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5년 1월 고령화 문제가 사회 문제로 대두되자, 정부는 노후소득 확보를 위해 기존 퇴직금제도를 대신해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하는 내용의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을 제정했다. 사업장별로 퇴직금제도·확정급여형(DB) 퇴직연금제도·확정기여형(DC) 퇴직연금제도 가운데 한 가지 이상을 노사 합의로 선택할 수 있게 했다. 정부는 당시 "급격한 고령화 추세에도 불구하고 기업의 적립의무 불이행 등으로 퇴직금제도가 개인 차원의 노후생활을 준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며 "퇴직연금제도가 노동자들의 취약한 노후생활 준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퇴직연금제도가 시행된 지 5년이 지난 지금, 제도의 효과에 대한 성적표는 초라하다. 노동부의 퇴직연금제도 도입현황(2010년 3월 말 기준)에 따르면 5인 이상 전체 상용근로자(773만9천913명) 중 퇴직연금에 가입한 노동자는 36.92%인 285만6천863명에 불과하다. 500인 미만 사업장의 경우 99.5%(7만4천885곳)가 퇴직연금을 도입한 반면 500인 이상 사업장의 경우 도입률이 0.5%인 409곳에 불과하다.<표 참조> 적립금 규모도 약 16조3천612억원에 머물러 있다. 급격한 고령화에 따른 높은 사회적 관심을 고려할 때 턱없이 적은 수준이다.
 


노조 참여 봉쇄로 대형사업장 외면

퇴직연금 도입률이 저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권순원 숙명여대 교수(경영학부)는 “노조의 동의를 필수요건으로 하고 있지만 기존 퇴직금제도와 퇴직연금제도의 사업장 내 선호도가 충돌함에 따라 결정이 어렵고, 노사 모두 관련 제도에 대한 정보부족으로 제도 도입이 지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제도는 사업장별로 한 가지 제도만 시행하고 있어 고용형태가 다양화되고 이에 따른 선호도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홍보와 연구부족으로 인해 노동자 개인에게 적절한 모형 제시와 평가가 이뤄지고 있지 않다는 게 권 교수의 설명이다.

특히 500인 이상 사업장에서 도입률이 극히 저조한 것과 관련해 현행 제도하에서 노조의 개입이 사실상 차단돼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적지 않다. 우리나라의 경우 제도 도입 여부나 유형을 선택할 때만 노사합의를 거치도록 돼 있다. 제도운영 단계에서는 사실상 참여가 봉쇄돼 있다.

김창희 함께하는경영참여연구소 정책실장은 “외국의 경우 사업장 내에서 노사가 협상을 거쳐 전문컨설팅 회사에서 컨설팅을 받은 후 요구사항을 금융회사에 전달하면 이에 맞는 상품을 개발한다”며 “우리나라에서는 사업장 특성이나 노사의 개입이 차단된 채 기존 금융회사의 상품을 일방적으로 도입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철저하게 기업 입장에서 설계된 기존 상품에 대한 거부감이 노동계의 반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김 실장은 “우리나라는 정부가 나서 노조의 개입을 차단하고 있다”이라며 “퇴직연금 운용에 가입주체인 노조의 참여를 보장한다면 지금보다 가입률을 높이고 제도 취지를 살리는 데 효과적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예컨대 미국의 경우 연금운용과 관련해 노조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으면 노사분규가 발생하기도 한다.

호주 산업별 기금, 지역사회 발전 기여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에 따르면 외국의 경우 퇴직연금 운용에 있어 노사 대표의 참여가 보편화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덴마크·네덜란드·핀란드 등에서는 산업별로 노사 대표가 제도설계와 기금운용에 참여한다. 기업연금 가입이 의무화돼 있는 호주·칠레·홍콩 등은 국가 차원에서 노사 참여를 보장한다. 임의가입을 채택하고 있는 미국과 영국에서도 노조가 있는 회사들은 단체교섭을 통해 연금 운용에 개입한다. 반면에 IBM·HP 등 노조가 없는 회사에서는 그렇지 않다.

눈에 띄는 나라는 호주다. 호주에서는 노조가 산업별연금 설립을 주도했고, 운용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호주 금속노조의 산별퇴직연금을 설계한 황규만 머서(MERCER) 컨설팅 수석컨설턴트에 따르면 호주의 경우 대부분 산업별연금 운용을 위한 신탁관리위원회가 구성돼 있다. 노조와 사용자가 각각 동수의 신탁관리자를 지명한다. 사용자가 임명하는 신탁관리자는 회사측과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황 수석컨설턴트는 “산업별연금은 노조 조직화를 촉진하기 위한 마케팅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며 “지역사회에서 다양한 역할을 함으로써 노조에 대한 이미지를 높이는 데 일조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 밖에 산업별연금이 투자된 기업에서는 노조가 주주로서 영향력을 행사한다. 산업별연금은 해외보다 호주 내의 투자를 우선하고 있어 국가 경제에서도 상당한 역할을 한다.

우리나라도 퇴직연금제도가 도입된 뒤 민주노총 사무금융연맹을 중심으로 노동계 참여와 업종별 특성을 반영하는 산업별연금 설립을 추진하기도 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런 가운데 최근 민주금융노조 등을 중심으로 노동자펀드 설립이 다시 시도되고 있다.
황규만 수석컨설턴트는“한국은 퇴직연금제도의 과도기에 놓여 있다"며 "이럴 때일수록 노조나 노동자들이 퇴직연금을 객관적으로 정확히 이해하고 한 목소리를 내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퇴직연금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노조의 참여보장과 함께 연금 유형을 다양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권순원 교수는 "퇴직연금 유형을 노동자별로 최적화하기 위해서는 우선 노동자들이 제도를 이해해야 한다"며 "퇴직연금제도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1차 이해관계자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황규만 수석컨설턴트도 "퇴직연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한국 노동자의 근속연수와 평균수명 등 현실을 정확히 바라보는 게 우선”이라고 말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08 OECD 건강데이터’에 따르면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79.1세를 기록했다. 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한국 노동자의 평균 근속연수는 5.9년이다.
그는“호주는 90년대부터 임금인상률이 많이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한국도 이 같은 호주의 추세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90년대 초부터 지난해까지 한국의 평균 임금인상률은 6.6%였는데, 2000~2009년에는 평균 5%를 넘지 못했다.

한국의 임금인상률이 과거처럼 7~10%면 퇴직금이 유리하지만 과거보다 미래에 임금인상률이 떨어질 것이라고 봤을 때는 DC형도 고려해 볼 만하다는 것이다. 다만 그는 “임직원이 이런 트렌드를 파악하고 독립적인 전문가를 통해 퇴직연금의 다양한 형태 중 가장 적당한 것을 선택해 첫 단추를 잘 끼우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신현경·오재현 기자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