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고은 기자

경기도 김포에서 택배노동자로 일하는 권지훈(38)씨는 2015년 김포신도시 한 아파트 단지가 택배차량의 지상출입을 금지하면서 지하주차장에 출입하기 위해 높이가 낮은 저상탑차로 택배를 배송해 왔다. 1.24미터가량 저상탑차에서 택배물건을 싣고 내리려면 키 178센티미터인 그는 무릎을 꿇고 일해야 한다.

지난해 여름 허리를 굽히고 일하다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통증이 심해져 119구급차를 불러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기도 했다. 하루평균 280~330개 물품을 배송하는 그는 허리뿐만 아니라 목부터 무릎·발목까지 욱신거리고 찌릿한 통증이 이어져 주기적으로 주사를 맞아야 한다. 진통제도 달고 산다. 권씨는 “저상탑차 타는 기사들은 이 정도가 기본”이라며 “지상 출입을 막은 이유가 안전문제 때문인데 지하주차장을 이용하면 더 안전한 건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CJ대한통운 김포터미널에서 근무하는 택배노동자 20여명이 저상탑차 이용으로 인해 근골격계질환에 시달리고 있다며 집단 산재보상을 신청하기로 했다. 차량 지상출입을 금지한 공원형아파트가 밀집해 저상탑차 사용 비중이 높은 김포지역부터 근골격계질환 산재신청을 한다는 계획이다. 지난 4월 서울 강동구 고덕동 아파트 택배대란 이후 문제 해결을 위해 노사정이 참여하는 협의체가 꾸려졌지만 지금까지 논의는 공전하고 있다. 전국택배노조(위원장 진경호)는 관련 대책을 촉구하며 파업을 예고했다.

증상호소자 비중 저상탑차 14.4%포인트 높아

택배노조는 16일 오후 서울 중구 민주노총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노동환경건강연구소를 통해 지난달 29일부터 이달 1일까지 CJ대한통운 김포터미널에서 일하는 노조 조합원 3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노동환경건강연구소는 통증의 발생기간·정도·경험주기성 등을 물었다. 35명 중 22명이 근골격계질환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저상탑차 이용자일수록 증상 호소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일반택배·하이탑 차량 사용자는 58.3%가 증상을 호소했는데 저상탑차 사용자는 72.7%가 질환을 앓는다고 했다. 일반 택배차량은 화물칸 높이가 2.5~2.7미터 정도다. 저상탑차는 아파트 지하주차장 천장 높이(2.3미터)보다 낮다.

증상을 호소하는 부위는 허리가 37.1%로 가장 많았고, 다리·발(31.4%), 어깨(22.9%), 팔·팔꿈치(20%), 손·손목·손가락(14.3%) 순이었다. 10명 중 3명(27.2%)이 검진이 필요한 신체부위가 ‘3개 이상’이라고 답했고, 1개와 2개라고 답한 응답자는 각각 36.4%였다.

한인임 일과건강 사무처장은 “근골격계질환은 육체적 과부하를 가져오기 때문에 단순히 뼈·디스크 손상 수준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뇌·심혈관계질환을 유발할 수 있다”며 “골병을 방치하면 노동력 상실로 이어질 수 있어 조기 치료도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노동부 ‘저상탑차 유해요인’ 보고서 냈지만 논의 진전 없어

지난 5월 노조, 택배사와 대리점, 고용노동부와 국토교통부가 참여하는 ‘지상공원화 아파트 배송 문제 해결을 위한 협의체’가 구성된 뒤 노동부가 저상탑차의 유해요인 노출 위험성이 크다는 취지의 보고서를 발표했는데도 7개월째 논의가 공전하고 있다. 노동부는 작업자세와 택배무게를 기준으로 근골격계질환 유해요인 노출 위험성을 평가해 저상탑차의 경우 배송순서정리작업과 집화하차작업이 각각 고위험작업, 위험작업이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협의체는 수차례 회의를 이어 왔지만 입장차를 좁히지 못한 채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상황이다. 아파트 집하장에 물품을 두면 노인 택배원이 카트를 이용해 집까지 물건을 배송하는 실버택배 시스템 등이 테이블 위에 올랐지만 노사 양측 의견이 팽팽히 맞서면서 지난달 초 이후로 협의체가 열리지 않고 있다.

진경호 위원장은 “실버택배 등에 건당 600원 정도 수수료를 지급해야 하는데 건당 750원 정도 받는 택배노동자가 이를 전부 부담하면 150원 정도만 손에 쥐게 되는 셈”이라며 “해당 지역 택배요금을 일부 인상하는 것을 전제로 입주민과 택배사, 택배노동자 3주체가 공동으로 재원을 마련하는 안이 유력하게 검토됐지만 CJ대한통운측 반대로 진전이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노조는 자체 조사에서 증상을 호소한 22명에 대해 병원검진을 진행해 산재신청을 한다는 계획이다. 김포터미널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저상탑차를 이용하는 택배노동자의 집단 산재신청으로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 노조는 저상탑차 이용자를 4천명 안팎으로 보고 있다. 국토부는 택배사의 경우 600~700대 정도로 추산한다. 노조는 관련 대책을 촉구하며 이달 말 파업을 예고했다. 20일 노조 CJ대한통운본부 대표자회의를 열고 23일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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