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아빠가 자랑스러워요

2009년 6월 24일 - 박영숙 - 

퇴근하고 애들하고 저녁을 먹다가 딸내미가, “엄마, 선생님이 아빠는 지금 뭐 하시냐고 물었어.” 하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딸이 “예? 아빤 평택에 있는데요” 하니, 선생님이 다시 “몇 시에 들어오시니?” 물었고, 딸은 “안 들어오시는데요” 대답했대요. 흐윽, 갑자기 목이 메이더군요.
그런데 옆에서 숟가락질하던 중학생 아들이 하는 말이, 선생님들이 “너희 아빤 어떻게 되셨니?” 하고 물었다더군요. 우리 아들이 “아빤 아닌데요, 그분들하고 함께하러 평택에 가셨어요”라고 말했더니, 선생님께서 어깨를 두드리시며 “열심히 해라”라고 하셨답니다. 그런데 아들이 “엄마, 그 말 하는데, 나 갑자기 아빠 생각 많이 나데. 그리고 아-참, 기분이 이상하데요”라고 말하더군요.
뭔지 모르지만, 잠시 정적이 흘렀어요. 우린 계속 숟가락질을 하고 있었지만, 무언가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더군요. 아들이 하고 싶은 말 알 것 같아요.
“아빠가 자랑스러워요.”
“아빠가 자랑스러워요.”
 
16. 모진 땅에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민들레처럼

2009년 6월 22일- 장정란 -

우리 가족은 민들레예요. 모진 땅에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민들레!
연세가 72세지만, 결혼도 못한 큰아들(35세)이 쌍용자동차에서 5월 말에 해고를 당했고, 2008년 11월 삼성 하청업체에서 해고를 당한 막내아들(31살)을 끼고 사시는 우리 엄마. 그래도 아들을 위해 또 한 번 힘을 내주세요.
20년 전 1988년, 엄마는 52세의 나이에 15살, 12살, 10살의 우리를 데리고 무서운 아빠를 피해 단돈 15만 원을 가지고 밤이슬을 밟으며 그저 살기 위해 무작정 걸었습니다. 아빠의 폭력을 피하기 위해 전학도 못 시켰고, 먹고 살기 위해 엄마는, 큰아들(15세)은 영광의 오뎅공장, 둘째(12세)는 서울의 봉제공장으로 보내고, 막내(10세)만 데리고 식당일을 하셨습니다. 엄마는 그런 때에도 희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래도 공부는 시켜야 하는데, 자식들을 오뎅공장, 봉제공장으로 보내면서 한없이 우셔야만 했던 엄마. 우리들이 어찌 살았는지는 하나도 생각이 안 납니다.
공장생활을 한 지 6년이 지났습니다. 어느 날 새벽, 그래도 공부는 해야 이 험한 세상을 살 수 있으니 야학이라도 다니자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때부터 때늦은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16세의 나이로 초등학교, 중학교 검정고시를 1년여 기간 동안 끝내고 고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오빠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공부를 못했을 것입니다. 다행히 야학 선생님이 대학 입학금을 대줄 테니 대학을 가라고 힘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오빠가 택시를 운전해서 저의 대학 등록금을 대주었습니다. 오빠는 중학교 1학년을 중퇴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15살부터 일을 해온 오빠의 도움으로 간호대학을 마치고 대학병원에 취직해 고생하는 오빠와 엄마에게 작은 힘을 보탰습니다.
택시를 해서 저의 학비를 대준 오빠에게 어느 날 제가 말했습니다. “오빠, 늦었지만 그래도 공부를 시작해. 늦지 않았어! 내가 이제는 오빠를 도와줄게.” 그렇게 해서 오빠가 27세 나이에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일을 하면서 말이지요.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의 야학을 마치고, 오빠 나이 29세에 드디어 2년제 야간 대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낮에는 택시를 몰고 밤에는 공부를 했지만 좋은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여, 31세에 쌍용자동차에 정비사로 취직을 하였습니다. 너무도 기뻤습니다. 그때 엄마 나이는 68세였습니다. 정말 너무 자랑스럽고 착한 오빠가 그동안 고생한 보람이 있어 행복했습니다. “내가 고친 자동차가 움직인다는 것에 보람을 느끼고 재미가 있어” 했던 오빠였습니다.
그러나 궂은일 마다하지 않고 고생만 하신 엄마에게 또다시 큰 시름이 생겼습니다. 엄마 연세가 72세인데, 오빠가 35세가 되도록 결혼도 못하고, 쌍용자동차가 위기를 맞아 5월 말 해고통지를 받은 것입니다. 너무나도 고생스럽고 힘든 인생인데, 오빠의 노력만으로 이룬 꿈이 무너졌습니다. 이를 본 엄마 또한 식음을 전패하고, 걱정 근심에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아들을 못 본 지 한 달이 다 되어갑니다.
정말 가슴 아픕니다. 비빌 언덕도 없는 오빠에게 찾아온 해고, 실업이 우리 가족을 또 한 번 위기로 몰아넣었습니다. 20년을 노력하며 살아온 오빠에게 돌아온 것이 해고라니요. 누구보다도 노력했고 성실했고 정직한 오빠이기에 더욱 안타깝습니다. 어머니를 위한 마음은 그 누구보다 효자였고, 오빠로서는 다정다감했고, 남동생에게는 든든한 후원자였던 오빠입니다.
회사의 자동차 판매가 잘되어야 오빠도 일을 잘할 수 있어 2007년도에 ‘액티언’으로 차를 구입해 타고 있습니다. 오빠 또한 차를 구입할 형편이 안 되었으나 회사를 위해 ‘로디우스’를 구입했습니다. 결혼도 해야 하고, 집도 구해야 하는데, 오빠는 회사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런 오빠에게, 우리 가족에게, 회사는 부당해고로 보답을 한다는 것입니까? 이 위기를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게 오빠에게 힘을 주세요.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엄마! 지금보다도 더 어렵게 생활할 때도 있었잖아요.
엄마는 제때 공부 못 시켰다고 마음 아파하시지만 엄마의 사랑과 믿음으로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어요. 몸도 마음도 많이 지친 엄마, 그래도 힘내세요. 막내는 취직할 것이고, 오빠는 직장 복귀하고 결혼도 할 것이니 희망을 가지세요.
오빠는 쌍용자동차 정비지부 광주분회 정비사입니다! 자신이 자랑스러워했던 회사이기에 더욱 힘을 내어 오빠는 원하는 것을 당연히 얻을 것이라 믿습니다.
 
17. 눈물로 호소합니다

2009년 6월 25일- 고향언덕 -

옥쇄파업 34일째, 우리는 피가 말라갑니다.
용역깡패 강제 진압이라는 소식에 하루하루 신경안정제로도 진정되지 않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눈물이 마르고 피가 말라갑니다. 우리가 우리끼리만 살자고 몸부림치는 것이 아닌데, 모두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정부와 사측에 이야기했는데…. 왜 사측은 용역깡패를 동원해서 남편들을 죽이려 하고, 왜 정부는 귀를 막고 입을 막고 있습니까? 그것도 모자라 반쪽만 살려놓고 죽은 반쪽과 싸우게 만들려고 합니까?
우리 남편이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이 나라 노동자들은 무슨 죽을죄를 지었기에 용역깡패에게 칼을 맞아야 합니까? 쌍용자동차 망하게 내버려 두고 구경만 한 자들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바로 상하이 자본과 사측과 정부 아닙니까?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없다 큰소리치던 관리자들, 정리해고 되는 일이 있으면 앞장서서 사표 쓰겠다던 관리자들, 당신들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왜 남편이 죽어야 하며 우리가 피가 말라가야 합니까? 이제는 더 이상 호소만 하지 않겠습니다. 남편과 함께 마지막 싸움이다 결단하며, 창원과 평택, 서울을 오가며 집을 버리고 거리에서 농성하며, 국민들을 만나고 정부에게도 요구하며 이 악물고 싸우겠습니다. 창원공장에서 살아남아서 일하고 있는 아주버님과 도련님들, 제 목소리 들리나요? 당신들을 원망하고 탓하고자 우리가 여기에 찾아온 거 아닙니다. 한솥밥 먹고 지내온 죽은 형님 아우들, 형수 처제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일은 하지 말아 달라고 호소하러 왔습니다.
오늘 사측의 관제 데모에 평택으로 동원되어 올라간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이미 떠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 공장에 있다면 아주버님과 도련님들, 제 목소리 들리나요? 함께 삽시다. 우리는 싸워서도, 등을 돌려서도 안 됩니다. 함께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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