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간, 그 사건의 지평선

김성호 공인노무사(해담 노동법률사무소)

2021-09-14     김성호
▲ 김성호 공인노무사(해담 노동법률사무소)

1. 오랜 노동센터 생활을 마치고 개인 사무실을 내며 맞게 된 첫 사건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의 퇴직금 사건이었다. 아버지는 치과기공소에서 제작한 치아를 치과에 배송하는 일을 하셨다. 치과기공소들은 지하철 탑승료가 무료인 만 65세 이상 고령자들을 많이 고용하고 있다.

연로하신 아버지가 새로 일을 시작하셨다는 얘기를 듣고는 집에 계시는 것보다는 여러모로 잘됐다고 생각했을 뿐, 일하시는 데 어려움 같은 게 있는지는 물어보지 못했었다. 그렇게 7년을 일하시던 아버지는 회사를 그만두셨고, 다른 가족을 통해 퇴직금을 못 받고 계신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게 뭐람. 자식이 노무사인데 임금체불을 당하셨다니. 그제야 나는 아버지의 노동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하루 7시간에서 9시간 정도 일하셨는데, 사장은 임금을 6년간 월 70만원만 지급했다. 최근 1년은 코로나19로 일이 줄었다며 월 40만원으로 삭감했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노동시간을 입증할 자료가 없었다. 그나마 이동하시며 사용하신 지하철 기록을 증거자료로 제출했지만, 근로감독관은 이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거기에다 근로감독관이 지하철 실버 퀵과 비교하며 어설프게 근로자성 운운했다. 결국 나는 폭발했고 근로감독관과 언성을 높였다. “그리 판단해 보시라. 나도 추가 절차를 밟겠다.”

사건은 결국 합의로 종결했다. 아버지의 노동시간은 확정되지 않았다.

2. 주말에 출장이 잡힌 아내 요청으로 경기도 포천에 함께 갔다. 아내가 있는 단체에서 산재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노동자 가족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했는데, 신청인 인터뷰를 하러 간 자리였다. 미등록 이주노동자였던 신청인은 언어와 미등록 등의 문제로 산재 인정에 진척이 없었다. 계획에 없던 상담을 했고 결국 지원을 약속해 버렸다. 생각해 보니 아내의 빅픽처에 걸려든 것 같았다.

신청인은 폐플라스틱을 재활용 재료로 가공하는 공장에서 주 6일, 하루 12시간을 일했다. 공장은 큰 소음에 대화하기 어려울 정도였고, 플라스틱이 녹을 때 나는 냄새로 가득했다. 공장 벽에는 차량 이동을 위해 큰 출입구가 있었는데, 문이 없어 더위나 추위를 막지 못해 옥외작업과 마찬가지였다. 신청인은 한파가 몰아치던 2020년 12월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당시 신청인은 만 40세였고, 술과 담배도 하지 않았다.

신청인은 만성 과로에 해당하는 1주 60시간 이상을 노동했고, 한랭과 소음에 노출되는 업무부담 가중요인이 있었다. 그러니 산재 신청은 큰 무리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문제는 노동시간 입증이었다. 이미 사장은 퇴직금 문제로 형사처벌까지 받았으니 산재 신청에 호의적일 리 없었다. 신청인은 당시 공장에 붙어 있는 기숙사에서 지내 교통카드 기록도 없었고, 출퇴근을 증언할 이웃도 없었다. 영세한 공장에는 폐쇄회로(CC)TV도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산재를 담당하는 근로복지공단에 현장 조사 등 적극적 조치를 요구했지만, 담당자는 사측에 출석하라는 공문만 보내고는 시간만 끌고 있다.

3. 노동시간은 노동조건의 핵심 내용 중 하나다. 그리고 사용자는 노동시간 관리를 통해 이윤을 만들어 낸다. 그러니 당연히 노동시간에 대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기록하게 되는 것은 필요불가결하다. 그런데 노동시간과 관련된 분쟁이 발생하면 그 증명책임은 자료를 가진 사용자가 아니라 자료가 없는 노동자에게 전가된다. 당신이 제공한 노동시간을 증명해야 인정해 주겠다고 한다. 그런데 또 이상한 것은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시간을 직접 기록한 자료를 제출해도 이는 공식기록이 아니라는 이유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 도대체 어쩌라는 것인가. 노동시간뿐만이 아니다. 일터에서 어떤 화학물질을 쓰는지와 같은 온갖 정보와 기록들은 다 사용자가 가지고 있는데 그 기록에 대한 증명은 노동자가 해야 한다. 노동자는 그 정보와 기록들에 다가갈 수도 없는데 말이다.

4.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이라는 게 있다. 중력이 너무나 큰 블랙홀의 경우 빛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경계면이 존재하는데, 이를 사건의 지평선이라고 한다. 빛마저도 빠져나오지 못하다 보니 사건의 지평선 밖에 있는 관찰자는 지평선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다. 생각해 보면 사업장에서 사용자 권력은 마치 블랙홀의 중력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 중력에 의해 사업장에도 사건의 지평선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 안에서 노동자의 권리가 어떻게 무너지고 있는지를 사업장 밖에서는 알아내기 어렵다. 심지어 사업장 안에서도 강한 중력 때문에 어떤 권리가 무너져 내리는지 확인할 겨를이 없다.

그런데 사건의 지평선이야 자연 현상이니 현대 과학으로 이를 거스를 수 없겠지만, 사업장의 정보와 권력이 독점되는 것은 사람이 만드는 제도의 문제니 바꾸면 될 일이다. 바꿔야 무너지고 있는 권리들을 회복시킬 수 있다.

적어도 타인의 시간을 활용하는 자에게 그 시간을 기록하고 보존해야 할 의무 정도는 부과해야 한다. 노동시간과 직접 상관관계에 있는 임금에 대해서는 임금대장·급여명세서처럼 의무적으로 기록하고 있으니 그 근거인 시간을 기록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사용자의 편의에 치우친 관련 규정은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타인의 노동을 함부로 써도 된다는 생각도 고쳐지고, 서로에 대한 예의와 존중이 생길 수 있다. 사업장에 펼쳐진 사건의 지평선은 사라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