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 없이 싸우라고 등 떠미는 노동위원회

호영진 공인노무사(공공운수노조 법률원)

2021-10-13     호영진
▲ 호영진 공인노무사(공공운수노조 법률원)

참 피곤한 일이다. 노측 대리인으로서 자신들의 처분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회사와 다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수고로운 일인데, 구제신청 과정에서 당연히 보장돼야 할 노동자의 기본적인 방어권에 무심한 노동위원회와 소모적인 입씨름을 하다 보면 기운이 쫙 빠진다.

노동위원회에 사건이 접수되면 담당 조사관이 지정되고 조사관은 노사 양측의 주장요지와 제출된 증거를 취합해 조사보고서를 작성한다. 노동위원회는 분쟁의 신속한 해결과 객관적 사실규명을 위해 조사보고서 작성을 의무화하고 있는데 그 취지는 나쁘지 않다.

그러나 여기에서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바로 조사보고서 작성 과정에서 노동위원회가 입수한 자료인 ‘노동위원회증’에 대한 노동위원회의 처리방침이 노동자의 기본적인 방어권을 침해하고, 오히려 분쟁해결을 지연시킨다는 것이다.

노동위원회는 조사 과정에서 습득한 노동위원회증을 당사자에게 공개하지 않는다. 심지어 노동위원회증이 접수됐는지, 무슨 자료가 접수됐는지도 통보하지 않으며, 규정상 그럴 의무도 없다. 당사자가 조사관을 들들 볶지 않는 이상 노동위원회증이 접수됐는지조차 알 길이 없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만약 어떤 회사가 평가를 통해 노동자를 해고한 뒤에 그 근거자료를 노동위원회증으로 제출하면서 노측에 비공개할 것을 요청하면, 노동자는 심문회의 당일까지 자신이 해고당한 근거를 알 수도 없고, 회사가 제출한 자료에 대해서 최소한의 반론을 펼칠 기회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해고 등에 대한 입증책임이 회사측에 있다고 하지만, 노동위원회의 노동위원회증 처리방침은 해고 등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노동자의 방어기회를 원천차단하는 것으로서, 노동자더러 무기 없이 전쟁터에 나가 싸우라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물론 노동자가 노동위원회증을 사전에 입수할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노동위원회규칙 47조는 당사자의 요구가 있는 경우 노동위원회 결정으로 자료를 열람하도록 하거나 그 사본을 교부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또는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노동위원회증을 받아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에도 여전히 근본적인 한계가 존재한다. 문서열람신청 승인은 노동위원회의 재량일 뿐 의무가 아니라 불승인의 위험이 존재하고, 정보공개 청구는 공개결정까지 상당한 기간이 소요되어 노동자의 불안정한 지위가 장기화되기 때문이다.

결국 노동위원회가 지금의 노동위원회증 처리방침을 유지한다면, 노동자로서는 무기 없이 전쟁터로 내몰리는 당혹스러운 상황을 면하기 위해 문서열람신청에 협조적인 조사관을 만나기를 기도하거나 불안정한 지위가 장기화되는 것을 감내하면서 심문회의를 연기하고 정보공개 청구를 신청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게 된다.

이처럼 노동위원회의 노동위원회증 처리방침은 스스로의 존재 의의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노동위원회법 1조는 노동위원회는 노동관계에 관한 판정 및 조정업무를 신속·공정하게 수행하기 위해 노동위원회를 설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가 핵심 증거를 확보하기 어렵게 만들고, 이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심문회의까지 연기해 가며 장기간 불안정한 지위에 노출되도록 만드는 노동위원회의 방침이 과연 그 존재 의의인 ‘공정’하고 ‘신속’한 분쟁해결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을까?

현재 담당 중인 사건의 당사자는 지난 7월에 해고를 당했으나, 회사의 거듭된 자료공개 거부와 비공개 요청으로 인해 아직까지도 자신의 인사평가 자료를 받아보지 못하고 있다. 노동위원회 조사관과 입씨름 끝에 정보공개 청구를 했으나 정보공개 결정기한 연장공문만 한 차례 받았을 뿐, 구제신청을 접수한 지 세 달이 넘어가고 있는 지금까지도 감감무소식이다. 그동안 당사자는 ‘해고자’라는 불안정한 신분으로 하루하루를 아슬아슬하게 버텨 가고 있다.

노동위원회증 처리방침 변경에 대해 중앙노동위원회에 문의했으나 “장기적으로 검토 중에 있으며 지금 당장 지침변경이나 개정을 예정하고 있지 않다”는 답변을 들었다. 해고노동자에게 해고의 부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권을 보장하라는 것은 결코 무리한 요구가 아니다. 노동위원회가 신속하고 공정한 분쟁조정기구를 자처한다면 적어도 노동자더러 무기도 없이 전쟁터에 나가 싸우라고 등 떠미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