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희 국민입법센터 대표(전 통합진보당 대표)

<연속성과 교차성>(도서출판 갈무리·2만원·사진)의 저자 전지윤은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계기가 2014년 통합진보당에 대한 종북공격에 어떻게 맞설지 생각했던 것이었다고 밝힌다. 당시 상황 악화를 막을 책임을 졌던 사람으로서, 먼저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책임을 다하지 못한 잘못을 기억하고 살아가겠다는 것 말고는 내놓을 말이 없어 부끄럽다.

당내 경선 논란으로 시작된 내부 갈등에서 불붙어 내란음모 조작사건, 헌법재판소의 강제 해산 결정까지 이어진 종북공격으로 많은 분들이 고통받았고 삶의 행로를 바꿔야 했다. 그로 인해 새로운 생각을 쌓게 됐다고 회상하는 누구라도, 겪어 내기 힘든 일이었다. 굳이 그 당시를 회고하고 평가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그런데 저자는 새삼스럽게 그 일을 집필의 시작으로 짚는다. 짧은 말이라도 이어 가야 도리일 듯하다.

저자가 시도하는 마르크스주의를 재구성하는 작업은 내가 논평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 변화하는 현실을 맞아, 오래 함께한 사람들과 공유하던 기존 이론의 경계를 넘어서면서 상상력을 강조하는 저자의 마음을 추측해 볼 뿐이다. 내 안의, 우리 안의 한계를 어떻게 넘어서야 할까. 관계가 다소 달라진 우리들과 어떻게 함께할 것인가, 나 역시 줄곧 고민하는 문제다.

저자는 “아래로부터 민주주의와 소통, 노동계급 중심성의 확장, 차별과 억압에 맞서는 진정성의 정치”를 대안으로 말한다. 나를 비롯한 우리 모두가 완전하지 않다고 인정하고 귀를 열어두는 것, 애써 일해 먹고사는 사람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 타인의 고통을 덜어 내는 데 우선 마음을 두는 것이라고 말해도 될까.

문제는 사람들이 지금 이 대안을 실천해 내는 집단을 떠올릴 수 있는가다. 정당이든 사회단체든, 진보라는 선언만으로 기대를 줘도 좋았던 때는 이미 지났다. 어디 딱 믿을 인물이 없고 진득하니 마음 붙일 곳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 같다. 나 역시 기대의 시간을 허비한 사람이라 고개를 들기 어렵다.

어찌해야 하나? 진보를 지향하는 집단도, 이 사회보다 아주 약간 더 진보할 수 있을 뿐이다. 누구나 시대의 한계를 안고 산다. 그들이 기대만큼 민주주의를 실천하지 않고 진정성을 보이지 못한다고 해도, 진보에 대한 그들의 제안이 옳다면, 힘을 보태자. 작은 사회진보라도 이뤄진다면 우리를 한발 더 진보하게 하는 데 쓰자.

지난 5년 미흡했지만 작은 진보도 있었다. 주민조례발안에 관한 법률(주민조례발안법)이 만들어져 올해 1월부터 시행됐다. 이제 주민발의조례가 지방의원 임기만료로 폐기되는 일은 없다. 지방의회는 길어도 2년 이내에 가부 간 의결을 해야만 한다. 아래로부터 민주주의를 실현할 길이 조금이나마 넓어진 것이다. 국제노동기구(ILO) 기본협약 비준 결과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30조3항에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기업·산업·지역별 교섭 등 다양한 교섭방식을 노동관계 당사자가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이에 따른 단체교섭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조항이 신설돼 지난해 7월부터 시행됐다. 플랫폼·프랜차이즈·특수고용·하청노동자처럼 교섭권을 행사할 수 없었던 노동자들이 진짜 사용자와 교섭할 수 있는 최소한의 법적 근거는 마련된 셈이다. 하지만 아직 주민조례발안은 손꼽을 정도고, 노조법 30조3항은 활용되고 있지 않다. 작은 진보라도 디딤돌 삼아, 일하는 사람들의 생활을 나아지게 하자.

사회진보보다 한발은 더 나아가자. 직접민주주의를 몸에 익히고, 더 힘든 사람들과 공감하고, 내 안의 혐오와 배제를 줄이려 노력하자. 다른 사람을 바꾸는 가장 빠른 길은, 나를 바꾸는 것이다. 더 믿을 만한 진보적인 신뢰집단을 만드는 가장 또렷한 길은, 어제보다 더 나은 나를 만드는 것이다.

다른 의견을 존중하는 우호적인 토론에 참여하는 것은 분명히 더 나은 나를 만든다. 저자의 이 책은 나에게도 우호적인 토론 제안이었다. 제안에 감사드린다. 혐오정치에 대한 저자의 다음 토론도 즐겁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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