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현대중공업 하청업체에서 용접·취부작업을 한 김진수(63·가명)씨는 2018년 6월 작업 도중 갑자기 쓰러졌다. 김씨는 병원에서 뇌경색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다. 이후 뇌경색이 업무상질병이라며 산업재해를 신청했지만 부산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에서 불승인돼 치료비를 지원받지 못했다. 부산질병판정위는 “발병 전 12주간 1주 평균 업무시간은 45시간15분으로 만성적 과로가 확인되지 않는다”며 “발병 원인은 신청인의 기존 질환, 음주·흡연으로 인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상병과 업무 사이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김씨는 불승인 결정에 불복해 산업재해보상보험재심사위원회에 재심사를 청구했다. ‘업무부담가중요인’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지 않았다는 취지였다. 2018년 1월 시행된 고용노동부 고시 ‘뇌혈관질병 또는 심장질병 및 근골격계질병의 업무상질병 인정 여부 결정에 필요한 사항’(뇌심혈관질환 산재 인정기준)에 따르면 ‘7대 업무부담 가중요인’에 복합적으로 노출될 경우 발병 전 12주 동안 업무시간이 1주 평균 52시간을 초과하지 않더라도 질병과 업무의 관련성이 늘어나는 것으로 판단한다. 업무강도나 작업환경 등 질병에 끼치는 여러 요인을 충분히 고려하겠다는 것이다.

김씨는 발병 이틀 전 관리자에게 퇴사 권고를 받았다. 당시 현대중공업 물량감소로 인해 고령의 하청업체 작업자들이 우선순위로 해고되는 분위기였다. 불안한 고용 상황이 아니더라도 그의 업무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작업 특성상 중량물을 들고 이동하는 일이 잦았고 소음에도 상시적으로 노출돼 있었다.

조선소 취부작업은 근로복지공단 ‘뇌혈관질병·심장질병 업무상 질병 조사 및 판정지침’상 직업에 따른 육체적 업무강도 평가표에서 5단계 중 4단계(heavy)에 해당한다. 김씨는 2017년 건강검진에서 소음성난청 판정을 받기도 했다. 이를 근거로 업무부담 가중요인 중 △육체적 강도가 높은 업무 △유해한 작업환경(소음·온도변화) △정신적 긴장이 큰 업무 등 세 가지에 노출됐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기각 결정을 받았다. 김씨는 후유증으로 일터에 돌아가지 못한 채 자택에서 요양 중이다.

24일 <매일노동뉴스> 취재 결과 김씨처럼 3가지 이상 가중요인이 복합적으로 존재하는데도 산재가 인정되지 않는 사례가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업무시간뿐만 아니라 업무강도와 정신적 스트레스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도록 노동부 고시가 개정된 지 3년이 넘었지만 현실에서 제대로 적용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여전히 업무시간을 중심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바뀌지 않고 있어서다.

3가지 이상 가중요인 있어도 산재 ‘불승인’
‘복합적’기준 없어 질병판정위원 재량에 기대는 구조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서 일하다 2019년 6월 급성심근경색으로 숨진 심규호(사망당시 54·가명)씨의 경우도 과로사를 주장하며 유족이 유족급여 및 장의비를 청구했지만 불승인됐다. 1991년 입사한 고인은 2013년까지 22년간 주야맞교대로 일하다 같은해 3월부터 사망할 때까지 주간연속 2교대로 근무했다. 자동차 작동검사를 하는 업무를 맡았던 고인은 100가지가 넘는 검사항목에 따르는 스트레스와 불량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긴장감에 시달렸고 ‘유해한 작업환경(소음)’ 기준인 80데시벨이 넘는 환경에서 일했다. 이에 △교대제 업무 △유해한 작업환경(소음)에 노출되는 업무 △정신적 긴장이 큰 업무 등에 노출됐다고 주장했지만 부산질병판정위에서 업무와 상병 간 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심씨 유족은 지난해 10월 재심사를 청구한 상태다.

노동부가 2017년 12월 만성과로 산재 인정기준을 개편하면서 주당 평균업무시간이 52시간에 미치지 못해도 피로를 가중하는 업무를 복합적으로 했을 경우 산재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됐다. 업무부담 가중요인은 △근무일정 예측이 어려운 업무 △교대제 업무 △휴일이 부족한 업무 △유해한 작업환경(한랭·온도변화·소음)에 노출되는 업무 △육체적 강도가 높은 업무 △시차가 큰 출장이 잦은 업무 △정신적 긴장이 큰 업무 총 일곱 가지다. 문제는 ‘복합적으로 했을 경우’에 대한 기준이 없다는 점이다. 공단 판정지침에 유형별 인정사례가 정리돼 있기는 하지만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탓에 질병판정위원의 재량에 기대야 하는 구조다.

권동희 공인노무사(법률사무소 일과 사람)는 “가중요인 하나하나에 대한 세밀한 판단이 이뤄져야 하는데도 (관성에 따라) 업무시간만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강하다”며 “특히 정신적 긴장이 큰 업무가 명확한 가중요인으로 신설됐지만 스트레스에 대해 소극적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심하다”고 지적했다.

산재승인율 2018년 8.7%포인트 반등한 뒤 정체
“가중요인에 대한 구체적인 판정 기준 세워야”

공단이 지난해 10월 발표한 ‘질병판정위 2020년 3분기 심의현황 분석’ 자료에 따르면 뇌심혈관질환 산재승인율은 개정 고시가 시행된 2018년 반등한 뒤로 정체돼 있다. 2018년에는 전년 대비 8.7%포인트 증가했다. 하지만 2018년 41.3%, 2019년 41.1%, 2020년(3분기) 38.9%로 40% 안팎에 머물고 있다. 전체 업무상질병 산재승인율이 각각 63%, 64.6%, 63.4%인 것을 감안했을 때 현저히 떨어지는 수치다.<표 참조>
 

 

현미향 울산산재추방연합 사무국장은 “뇌심혈관계질환은 다른 업무상질병에 비해 중증질환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큰 만큼 장기치료를 받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며 “산재승인을 받지 못했을 때 장기치료에 따른 경제적 부담과 생계문제로 인한 고통도 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현 사무국장은 “제도를 개선하기에 앞서 고시대로 업무시간에 비해 충분히 고려되지 못했던 여러 요인들의 종합적 평가가 반영된다면 낮은 산재승인율 문제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울산산추련은 지난 15일 부산질병판정위 위원장과 면담을 하며 뇌심혈관계질환 업무상질병 인정 관련 요구사항으로 △2018년 개정된 고시 기준을 제대로 적용 △업무부담 가중요인의 종합적 검토 △뇌심혈관계질환 낮은 산재승인율 문제 개선 △질병판정위원에 대한 교육 강화를 제시했다.

류현철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장(직업환경의학전문의)은 “세부적 기준 자체가 마련돼 있지 않아 질병판정위 인적 구성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가능성이 큰 만큼 가중요인을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판정할 수 있는 기준들을 세워야 한다”며 “나아가 소방공무원 등 특정 직종에서 발생한 뇌심혈관계질환은 산재로 인정하는 식의 직종에 따른 추정의 원칙 도입에 대해서도 고민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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