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건준 아유 대표

조직된 폭력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집단 사이에서 발생하는 폭력이다. 개인의 폭력은 아동학대, 가정폭력, 데이트폭력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집단적 폭력은 학교, 기업, 정치를 비롯해 갈등하는 사회 집단 사이에서 발생한다. 폭력의 형태는 신체에 대한 물리적 폭력, 조직이나 법·제도를 이용해 가하는 제도적 폭력, 특정한 이미지나 사고방식을 만드는 문화적 폭력이 있다.

너무 오래된 과거일지 모르겠지만 군사독재의 시대에 비추면, 직접 폭력은 공적영역에서 줄었지만, 사적 영역에서는 오히려 늘었다. 데이트폭력과 같은 심각한 문제들이 등장했다. 그렇다고 제도·문화적 폭력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정치적 혐오와 적대도 폭력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정부나 지배 엘리트는 늘 준법을 강조한다. 현재의 질서에서 이득을 얻는 사람에게 질서 유지는 중요하다. 저항하는 사람들은 “악법도 법”으로 수용하기보다 “악법은 어겨서 깨뜨리자”고 한다. 특정한 법은 언제나 사회적 합의의 결과다. 그런데 합의 과정에 구성원 의사가 충분히 반영했는가가 문제다. 충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를 억업하는 악법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선택한 것이 ‘저항 행동’이다. ‘대항폭력’은 보다 극대화된 것이다.

세 가지 태도

사회운동에서 폭력을 대하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다. 대항폭력, 비폭력, 반폭력이다. 대항폭력은 지배자와 지배체제를 ‘지배당하는 자에 대한 폭력’으로 본다. 목적의식적으로 이에 맞서는 폭력을 준비하려는 시각에서 나온다. 평화적으로 궁극적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기 때문에 집단적인 무장력을 가지려 한다. 요즘에는 이런 의견이 줄었지만, 사회운동이나 노동운동에 여전히 잔재가 좀 있다.

비폭력은 모든 폭력에 반대하는 것이다. 일체 폭력을 거부하는 비폭력 저항운동이다. 우리는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과 같은 역사적 사례를 배웠다. 반폭력은 폭력에 반대하지만 특정 조건에서 폭력이 발생하기에 특정 상황에서 방어적 폭력을 인정하는 것이다. 비폭력과 가장 큰 차이다. 또한 특정 조건에서 방어적 폭력을 인정하지만 그것을 목적의식적으로 준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항폭력과 다르다. 반폭력에서 중요한 것은 폭력이 발생하는 특정 조건을 제거함으로써 폭력을 넘어서는 것이다.

노조의 파업은 폭력이 아니다. 물론 사용자 입장에서 재화와 서비스 생산이 중단되고 이윤실현이 강제적으로 차단되기에 다르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파업은 노동을 제공하는 것을 거부하는 합법적 행위다. 파업과 함께 이를 공격하는 사용자나 진압하려는 공권력에 맞서 격한 시위나 점거가 동반될 때는 폭력이 발생할 수 있다. 이럴 때 파업은 폭력과 결합한다.

법 이전에 필요한 것

대항폭력으로서 집회와 시위에 결합된 파업은 공격당한다. 사용자나 국가권력이 노조로 상대로 제기하는 손해배상·가압류다. 지금도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개정 운동이 진행 중이고 국회에서 관련 법률을 다루고 있다. 아무리 법률이 잘 만들어진들 폭력과 결합된 파업에 대한 민형사상 보복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실패한 투쟁에 얹어진 보복적 손배가압류는 너무나 괴로운 일이기에 법개정운동은 절실하다.

그런데 극한 투쟁 후 ‘연대’를 끌어들이는 것은 되도록 피해야 한다. 폭력이 발생한 후 사법적 책임에 대응하기 전에 폭력이 발생하는 조건을 제거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바로 노동운동에서 개발하고 발전시켜야 할 지점이다. ‘노란봉투법’을 얘기하면 등장하는 사례가 쌍용차다. 손배가압류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쌍용차에 쏟아진 경찰과 사용자의 폭력, 그리고 여러 죽음이 불러온 아픔이 선명해 쌍용차 투쟁에 대한 심정적 지지가 있다. 그래서 노조에 다른 방식으로 대응할 수 없었는가를 질문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의 투쟁에도 그런 질문을 잘 하지 않는다.

앞에서 대항폭력의 잔재를 언급했는데, 단순한 사업장 파업이나 부분 파업을 ‘총파업’이라고 부르는 노조를 보면 받는 느낌이다. 물론 목도리도마뱀처럼 목을 부풀려 센 척하는, 약자의 심리가 불러온 산물이다. 그런데 IT산업의 신생노조에서 투쟁이나 총파업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순한 맛 행동’ ‘매운 맛 행동’ ‘아주 매운 맛 행동’으로 부르는 것은 단지 단어 선택 문제가 아니다. 투쟁이나 폭력에 대한 다른 태도와 다른 접근을 보여준다.

노동을 둘러싼 폭력의 조건

어떤 폭력이든 피해자는 약자다. 대항폭력이나 방어적 폭력이 때로는 약자에게 필요하고 유리한 것으로 느낄 수 있다. 넓고 길게 본다면 폭력은 긍정적 결과를 주지 않는다. 피지배 민중의 해방을 위한 폭력투쟁은 불가피하지만, 폭력투쟁은 오히려 해방을 억압할 가능성이 크다. 가장 극대화된 폭력이 전쟁이다. 한국전쟁은 한반도 민중해방을 억압했다. 역사적 효과로 반공이데올로기가 극대화되면서 빨갱이라는 한마디로 모든 저항을 억압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도 색깔론으로 이어져 작동한다.

전쟁이 극단적 사례라면, 폭력적 저항 행동 후에 따라오는 손배가압류를 보자. 민형사상 책임보다 선명하지 않을 수 있지만 사실 더 치명적인 결과가 있다. 과격한 노조에 대한 시민의 거리감이다. 노조가 전투적인 것은 자칫 과격 이미지로 굳어질 수 있고 노동자들은 그런 험한 상황에 뛰어들기를 꺼린다. 노동권의 주인이 노동권을 거부한다.

반폭력에서 말하는 ‘폭력의 조건 제거’를 생각해보자. 노동 현장에 사용자의 다양한 폭력이 나타난다. 업무 과정에서 물리적, 인격적 폭력을 비롯해 노조를 만들고 난 후 각종 탄압으로써 폭력이 나타난다. 이런 폭력이 발생하는 조건은 무엇인가. 사용자의 이익에 혈안이 된 욕망, 노조로 인해 이익이 줄어들고 통제가 어려울 것이라는 공포 등 여러 가지가 작동한다. 사용자를 ‘계도’한다고 폭력이 사라질까.

폭력을 이기는 관계력

핵심은 노동자 관계다. 크고 넓게 단결하면 사용자들은 폭력을 사용하기 어렵다. 노사관계에서 폭력은 바로 노사관계의 역학에서 발생한다. 노동자들이 튼튼하게 연결됐다면, 사용자의 폭력은 오히려 역공을 받는 ‘바보짓’이다. 조직력이 약한 노조는 늘 사용자 탄압이라는 폭력에 노출된다. 약자로 머물 때 강자인 사용자의 힘이 폭력으로 작동한다.

노사관계에서 폭력의 조건은 바로 강자와 약자로 나뉜 상태다. 오래된 공장 노동이든 요즘의 분산된 노동이든 폭력의 조건 제거가 가장 중요하다. 문제는 플랫폼노동과 같이 요즘 노동이 온라인에서는 연결되지만 오프라인에서는 물리적으로 분산되어 있다는 점이다. 노동과정 자체에서 집단적 문화가 생기지 않는다.

빛으로부터 차단된 어두운 곳이 폭력 발생 장소가 될 가능성이 높다. 주변과 차단된 고립된 사람이 폭력이 노출될 가능성이 더 높다. 주변과 잘 연결될수록 폭력은 사라진다. 분절된 노동을 연결하는 방법을 개발하는 것이야말로 노동권 운동의 핵심 과제다. 흩어져 일하는 요즘 노동을 탄탄하게 연결하는 역량, 즉 관계력 향상이 긴요하다.

아유 대표 (jogj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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