장에서 대거 은퇴하던 때였다. 그들은 일본의 민주화 운동이라고 할 1960년대 안보투쟁과 70년대 총평으로 대표되는 노동운동을 거치고, 거침없이 이어지던 고도성장과 ‘버블 붕괴’라고 통칭하는 일본 경제·사회의 장기 침체기를 겪었다. 그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경험들을 퇴직을 전후해서 기록하는 프로그램이 여러 대학·기관에서 우후죽순 펼쳐지게 됐는데, 이 책은 그런 기록의 의미를 살피고 ‘어떻게 쓸까’를 꼼꼼하게 조언하고 있다.

바로 이 단카이 세대가 이제 우리 사회에서 퇴직과 새로운 출발에 나서는 베이비부머 세대와 여러모로 유사하다. 우리에게도 이웃 일본의 사례처럼 ‘자기 삶 쓰기’의 한 수요층이 이제 노동시장에서 쏟아져 나올 판이다.

좋은 기록은 개인에게는 자부심이고, 조직이나 사회에는 자산이 된다. 무엇보다 글을 기록하는 개인에게 지난날을 돌아보는 자기 성찰, 새로운 도약을 위한 디딤돌이 될 스토리가 된다. 삶은 스펙이나 성취가 아니라 자신을 긍정하는, 또는 자신을 돌아보는 기억을 엮은 이야기, 스토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