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자유를 잡아먹다
-임금피크제사건 항소이유를 작성하면서
1. 이 빌어먹을 세상은 틈만 나면 자유다. 지난 19일에는 대통령의 4·19 기념사에서 들어야 했다. 4·19로 쟁취한 자유, 민주주의가 사기꾼들에 농락당하고 있다는 취지의 말을 윤석열 대통령이 했다는 뉴스를 듣자니 이제 자유가 지겹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 나라 대통령이 말하는 자유는 무엇일까. 대한민국 대통령이 자유를 위해 이토록 강렬하게 4·19 기념 연설했다는 걸 도대체 믿지 못하겠다. 권력에 피투성이로 맞서 싸웠던 이들의 자유를 위해서는 아닐 테다. 자꾸 궁금했다. 그래서 대통령이 생각하는 자유를 생각해봤다.
내가 이 세상에 이 나라에 살아오면서 배우고 경험했던 것들을 종합하면 이 나라에서 국민의당을 대표로 하는 이른바 보수세력이 말하는 자유란 뭔지 몰라도 대단한 것임이 틀림없다. 그들이 자유를 말할 때 보이는 결연한 태도와 결기, 그리고 공격적이고 위협적인 행동으로 파악해보면 누군가는 파괴하고 짓밟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냥 민주주의를 말하면 그들에겐 위장된 것처럼 보이는지 자유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심지어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외치며 시위라도 벌이면 그들은 사회안녕 질서니, 국가안전이니 하며 자유를 지켜내는 게 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수십 년간 그들의 말을 들어왔더니 이제는 자유는 기존 질서이고, 기존 질서의 변경은 자유의 파괴라고 여겨질 정도다.
그런데 그렇게 자유를 파악하면, 기존 질서의 지배자는 주인으로, 왕으로 군림하게 된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인민에 대해 권력은 왕으로, 노동자에 대해 사용자 자본은 주인으로 군림하게 된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자유는 군림하지 않는다. 이 세상은 자유로 태어난 것이지, 권력이 자유의 이름으로 인민 위에 군림하기 위해 이 세상이 태어나지 않았다. 오늘 이 세상은 법제로 보자면, 노예와 농노의 법제와 결별하고서 세워졌다. 그 결별은 바로 자유 선언으로 이뤄졌다. 그래서 근대 법제는 민사법에서 개인 간 계약 자유를 원리로 하고, 국가법은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가장 중요한 기본권으로 하고 있다. 이렇게 자유를 법질서의 기본원리로 이 세상은 세워졌다. 이렇게 자유는 군림하지 않는 것이다.
2. 이상하게 오늘 이 세상은, 이 나라에서는 자유는 군림이다. 가만히 이 나라에서 말하는 걸 들어보면, 자유는 기업 활동을 보장하는 것이고, 재산권 행사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니 노동자에겐 자유는 그들의 것이 아니다. 그저 사용자 자본의 것이라 여길 뿐이다. 도대체가 이 세상은 자유로 태어났다는데, 자유는 그들의 것이고, 노동자의 것이 아니라니, 이상할 수밖에. 그래서 찾아보았다. 노동자의 자유를 찾아서 법전을 들추며 찾아보았다. 어디에도 자유는 사용자 자본의 것이고, 노동자의 것은 아니라고 규정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면 그렇지. 자유의 선언으로 이 세상은 태어났다고 내가 분명히 알고 있는데 자유는 사용자 자본의 차지라고 법률에 새겨놓았을 리가 없다. 이렇게 법은 분명히 노동자에게도 자유를 말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오늘 이 나라는 사용자 자본가 자유로 노동자 위에 군림하고 있다.
우리 사업장을 보라. 도무지 노동자의 자유라니 찾아볼 수가 없다. 사용자에 복종하는 것 말고, 자유로운 결정으로 근로조건 즉, 근로계약의 내용을 노동자가 정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노동자와 사용자간 근로계약관계도 이 세상에서 많은 계약관계처럼 당사자 간 합의로 그 내용이 결정되는 계약 자유의 원리가 적용되는 것인데도 이상하게 사용자가 정하는 대로다. 노동조합이 없는 사업장은 물론이고, 노동조합이 있는 사업장들조차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근래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임금피크제가 있다. 이 나라에 도입된 임금피크제는 기존 임금 수준을 삭감하는 것이라서, 노동자가 받아들일 리가 없다. 그런데도 이 나라에서 신기하게도 사업장마다 임금피크제가 도입돼 운영되고 있다. 정년을 몇 년 연장해 주면서 연장되는 기간 임금을 조정하는 정도라면 노동자가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오늘 이 나라에서 운영되는 임금피크제는 고령자고용촉진법이 정한 정년인 60세를 정년으로 해서 실제로 정년이 연장되는 것이 아니다. 정년이 연장되지도 않고 그저 임금만 삭감되는 것을 노동자가 받아들일 리가 없다. 진정으로 노동자의 자유로운 결정으로 도입돼 운영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나라 노동현장에서 당당하게 도입돼 운영되고 있으니 나는 신기하다. 이 나라 사업장에서 자유는 사용자 차지고, 노동자의 것은 아니어야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3. 우리 사업장에서 자유는 사용자 차지고, 노동자에겐 자유가 없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무엇이 이 나라 사업장에서 노동자의 자유를 잡아먹는가.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를 떠들어 온 나로서는 의문만 지니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믿기에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취업규칙 제도를 빼놓고서는 다른 걸 우선 말할 수 없다.
취업규칙 제도는 근로기준법 93조 이하에서 정해 놓고 있다. 상시 근로자 10명 이상의 사업장에서 사용자에게 취업규칙을 작성해서 신고하고, 변경에 관한 절차 등을 규정했다. 이에 따라 임금 등 근로조건 및 복무규율 제 기준에 관한 준칙인 취업규칙을 사용자가 작성하고 변경한 것인데, 바로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임금 등 근로조건은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 체결하는 근로계약의 내용이라서, 노동자가 자유로운 결정으로 사용자와 합의해서 체결해야 하는 것인데, 졸지에 취업규칙을 통해서 사용자가 사업장 노동자들의 임금 등 근로조건 및 복무규율 기준을 정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이 나라에서 그렇게 취업규칙이 운영되고 있다. 그야말로 이 나라 노동현장에서는 근로계약에 의해서 임금 등 근로조건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가 작성하는 취업규칙에 의해서 결정되고 있다. 근로계약은 신규채용 시에 형식적으로 작성하는 것 말고, 사업장에서 노동자의 임금 등 근로조건을 규율하지 못한다. 취업규칙은 단순히 사용자가 작성해 신고하는 취업규칙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임금 등 근로조건 및 복무규율에 관한 제규정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라서 노동자로 채용된 이후 퇴직 시까지 제반 근로조건에 관해서는 취업규칙에 의해서 규율되게 된다. 이렇게 이 나라에서 취업규칙은 근로계약을 대체하고, 자신의 임금 등 근로조건에 관해서 자유로이 결정할 노동자의 자유를 잡아먹었다.
4. 그런데 분명히 나는 앞에서 법전 어디에도 자유는 사용자의 차지고, 노동자의 것은 아니라고 규정돼 있지 않다고 말했다. 취업규칙 제도가 근로기준법에 있어도 마찬가지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아무리 근로기준법에 취업규칙 제도를 규정해놓고 있어도 이 세상에서 민사법질서의 기본 원리인 계약 원리에 따라 노동자와 사용자간 체결하는 근로계약 질서를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근로기준법 어디에도 취업규칙을 통해 근로계약을 대체한다고 규정하고 있지 않다. 단지 근로기준법 97조에서 “취업규칙에서 정한 기준에 미달하는 근로조건을 정한 근로계약은 그 부분에 관하여는 무효로” 하고, “이 경우 무효로 부분은 취업규칙에 정한 기준에 따르도록” 규정해놓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근로기준법 규정대로 해석해서 집행하면 될 일인데, 이 나라에서는 고용노동부 행정해석도 법원 판결도 취업규칙에 의해서 근로계약을 대체하는 법 집행을 해왔던 것이고, 이로 인해 이 나라는 임금 등 근로조건 결정에 관한 노동자의 자유는 없다. 노동자와 사용자 간 체결하는 근로계약 질서의 존재를 사용자가 작성하는 취업규칙질서로 말살해서는 안 된다. 신규채용 시에 작성하는 근로계약 질서는 퇴직할 때까지 존속하는 것으로 근로기준법상 취업규칙제도를 해석·집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오늘 이 나라에서 그런 것처럼 취업규칙이 근로계약을 대체하고, 노동자의 자유를 잡아먹게 된다. 과반수노조가 동의했다고 해서, 근로자과반수가 동의했다고 해서 개별 노동자가 가지는 자유를 취업규칙이 잡아먹도록 해서는 안 된다. 과반수노조나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 절차는 사용자가 취업규칙을 불이익하게 변경할 때 거치도록 한 절차일 뿐, 그 절차를 거쳤다고 해서 근로계약을 대체해서 근로계약으로 자신의 임금 등 근로조건을 결정할 자유를 빼앗을 수는 없다. 취업규칙을 통한 사용자의 자유는 제한해야 한다. 이를 위한 법 집행 없이 사업장에서 노동자의 자유는 없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