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의 엑스맨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나는 고향이 통영이다. 고향 지키며 사는 친구 중에 가두리 양식장을 하는 이가 몇 있다. 20년 전쯤 친구 양식장에 놀러 갔다가 창고에 가득 쌓인 포르말린 통에 깜짝 놀랐다. 물어보니 치어를 키우는 수조에 기생충이 많이 생겨 물고기 폐사가 많아 살충·소독제로 사용한단다. 포르말린을 뿌리면 수조 벽에 낀 이끼와 그 속의 기생충도 죽는다.
친구는 그렇게 키운 양식 물고기는 안 먹는다고 했다. 치어가 자라면 바다에 띄운 가두리로 옮긴다. 양식장은 가로세로 10미터쯤인 가두리 10여 개를 연결해 하늘에서 보면 바둑판처럼 보인다. 친구는 가장 먼 바다 쪽 가두리에 직접 줄낚시로 잡은 활어를 보관해두고 거기서 자라는 것만 먹는다고 했다.
친구는 포르말린을 사용하지 않고 10년을 버텼지만 치어가 자주 폐사해 빚만 5억원 가까이 지자 그때부터 포르말린을 사용했다고 했다. 지난 2010년 한국에 온 스리랑카 출신 이주노동자 칸 무바실룰라(41)는 11년 동안 장어와 미역, 다시마, 전복 등을 기르는 양식장에서 일했다. 그는 양식장에서 포르말린을 다루다가 2021년 백혈병에 걸려 산재 신청을 했다.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그가 일한 작업환경 측정 결과 “단기 고농도 노출 기준에 근접하거나 초과한 노출이 있어서 업무와 백혈병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밝혔다. 근로복지공단은 지난 4월27일 그의 산재를 인정했다.(경향신문 5월22일 8면 “포르말린 사용으로 백혈병 양식장 이주노동자, 업무상 질병 산재 인정”)
종종 사용자 편향적이라고 비판받는 질병판정위조차 40대 초반의 그가 백혈병에 걸린 상당한 이유가 포르말린이라고 결론내렸다. 이처럼 정파나 이념을 떠나 명백하고도 불가역적인 인과관계도 있다. 우리는 이를 과학이라 부른다.
대통령의 노조 때리기 일환으로 시작한 고용노동부의 ‘온라인 노사 부조리 신고센터’는 이런 과학을 무시한 대표 사례다. 이미 한국일보가 지난달 15일 10면에 ‘노조 비리 신고 판 깔았는데 뚜껑 여니 85%가 기업 불법’이란 제목으로 보도했다. 윤석열 정부는 ‘건폭’이란 신조어까지 만들며 노조 때리기에 집중하면서 신고센터를 설치했지만, 100일 남짓 운영한 결과 1천여 건의 신고가 접수됐는데, 이 가운데 85%가 노조가 아닌 기업의 불법이었다.
동아일보도 지난 5월25일 10면에 <“야근·휴일수당 못 받았어요” 포괄임금 오남용 신고 270건 접수>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각종 초과근로수당을 주지 않으려는 기업주의 포괄임금제 악용 사례만 270건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원흉은 윤 대통령이 그토록 줄기차게 주장하는 ‘몰아서 일하고 몰아서 쉬는’ 노동 관행의 대표주자격인 ‘포괄임금제’다.
동아일보조차 “기업들이 근로시간 산정이 가능한데도 포괄임금을 악용해 ‘공짜 노동’을 강요하는 사례가 많다”고 했다. 세계 최고의 IT강국 한국은 출퇴근과 업무, 휴식시간을 초 단위로 측정 가능하다. 따라서 애초에 포괄임금제 같은 게 들어설 여지는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기업은 포괄임금제를 점차 늘려 수당을 착취해 왔다.
노조 잡으려고 신고센터 설치했는데 기업만 때려잡게 생겼다. 자본과 노동의 시소는 단 한 번도 노동쪽으로 기운 적이 없다. 노동부는 이런 사실을 몰랐을까. 몰랐으면 노동부에서 일할 자격이 없고, 알고도 그랬다면 윤석열 정부의 엑스맨이다. 관련 한국일보 기사 해명자료에서 ‘노와 사를 불문하고 현장의 불법행위에 엄정하게 대처하겠다’는 노동부의 설명이 애처롭기만 하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