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글 싣는 순서
① 전태일과 나, 청년활동가
② 살아 있는 전태일의 오늘
③ 시다, 2020년 노동자


밤 9시를 넘으면 서울 중구 평화시장 3층의 가게 셔터가 하나둘 올라간다. 소매를 하는 1층과 달리 3층은 모두 도매가게다 보니 하루의 시작이 늦다. 밤 9시에 출근한 상인들은 다음날 오전 11시께까지 가게를 보다 퇴근한다. 더러는 매장 한쪽에 잘 곳을 마련해 잠을 자기도 한다. 코로나19로 손님이 뚝 끊겨 올해는 쪽잠을 자는 일도 많아졌다. 하릴없이 틀어 놓은 TV 채널에선 어느 젊은 트로트 가수가 고단한 삶을 노래한다.

익숙한 밤, 평화시장에서 40년을 지낸 이우영(76·가명)씨의 일과도 다르지 않다. 행신동에서 평화시장까지 출근한 뒤 몇 평 안 되는 가게 문을 열어 놓고 전기장판을 켠다. 혼자서 화투를 치거나 TV를 보고, 가끔 찾는 손님을 맞이한다고 한다. 최근에는 돈이 없다며 물건 대금을 치르지 않은 고객과 대거리를 하는 바람에 더 지쳤다.

충남 태안에서 열아홉 살에 무작정 서울행을 택했다. 1963년께였다. 고향에는 먹고살 것이 없었다. 먼저 서울로 간 세 살 터울의 형은 운 좋게 음식점에 취직해 돈을 벌고 있었다. 그를 따르고 싶었다. 1963년께 평화시장 가죽 의상 도매공장 일을 소개해 주겠다는 형의 말을 듣고 바로 상경했다. 평화시장은 붐볐다. 돈과 사람이 몰렸다. 일은 바로 잡히지 않았다. 한동안 여인숙에 머물러야 했다. 당시 하룻밤에 5원 하는 방을 빌렸다고 한다. 독방은 아니었다. 그처럼 일자리를 찾아 상경한 노동자들 여럿이 함께 묵었다. 20일 넘게 일자리가 생기지 않았다. 구두닦이라도 하려고 휴지를 모아 거리로 나갔지만 건달들에게 두들겨 맞았다. 고향에 내려갈 채비를 했다. 그러던 찰나, 취직이 됐다.

평화시장에 취직했다
100만원 모아 가게 차리겠다는 꿈


평화시장 일은 고됐다. 주당 70시간을 넘게 일했다. 처음 한 일은 다리미질이다. 재단사가 재단을 할 수 있도록 가죽이나 천을 펴고, 다 만들어진 치마에 주름을 잡는 일 등이었다. 숯을 담은 뜨거운 다리미를 들고 천을 누르다 옷감이며 가죽옷을 태워 먹었다. 일을 시작한 지 4개월 만에 “밥값도 못한다”는 얘기를 듣고 쫓겨날 뻔했다. 이씨는 사장 집으로 찾아가 빌었다. 일을 못 해 쫓겨났다는 소문이 돌면 평화시장에 더는 발을 붙이기 어려웠다. 빌고 또 빈 끝에 “잘 하라”는 얘기를 받아냈다. 더 열심히 일했다. 아침 6시부터 새벽 2시까지 일했다. 10년 안에 100만원을 모아 내 가게를 차리겠다는 꿈을 꾸며 버텼다고 한다.

박정희 정부가 경공업 중심의 수출전략을 펴면서 평화시장은 일감이 끊이지 않았다. 인근 신평화시장도, 동화시장도 없었던 시절이다. 옷감을 사거나 옷을 만들어 파는 곳은 남대문시장과 평화시장밖에 없었다. 일감은 많았고 구직자들은 줄을 섰다. 낮은 임금으로도 쉽게 노동자들을 부릴 수 있었다. 시다는 1천800~3천원, 미싱사가 되면 7천~2만5천원을 받는다. 재단 보조는 3천~1만5천원, 재단사는 3만~15만3천원. 이 시절 월 평균 임금이다. 전태일은 당시 박정희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루에 90원 내지 100원의 급료를 받으며 하루 16시간의 작업을 한다”고 썼다.

“키가 컸던 전태일”

“키가 컸다.” 이씨는 전태일을 이렇게 기억한다. 같이 깊은 대화를 나눠 본 적은 없지만 일을 하면서 자주 스쳤다. 그가 바보회를 조직한 것도, 여러 선행을 하고 있는 것도 알았다. 그렇지만 남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오로지 일만 했다.

1970년 11월13일. 옅은 진눈깨비가 내리던 그 날, 이씨는 전태일의 죽음을 봤다. 이후 평화시장에는 전태일에 대한 여러 험담이 떠돌았다. 이씨는 그런 말을 하는 이들을 꾸짖었다고 회고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좋은 사람, 훌륭한 사람이라고.

그러나 “노조는 싫었다”고 했다. 그는 노조를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노조는 8시간 넘는 노동을 금지하자며 사람을 모았다. 더 일하고 싶었던 그는 전기차단기를 내리는 노조 사람들을 보며 분개했다. 노조를 비난하고 폄훼하는 여러 소문이 돌았고, 그는 사실로 믿었다. 지금도 믿고 있다고 한다.

노조에 적대한 그도 사장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밥값도 못한다며 내쫓으려던 열아홉 그 어느 날 이후 사장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지난해 사장이 구순을 넘겨 사망하자 장례를 챙겼다. 지금도 그 일가와 연락하며 지낸다. “두 번째 아버지”라고 이씨는 강조했다.

▲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사회안전망 없고, 외면받는 고령층 노동
코로나19에 갇힌 영세 자영업자 … 노조 조력 받기도 어려워


이씨는 전태일과 다른 삶을 살았다. 전태일이 산화하고 몇 년 뒤 마침내 100만원을 모았다. 동화시장에 가게를 냈다. 60만원으로 가게를 얻었고, 신당동에 20만원짜리 공장을 냈다. 원단 등 원자재 값으로 20만원을 투자했다. 미싱은 빌렸다. 이씨는 “내가 열심히 일해 신용이 좋았다”고 했다.

결혼도 하고 서른네 살에 돈을 더 모아 부동산도 샀다. 성공한 인생이었다. 가게를 운영하며 중국과 수출 호재가 터지자 돈을 긁어모았다고 한다. 이씨는 “중국 보따리상이 수도 없이 오가면서 집 한 채는 떨어지더라”고 말했다. 왕십리에 큰 집을 샀다고 자랑했다.

쇠락은 스멀스멀 다가왔다. 인근에 다른 시장이 생기고 평화시장의 유행도 뒤떨어지면서 가게를 하나둘, 부동산도 하나둘 내놓았다. 아들은 둘이 있지만 여전히 결혼을 하지 못했다. 성공했다고 믿었던 인생은 이제 코로나19로 꽉 닫힌 평화시장 한쪽에 조그마한 가게를 두고 있을 뿐이다. 공장도 진즉에 접었다.

이씨는 현대사회에서 가장 강렬한 노동운동의 불꽃을 보고도 그와 무관한 삶을 살았다. 어쩌면 평화시장 노동자 대부분이 그랬을 것이다. 평화시장의 한 상인은 이렇게 말했다. “전태일 열사의 산화는 매우 뜻있고 의로운 일이었지만, 그게 평화시장의 모든 것을 바꾸진 못했다. 건물주로 구성된 평화시장의 지배구조는 공고했고, 그들은 지금도 평화시장 운영의 한 자리를 꿰차 높은 빌딩을 세우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그 구조가 깨지지 않는 한, 평화시장은 전태일을 서로 다르게 기억할 뿐이다.”

단기계약에 각서까지 써야 하는 경비노동자
보다 못해 노조 만든 박신행씨


박신행(67·가명)씨는 아파트 경비노동자다. 2013년 일을 시작해 7년째 일하고 있다. 아파트 경비노동자는 길어 봤자 1년을 일한다. 그래서 거의 매년 단지를 옮겨 다닌다. 그는 경비노동자의 생활을 묻는 기자에게 각서부터 보여줬다. 아파트 경비노동자 파견업체가 경비노동자에게 요구하는 것으로, 9가지 귀책사유를 나열했다. 이를 어기면 어떤 처벌도 감수하겠다는 내용에 서명을 해야 한다. 회사는 각서에 “경비근무를 적극적으로 수행해 경비업무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함”이라고 적었다. 박씨는 내지 않았다.

그는 새벽 5시30분께 출근한다.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뒤 단지를 살피고 쓰레기 수거차량이 비우고 간 음식물 쓰레기통을 닦는다. 쓰레기통 정리가 끝나면 아침 6시30분이다. 이후 아파트 현관 로비 불을 켠다. 오전 7시30분부터 1시간 동안 아파트 단지 게이트 통제를 하고, 다시 단지 안을 청소한다. 점심시간을 보낸 뒤엔 다시 게이트 통제를 하고, 아파트 단지 청소하는 일을 반복한다.

박씨는 직장을 다니다 58세 정년을 마치고 2011년 퇴직했다. 친구와 유통사업을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퇴직금으로 받은 돈을 거의 잃고 파산했다. 각종 기술 자격증이 있었지만 나이 때문에 재취업은 어려웠다. 그래서 찾은 일이 경비 일이다. 노동환경은 좋지 않았다. 감정노동에, 노동시간은 길고 임금은 적었다. 견디다 못해 최근 노조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동년배인 경비노동자 대부분은 노조활동에 부정적이거나, 하고 싶어도 잘 참여하지 않았다. 해고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박씨는 “3개월 계약을 맺고 아파트 주민의 눈치를 보며 거의 노예처럼 일하고 있다”며 “부당하다는 것을 알아도 대처하기가 쉽지 않고, 노조에 관심을 보이면서도 가입하려 들지 않더라”고 말했다.

대학 졸업하고 전무국 취직해 노조 가입
노조활동 중 “전태일은 잘 몰랐다”


그는 노조와 가까운 삶을 살았다. 1953년 태어난 박씨는 대학에서 전자학을 전공했다. 1972년 체신부 전무국에 입사했다. 당시 사업장엔 1958년 결성한 전국체신노조가 있었다. 입사한 노동자는 노조원으로 자동 가입했다. 바로 노조활동에 뛰어들지는 않았다. 전태일의 산화 소식을 이미 대학에서 접했지만 잘 아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체신노조 내에서도 크게 반향이 있지는 않았다고 한다. 박씨는 “직장노조이다 보니 당시 전태일 열사의 산화와 이후 벌어진 평화시장 노동운동에 대해선 잘 알지 못했다”며 “나중에서야 굉장히 어려운 일들을 겪었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1974년 군에 입대해 1977년 다시 복직했다. 당시 받은 임금은 월 2만8천원 정도다. 하는 일은 전화통신을 위한 기기를 관리하는 일이다. 하루가 바쁘게 커지는 경제 규모에 따라 통신량이 급증하고, 덩달아 업무도 많았다. 계속 새로운 기기 사용법을 배우고 관리했다. 회사의 도움으로 미국 기술연수도 1년이나 다녀왔다. 체신부 전무국이 담당했던 전기통신서비스업을 정부가 한국전기통신공사로 독립시키면서 사업장이 바뀌었을 때도 미국 기술연수를 다녀온 박씨를 포함한 기술자들은 엘리트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아쉬울 게 없었다.

노조활동에 본격적으로 발을 담그게 된 것은 선거 때문이다. 지부장선거에서 한 후보를 돕는 일로 시작했다. 박씨는 “민주노조 설립 논의가 노동계를 휩쓸던 시기였다”고 말했다. 그 역시 민주노조를 강조한 캠프에서 일을 시작했다. 이후 한국통신노조로 이름을 바꾸고, 민영화할 때까지 1989년부터 한 지부에서 4차례 지부장을 연임했다.

1995년 한국통신 파업 때도 그는 명동성당에 있었다. 2박3일 농성을 할 때다. 한국통신노조는 공기업 임금 가이드라인 철폐와 임금 현실화, 통신시장 개방 반대, 재벌 위주의 민영화 반대를 내걸고 쟁의행위를 했다. 정부는 국가 전복을 운운하며 노조간부 64명을 수배했다. 박씨 역시 수배를 당했고, 도피생활을 이어 갔다. 이후 파업 종결 뒤에는 회사에서 정직 6개월 징계를 받았다. 당초 해고 징계를 받았지만 앞서 사내 우수표창을 받은 사실이 참작돼 정직 6개월로 낮아졌다. 박씨는 “노조활동을 하면서 집에 거의 들어가지 못해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고 털어놨다.

박씨는 아파트 경비노동자로 새 삶을 시작하면서 앞선 회사와 경비원, 직장노조와 경비원노조의 활동을 비교하곤 한다. 생각했던 것보다 열악했고, 자신했던 것보다 힘들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시작한 노조가 더 커지고, 많은 노동자가 가입했으면 하고 바랐다. 그는 “노조는 꼭 필요한 조직”이라고 강조했다.

▲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유복했던 20대, 쉰 넘어 시작한 ‘가사노동’

이연목(69·가명)씨는 2007년 일이라는 것을 처음 했다. 서울에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세 살 터울 여동생이 있다. 70년대에 피아노를 치고 학원을 다니며 학비 걱정을 하지 않았다. 집에는 집안일 하는 언니까지 있었다. 그는 말했다. “전태일이 누군지 전혀 모른다. 지금도 잘 모르겠다.”

20대에는 신부수업을 했다. 대학에는 가지 않았지만 친구들과 어울려 음악다방도 다녔다. 그러다 남편을 만나 스물여덟 살에 결혼했다. 자녀는 셋이다.

남편은 사업을 했다. 이씨는 사모님이 됐다. 남편은 30년 넘게 어린이용 악기의 커버를 만드는 공장을 돌렸다. 나중에는 군대에 납품하는 세면백도 제작했다. 생활은 남부럽지 않았다. 그러다 사업이 망했다. 남편은 충격으로 2006년 폐암을 6개월 앓다 세상을 떴다. 면목동 단독주택에는 빨간딱지가 붙었다. 경매로 모든 것을 잃고 파산 신고를 해 겨우 채권추심을 멈췄다. 이후 2007년부터 학교와 병원 급식실 등에서 일했다. 파산면책으로 겨우 빚을 털어 냈지만 먹고살기 위해 친인척과 지인들에게 빌린 빚이 쌓였다. 닥치는 대로 일을 시작해야 했다.

그의 일은 최근에서야 노동으로 불린다. 근로기준법은 아직도 “동거하는 친족만을 사용하는 사업 또는 사업장과 가사 사용인에게는 적용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이씨를 부르는 이름은 아직도 “아줌마” “식모” “도우미”다. 그는 그게 몹시 싫다고 했다. 자신도 노동자라고 강조했다.

몸보다 마음을 더 다쳐
“나도 아줌마·도우미 아닌 노동자다”


가정에서 사용자와 일대일로 대면하며 하는 노동은 어렵다. 몸보다 마음을 더 다친다. 이씨는 그런 경험이 많다. 지난여름에는 구청 사업에 지원해 임산부 가정을 돌봐 주는 일을 했다. 집을 찾아가는 골목이 너무 가파르고 더워 마스크를 잠시 벗은 게 화근이 됐다. 이용자는 이씨가 마스크도 쓰지 않고 청소를 한다고 나무랐고, 곧장 구청에 민원을 제기했다. 그 일로 이씨는 임산부 가정 돌봄 사업에서 잘렸다.

한부모 가정을 돌보는 사업에서도 잘렸다. 우울증을 앓는 집주인이 그가 일을 마치고 퇴근한 뒤 구청에 또 민원을 넣었다. 이씨가 속옷바람으로 일을 했다는 것이다. 이씨는 억울함을 토로하고 화도 냈지만 역시 잘렸다. 그는 “가사노동자를 여전히 멸시하고, 마치 자신의 하수인인 양 대하는 태도가 불쾌하다”며 “나는 내 적성과 능력을 살려 일을 하고 이용자의 어려움을 해소해 주는 노동자”라고 했다.

그는 가사노동자를 위한 협회와 일을 내어주는 사회적협동조합이 든든한 버팀목이라고 말했다. 말할 곳이 있다는 것이다. 협회와 협동조합은 사회를 향해 끊임없이 가사노동자를 “관리자”로 호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활동이 이씨에게도 영향을 크게 줬다. 이씨는 언론에서도 가사노동자를 멸시하는 호칭을 쓰지 말고 관리자로 불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쉬운 것도 있다. 노조가 너무 ‘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반기지 않는다. 이씨는 노조가 왜 최저임금 인상에 열을 올리는지 모르겠다고 반감을 드러냈다. 최저임금이 오르면 중소 상인들이 어려워져 오히려 해고가 많아지지 않느냐는 것이다. 현장 노동자의 목소리를 받아 전달하고, 처우개선을 위해 이야기하는 데 더 집중해 줬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빈곤 시달리는 ‘전태일 세대들’

영원히 아름다운 청년으로 남은 전태일은 1970년 11월13일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자신의 몸에 불을 댕겼다. 만약 그가 생존했다면 우리 나이로 73세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65세 이상 고령인구는 812만5천명이다. 전태일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대학생들이 공장으로 들어올 때 손을 맞잡은 이들도 있지만, 또 다른 다수는 여전히 생존을 위해 쳇바퀴를 돌렸다. 그게 성공이고 인생이었다고 한다.

전태일과 동시대를 살았던 많은 이들이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 10월 한국금융연구원이 경제협력개발기구 자료를 분석한 ‘노인빈곤율 현황과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54~75세 빈곤율은 2017년 기준 43.8%다. 2013년에는 49.6%까지 치솟기도 했다. 노년을 맞이하기 전 주택구입·부채상환(53.2%)과 자녀 교육비·양육비(44.6%) 등으로 노후준비에 어려움을 겪고, 노년 이후에는 취약한 소득원과 이를 보조할 공적연금 제도가 닦여있지 않아 빠르게 빈곤층에 편입한다.

이들을 비껴간 노동운동도 탄탄대로를 걸었던 것은 아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8년 기준 국내 노조 조직률은 11.8%다. 노동자 100명 중 89명이 여전히 노조에 가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최근 몇 년간 오히려 노조 조직률 하락도 경험했다. 직장갑질119가 발표한 전태일 50주기 직장인 인식조사는 이 같은 노동운동의 정체와 고립을 잘 드러낸다. 직장갑질119가 만 19~55세 직장인 1천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 41.7%가 1970년과 대비해 현재 삶과 처우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고 응답했다. 5.2%는 더 악화했다고 응답했다. 좋아졌다는 응답은 46%로 나타났다. 평가가 반으로 나뉜 셈이다.

한석호 아름다운청년전태일50주기범국민행사위원회 집행위원장은 지난 노동운동을 반성적으로 바라본다. 한 집행위원장은 “임금과 사업장 위주 노동운동이 지금의 고립을 낳았다”며 “코로나19 확산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위해 노조가 더 나눔에 나서야 한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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