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친필 일기장은 우리에게 말을 건다

김혜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2021-04-29     김혜진
▲ 김혜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4월29일, 전태일 열사의 유가족이 지난 50년간 보관하고 있던 전태일 친필 일기를 사회에 내놓는다. 정치권과 자본에 의해 왜곡될까 우려해 소중히 간직해 왔던 일기장 관리를, 그 뜻을 이어 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위임했다. 전태일 열사의 일기는 전태일기념사업회가 펴낸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에 자세하게 담겨 있으니 내용이 새로운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이제 노동자들은 전태일 열사가 기록하고 간직했던 일곱 권의 일기를 직접 볼 수 있게 됐다. 청년노동자들에게 전태일은 평전으로만 만날 수 있는 사람이고, 가끔은 소설 속의 인물처럼 생각될 때로 있다 한다. 그런데 전태일 열사의 친필 일기는 그가 현실 속의 노동자였음을 생생하게 느끼게 한다.

‘전태일 일기장 관리위원회’에 함께하면서, 전태일의 친필 일기를 보는 것이 왜 이리 뭉클한가 생각했다. 그것은 전태일이 말을 거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던 평범한 청소년이었고, 미래의 꿈을 갖고 열심히 살아왔던 청년이었다. 문학을 좋아하고, 짝사랑도 한 청년이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처지와 한계를 비관하지 않고 사회의 모순을 직시하고자 한 지성인이었다. 일기라는 것이 원래 그렇듯이 무의미해 보이는 선·여백·그림, 그리고 다짐이라도 하듯 ‘절망은 없다’고 반복적으로 적어 놓은 부분들을 보며, 때로는 흔들리고, 때로는 혼란스럽고, 때로는 스스로를 다독여야 했을 그의 삶을 생각한다.

50년 전의 청년 전태일도 그렇게 불안했고 그렇게 좌절했다. 우리 시대도 너무나 불안하다.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는데 노동자가 아니라고 하고, 노동자라 하더라도 최저임금을 조금 넘는 임금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설령 정규직이고 임금을 많이 받아도 경쟁과 평가 때문에 괴롭고 밀려나지 않기 위해 발버둥쳐야 한다. 노동자에 대한 존중이 사라지고 노동을 폄훼하는 흐름은 커진다. 비트코인과 주식과 부동산 아니고는 이런 삶에서 벗어날 그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는 이들도 많다. 코로나19와 같은 위기 상황이 생기고 보니 기본적인 안전망조차 갖추지 못해 생존 문제로 고민하는 경우도 생긴다. 이런 현실에서 노동자들은 어떤 희망과 기대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50년 전의 청년 전태일은 단지 현실에 대한 분노로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니다.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현실에 대해 청원도 해보고 실태를 알리기도 했지만 변화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 좌절한 전태일이 수없이 고민하고 또 고민해 다시 평화시장으로 돌아왔을 때, 그가 한 결심은 허울뿐인 법에 기대기보다 다시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한 점의 불꽃이 되고자 했다. 지금 우리는 각성해 용기를 낸 수많은 전태일들을 만난다. 아시아나케이오 노동자들은 코로나19로 인한 해고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싸우고, LG 트윈타워에서는 청소노동자들이 인간의 존엄을 위해 싸운다. 정치권에 대한 청원과 법에 대한 기대를 넘어 다시 사람을 모으고 인간선언을 하는 이들이 전태일 열사의 뜻을 잇고 있다.

정부는 전태일 열사에게 훈장을 수여했지만, 우리 시대의 전태일들에게는 참으로 가혹하다. 전태일 열사의 뜻을 이어 가고자 했던 청계피복노조가 노조 사무실을 폐쇄당하고 쫓겨났듯이, 용기를 낸 이들은 쫓겨나고 잡혀 간다. 아시아나케이오 노동자들이 서울지방고용노동청을 찾아가 부당해고 판정이 실효성 있게 집행되도록 하라고 요구하자 경찰은 그 노동자들을 연행했다. 해고자로 정년을 맞을 수 없다며 부산에서 청와대까지 걸어 온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에게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과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감염병예방법) 위반 등으로 소환장이 발부됐다. 죽음의 진실을 밝히고 재발방지대책을 세우기 위해 함께 싸운 김용균의 동료들은 아직도 비정규직이다. 쿠팡이 제대로 방역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폭로한 노동자들은 재계약 거부라는 이름으로 해고되고 있다.

그래도 우리가 전태일을 다시 읽는 것은 그의 낙관이 우리에게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그는 좌절해서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니다. 그는 더 많은 이들이 자신의 죽음을 이어 사회를 변화시킬 것임을 믿었다. 힘이 없어 좌절할 때, 용기를 잃지 않고 길을 만들어 가고자 했던 50년 전 한 선배의 목소리를, 지금 불안정한 노동 속에서 권리를 위해 싸우기 시작한 노동자들이 꼭 들으면 좋겠다.

전태일의 삶과 우리의 삶이 다르지 않기에, 그가 남긴 해방된 노동에 대한 열망, 굴리다 못다 굴린 덩이를 우리가 함께 굴려 가면 좋겠다. 이 귀중한 자료를 사회에 알리며 우리 시대의 전태일들이 이 일기를 통해 용기 얻기를 희망한 유가족들에게 감사드린다.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work21@jinb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