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 경기도 양평에서 전기원 노동자 이아무개(38)씨가 전봇대 이설 과정에서 역류된 2만2천900볼트 전기에 감전돼 숨졌다. 앞서 14일 전북 정읍에서는 활선차를 연결하는 안전핀이 빠져 차에서 작업 중이던 고아무개(43)씨가 떨어져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같은달 7일에는 백아무개(55)씨가 전남 구례 소재 14미터 높이의 전봇대 위에서 전선(사선) 교체작업을 하던 중 안전장치인 슬링바에 문제가 생겨 추락해 사망했다.

사고사실 숨기는 협력업체들

건설노조(위원장 김금철)에 따르면 5월에만 전기원 노동자 4명이 사망하고 1명이 중태에 빠졌다. 노조는 배전협력업체가 한국전력공사의 배전안전수칙을 어기고, 한국전력공사 또한 이를 관리·감독하지 않아 발생한 사고로 보고 있다. 한전이 안전지침만 마련해 놓은 채 관리·감독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노조는 특히 "한전이 안전사고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배전현장에서 사고가 나면 한전의 도급을 받은 협력업체는 한전에 즉각 보고해야 한다. 그러나 협력업체들은 한전에 이를 보고를 하지 않았다. 제재를 받기 때문이다. 한전은 노조가 문제를 제기하고 나서야 뒤늦게 사고사실을 알게 된 것으로 전해졌다.

전봇대나 변압기처럼 한전 설비에 이상이 생기는 사고가 발생할 경우 시스템상 한전이 안전사고를 감지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밖의 사고는 제재를 우려한 협력업체들이 따로 보고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제재 벌점으로 인해 공사 입찰시 불이익을 받기 때문에 산재사고는 곧잘 은폐된다. 협력업체와 '을'의 관계인 전기원 노동자들은 소속 업체가 공사를 따내지 못하면 곧바로 실업 상태에 놓인다. 사고가 나더라도 문제를 제기하기가 쉽지 않다.

 


노동자 희생 위로 흐르는 전기

일상적인 전기 공급 뒤에는 전기원 노동자들의 소리 없는 희생이 있다. 국내 배전현장의 안전 관리·감독은 한전이 담당한다. 그런데 한전이 안전 문제를 협력업체에 떠넘기고, 최소한의 비용을 들여 공사를 최대한 빨리 마쳐야 하는 협력업체들은 배전안전수칙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규정을 어긴다고 해도 한전의 내부 규율인지라 법적인 책임을 묻기도 어렵다. 최근 잇따른 전기원 노동자들의 사망사고가 우연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필연이라는 얘기다.

노조는 배전안전수칙을 법제화하고, 한전이 전기원 노동자들과 정례협의회를 구성해 안전수칙이 현장에 정착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기원 노동자들의 사고는 안전수칙 준수 여부 외에도 한전의 정책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실제로 한전은 협력업체의 상시 보유인원 기준을 완화했다. 이에 따라 작업시 의무적으로 보유하는 인원이 줄어들었다.

노조 관계자는 “한전이 협력업체 인원을 점검할 때 대부분의 업체들은 서류상으로 인원을 늘려 짜맞춰 놓는다"며 "적정인원을 보유하지 않는 한 안전 문제를 담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적정한 인원이 투입돼야 시간에 쫓기지 않고 안전 문제에 제대로 신경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위험천만한 작업공정

전기가 흐르는 가운데 작업하는 이른바 '무정전 공법'에 대한 비판도 제기된다. 노조에 따르면 전기를 끊지 않고 공사를 진행하는 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한국이 유일하다. 대부분 현장에서 공사비용·기간 절감과 소비자 편의 등을 이유로 전기를 죽이지 않은 채 공사를 진행한다. 감전사고로 인한 사망률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월등히 높은 이유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의 국가별 감전재해 사망률(2007)에 따르면 노동자 1백만명당 감전으로 인한 사망자수(백만인율)는 한국이 6.33으로 일본(0.45)의 14배, 영국(0.68)의 9배, 미국(1.72)의 4배에 달했다. 윤경식 노조 전기분과위원장은 "예산을 감축한다는 미명 아래 안전을 무시하는 무정전 공법으로 인해 일상적으로 생명을 걸고 일하는 전기공사 현장은 한국이 세계에서 유일하다"며 “사고를 당해도 공개적으로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답답해했다.

정례협의로 현장 목소리 담아야

협력업체와 전기원 노동자들은 본질적으로 '갑과 을'의 관계에 놓여 있다. 안전대책을 요구하는 현장의 목소리가 공론화되기 힘든 구조다. 박종국 노조 노동안전보건국장은 “현장의 목소리를 상시적으로 전달하고, 무력화된 안전수칙이 현장에 안착될 수 있도록 한전과 현장 노동자들이 정례협의체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전은 이와 관련해 "직접적인 고용당사자가 아니다"며 노조의 면담요청을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윤경식 전기분과위원장은 “지금과 같은 구조에서는 전기원 노동자들의 안전사고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며 “한전이 하지 못하면 현장 노동자들이 안전 관리·감독에 관여할 수 있도록 전기원 노동자들에게 명예산업안전감독관의 권위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노조는 8일 한전을 방문해 면담요청과 함께 이 같은 내용의 서한을 전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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