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현철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장(직업환경의학 전문의)

한국경총이 기업 경영에 영향을 미치는 6대 분야 30개 과제에 대한 경영계의 제안을 담은 ‘신정부에 바라는 기업정책 제안서’를 발간하고 25일 20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이를 전달했다고 보도자료를 통해서 밝혔다. 6대 분야 중 하나는 ‘안전한 일터 조성과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경영환경 구축’이다. 해당 분야 과제를 살펴보니 산업안전보건청 설립 등 선진국형 산재예방행정체계 구축, 예방과 보상의 효율적 연계를 통한 산재 감소 효과 제고 같은 일면 전향적 방향성을 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가장 앞세운 과제는 중대재해처벌법 입법 보완으로 법률상 경영책임자 의무내용의 불명확성을 해소하고 경영자에 대한 하한형의 징역형 삭제 요구였다. 24일 인수위 업무보고에서 고용노동부는 “중대재해처벌법에 대한 현장의 우려 사항과 관련해 지침·해석·매뉴얼, 필요시 하위법령 개정 등을 활용해 불확실성 해소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입장을 전달했다고 보도자료를 통해 밝혔다.

경총이 인수위에 중대재해처벌법 완화를 요구한 바로 그날에만 4명의 노동자가 일터에서 떨어지고 끼이고 낙하물에 맞거나 깔려서 사망했다. 거제에서는 조선소 크레인 아래에서 보수작업 중이던 하청노동자가 낙하하는 설비 부품에 머리를 맞아 숨졌고 부산에서는 주차타워 공사현장 지하에서 작업하던 이주노동자가 리프트카를 끌어올리는 무게추(카운터 웨이트)에 깔려 숨졌다. 청주의 플라스틱 제품 제조업체에서는 노동자가 점검 중이던 배합기에 끼여 숨졌고, 서울의 공사현장에서는 도장작업을 하던 노동자가 추락해서 사망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모두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대상일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시스템의 어떤 부분이 문제인지 들여다보기보다는 처벌을 완화하라고만 주장하고 있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자마자 노동자들의 사망이 바로 줄어들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중대재해처벌법을 기화(奇貨)로 삼아서 기존 산재예방 관리시스템의 잘못된 관행을 혁신해 나가는 과정에서 줄어들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실제로 중대재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시대적 요청으로 제정된 법을 받아들이는 기업의 자세와 정부의 행정철학이 더 중요하다. 당장에 기업의 엄살이야 그러려니 해도 노동부가 머뭇거리고 주춤거리는 것만으로도 입법 효용성은 반감되거나 무력화될 것이다.

경총이 줄기차게 이야기하고 노동부가 받아 주다 보니 마치 실제적인 문제인 것처럼 여기게 된 ‘중대재해처벌법의 불확실성’이라는 개념은 실로 교묘한 왜곡이다. 지난해 6월 경총은 ‘영국의 산재예방 행정운영체계 실태조사 결과 및 시사점’을 발표하면서 “영국의 사례를 통해 우리나라가 향후 지향해야 할 산업안전보건 정책과 행정운영체계의 바람직한 방향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경총이 이야기하는 소위 선진국형 산재예방행정체계로서 영국의 방식은 한국처럼 산업안전보건법령에서 사업주가 준수해야 할 의무로 1천200여개 조문을 상세하게 규정하는 이른바 지시·명령적 규제가 아닌 ‘목표기반 규제’를 바탕으로 한다. 이는 의무보유자가 법률을 준수하기 위해, 즉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무엇을 수행해야 하는지는 명시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는 명시하지 않는 것이다(영국의 산업안전보건 접근법과 보건안전청의 역할, 한국경영자총협회, 2021년). 자율규제를 원칙으로 하지만 이러한 원칙은 기업이나 경영책임자의 ‘일반적 의무’ 또는 ‘포괄적 의무’ 규정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경총 스스로 밝히듯 사업주에 대한 규제내용을 일일이 나열하는 산업안전보건법령으로는 업종과 현장 특성을 고려해 기업이 선택한 안전관리 방법의 합리성 여부를 따지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규정과 다르면 처벌하도록 돼 있고, 한편으로는 중대재해가 발생해도 형식적 규정만 지키면 처벌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산업에 대한 규제내용을 무한정 늘려 가며 법으로 담을 수 없기에 선택한 방식이 ‘포괄적 의무’를 전제로 한 ‘목표기반 규제’인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 의무조항의 기준을 ‘합리적으로 실행가능한 범위에서(so far as is reasonably practicable)’ 수행하는 것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는 세부적인 규정이나 기준을 준수했는지가 기준이 아니라 사업주가 위험성에 대처해야 하는 시점에서 최신의 지식과 식견에 따른 기술적으로 가능한 모든 수단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고, 위험성을 제거하기 위해 요구되는 비용·시간·노력 등의 곤란성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 원칙이다.

획일적인 지시·명령적인 규제가 비합리적이라고 하면서도 법에서 경영책임자의 안전보건조치의무로서 재해예방에 필요한 인력 및 예산 등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과 이행을 요구하는 것이 불확실하다고 노동자들이 죽어 나가건 말건 면죄부를 담은 비단주머니를 내놓으라고 아우성인 것이다. 자가당착이거나 의도적인 왜곡이다. 자율규제란 기업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포괄적인 의무를 전제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스스로 성찰하고 찾아가는 것이다. 행정당국은 중대재해가 발생한 경우만이 아니라 기업의 일상적 산재예방활동에 대해서도 합리성과 적절성을 판단할 실력과 기반을 쌓아 가면서 산업안전보건법제와 행정체계 혁신을 준비하면 될 일이다. 부화뇌동(附和雷同)이 아니라 화이부동(和而不同)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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