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사업을 위한 노동인가

윤애림 노동권 연구활동가

2021-07-08     윤애림
▲ 윤애림 노동권 연구활동가

“하청 노조로부터의 단체교섭 요구를 거절하는 경우, 근로계약 관계가 없다는 점에 더해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점도 근거 사실과 함께 적극적으로 주장해야 한다. 업무수행 과정상 하청 근로자에 대해 구체적·실질적 영향력 행사를 피하는 노력도 중요하다. 이러한 노력은 불법파견 인정 위험을 피하기 위해 이미 강조돼 왔는데, 이제 단체교섭 당사자 인정 위험을 피하기 위해 필요한 의미도 있으므로 더욱 중요해졌다.”

CJ대한통운이 지배·결정할 권한이 있는 택배노동자의 노동조건에 관해 단체교섭에 응해야 한다는 중앙노동위원회의 판정문이 나오자 재계가 난리다. 위의 인용문은 한 대형로펌의 변호사가 <이코노미조선>에 기고한 칼럼의 일부인데, 자본이 앞으로 어떤 식으로 대응할지 잘 보여준다. 원청은 간접고용·특수고용 노동자의 업무수행이나 노동조건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가리기 위해 주력할 것이다.

이런 자본의 ‘학습효과’를 우린 이미 경험한 바 있다. 학습지교사가 근로자라는 법적 판단을 피하기 위해 지국으로 출퇴근하는 제도를 바꾸고, 불법파견 판결을 피하기 위해 하청 소속 관리자를 중간에 끼워 넣었다. ‘진짜 사장’이 노동법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바지사장을 앞세우고 계약서의 문구를 고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지배의 ‘형식’을 바꾸는 것은 쉬워도 지배의 ‘이유’를 없애는 것은 어렵다. 이번 중노위 판정에서도, “택배기사들의 운송 업무가 CJ대한통운의 택배서비스 사업 수행에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요소”라는 점에서 원청 스스로의 사업상 필요에 의해 택배기사의 노무를 자신의 지배 내지 영향 아래 이용하는 관계라는 점을 인정했다. 택배기사들의 운송업무가 곧 택배원청사의 사업을 위한 것이기에, 원청사가 ‘당일배송’ 등 배송스케줄을 지배하고, 업무매뉴얼을 강제하고, 고객평가 등을 통해 제재를 가하는 것이다.

원청 관리자가 직접 지시하지 않고 하청을 통해 감독하거나, 계약서나 업무매뉴얼을 통해 노동자가 따라야 할 수칙을 미리 정해 두거나, 앱이나 인공지능을 통해 비인격적으로 통제하는 등 지배의 형식은 사용자가 임의로 바꿀 수 있다. 그러나 그 노동자의 노무가 기업 자신의 사업 수행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점은 지울 수 없다. 그래서 누가 ‘근로자’인가, 누가 ‘사용자’인가를 판단할 때 핵심적 질문이 바로 “누구의 사업을 위한 노동인가”가 돼야 하는 것이다.

미국의 절반 이상의 주에서 활용되고 있는 ‘ABC 테스트’가 갖는 혁신적 지점이 바로 이것이다. 예컨대 캘리포니아주는 (A) 노동자가 계약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업무수행에 관해 사용자로부터 어떠한 통제나 지시도 받지 않고, (B) 그 노동자의 노무제공이 그를 사용하는 기업의 통상적 사업 수행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며, (C) 그 노동자의 일하는 방식이 해당 직종·사업에서 독립자영업자들이 일해 온 방식과 동일할 때 해당 노동자가 진정한 자영인이라고 본다. A·B·C 중 어느 하나라도 인정되지 않으면 해당 노동자는 ‘근로자’로 추정되는데, 세 가지 중 사용자가 임의로 좌우하기 가장 어려운 기준이 B이다. 그래서 B기준, 즉 노동자의 노무제공이 기업의 사업 수행을 위해 필요한 것인지 여부가 노동법 적용 여부를 판단할 때 결정적 기준이 된다.

플랫폼 노동자를 플랫폼 기업의 근로자로 인정하는 해외의 최고법원들의 판결에서도 유사한 판단기준이 확인된다. 예컨대 영국 대법원은 계약의 내용·요금·수수료 등을 우버가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노동자는 우버 앱을 통하지 않고는 승객을 태울 수 없는 점 등을 근거로 우버 기사가 근로자라고 판단했다. 또한 승객의 신뢰·평판의 혜택을 얻게 되는 것은 개별 운전기사가 아니라 우버이기 때문에 표준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기사를 통제하게 된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러면서 “우버는 단지 IT서비스기업일 뿐이고 우버 기사가 개인사업자라는 사측의 주장은, 런던 시내에서 수만 명의 개인사업자가 운행을 하고 있다는 우스꽝스런 결론으로 이어진다”며 플랫폼 기업의 억지주장에 일침을 가했다.

자신의 사업 수행을 위해 노동자를 활용하는 자에게 그에 합당한 책임을 지도록 하는 노동법의 현대화가 시급한 시점이다.

노동권 연구활동가 (laboryu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