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고은 기자

“저는 지금 아직도 (해고된) 2020년 6월26일에 제 시계가 멈춰 있습니다. 저희는 단순히 직업을 잃은 게 아니었습니다. MBC는 (재판 과정에서) 저희의 10년을 부정했고 무능력자로 몰아갔습니다.”

1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행정법원 앞. 2011년부터 MBC <뉴스투데이>에서 일하다 2년 전 해고된 작가 A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MBC가 중앙노동위원회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행정소송 선고를 앞두고 “불안감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는 A씨는 “만약에 지면 안 좋은 선례로 (남아) 후배들의 발목을 잡을까 봐 너무 무서웠다”며 “이제 법원에서 인정을 받았으니 MBC로 돌아가서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갑자기) 해고된 이유를 밝히고 싶다”고 호소했다.

법원이 방송작가를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보고 이들을 해고한 것은 부당하다고 판결했다. 방송작가 근로자성을 인정한 첫 판결이다. 노동자들은 MBC가 소송전을 이어 나가는 대신 공영방송으로서 책임 있는 자세로 원직복직을 하루빨리 이행하라고 촉구했다.

“‘방송작가=프리랜서’ 관행 깬 판결”

서울행정법원 행정12부(재판장 정용석 부장판사)는 이날 오후 MBC가 중노위를 상대로 낸 부당해고구제 재심판정취소 소송에서 “원고들의 청구를 기각한다”며 “소송비용은 원고가 부담한다”고 밝혔다. 중노위가 지난해 방송작가의 근로자성을 최초로 인정한 데 이어 법원에서도 같은 판단을 내린 것이다. 지난해 4월 사건이 법원에 접수된 지 약 1년3개월 만에 나온 판결이다.

중노위는 지난해 3월19일 방송작가 2명이 MBC 사측을 상대로 제기한 부당해고구제 재심사건에서 서울지방노동위원회 판정을 뒤집고 부당해고를 인정했다.

작가 2명은 2011년부터 <뉴스투데이> ‘코너작가’로 일하다 2020년 6월 프로그램 개편을 이유로 해고됐다. 이들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전에 방송되는 <뉴스투데이>에서 각각 외국 주요뉴스와 조간신문 주요뉴스를 소개하는 코너를 담당했다. 뉴스 아이템을 선정하는 것부터 원고 작성, 방송 모니터링 등의 업무를 맡았는데 이 과정에서 담당 PD와 총괄 PD의 업무지시를 받았다.

중노위는 “이 사건 근로자들이 수행한 업무는 생방송 코너 제작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다른 근로자들과 유기적으로 함께 결합해 수행할 필요성이 큰 업무이기 때문에 이 사건 근로자들의 업무만을 따로 떼어 독립된 사업자에게 위탁할 만한 성격의 업무로 보이지는 않는다”며 “(작가 입사 이전 해당 업무를) 방송사 정규직 기자가 수행했는데 업무내용이나 방법이 작가가 수행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판단했다.

윤지영 변호사(공익인권법재단 공감)는 “2003년 서울고법은 마산 MBC 구성작가에 대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상 근로자성을 부정하는 판결을 내렸고, 이후 ‘방송작가=프리랜서’라는 관행이 20년 넘게 이어졌다”며 “선행 판결의 관행, 편견에 휩쓸리지 않고 실체적 진실에 입각해 용기 있는 판결을 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윤 변호사는 “최근 판결의 경향은 객원 PD, FD, VJ, 프리랜서 아나운서, 드라마 촬영감독 모두 (이들이) 근로자이고 방송사 또는 제작사가 (사용자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라며 “프로그램 제작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정규직 노동자들과 유기적으로 결합할 수밖에 없는 업무 특성상 사실상 방송사의 비정규직 태반이 방송사가 고용한 직원이 되는 게 맞다”고 덧붙였다.

“MBC, 방송작가와 단체교섭해야”

중노위에 이어 법원에서도 같은 판단이 나오면서 MBC의 행보에 이목이 집중된다. 중노위는 MBC에 방송작가 2명을 원직에 복직하고 임금상당액을 지급하라고 명령했지만 MBC는 이 같은 부당해고 구제명령을 이행하는 대신 이행강제금을 내는 쪽을 택했다. 소송 과정에서도 변론기일 직전 서면을 제출하며 ‘시간 끌기’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MBC는 작가들의 근로자성을 부정하기 위해 업무지시를 한 이유로 해당 작가들의 ‘업무능력 부족’을 주장하기도 했다. MBC 관계자는 이날 “판결문을 확인한 뒤 입장을 밝힐 수 있다”고 말했다.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는 “MBC는 더 이상의 소송전을 중단하고 방송작가들이 일터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김유경 공인노무사(돌꽃노동법률사무소)는 “이번 판결은 단지 2명의 승리가 아니라 싸우고 있는 작가들이 얻어 낸 결과”라며 “MBC가 또 다른 소송을 제기한다면 법적 정당성을 따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거대한 투쟁을 가로막기 위한 의도라고밖에 볼 수 없다”고 비판했다.

방송작가의 근로자성 인정 흐름이 이어지고 있는 만큼 개별 대응이 아닌 방송사와 노조 간 단체교섭으로 전체 작가들의 처우개선과 근로자성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해 MBC 작가의 근로자성을 인정한 중노위 판정 이후 KBS전주, TBS, YTN 작가들이 연이어 중노위에서 근로자성을 인정받았다. 이미 방송작가의 근로자성 인정이 흐름으로 자리 잡은 만큼 교섭을 통해 ‘무늬만 프리랜서’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지부에 따르면 MBC는 지부의 교섭요구에 응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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