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겨우 2년이란다. 3년이나 남았다. 이명박 집권의 세월이다. 중간을 넘기면서 우리는 민주주의가 얼마나 고통 속에 빠지고 있는지, 사회적 양극화로 말미암아 가난한 사람들의 희망이 몰수되고 있는지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다. 경찰은 권력의 무기가 된 지 오래고 여당은 거수기의 역할에 충실하다. 파시즘은 시대마다 다른 얼굴을 하고 나타나는데, 2010년 대한민국은 이명박 정권이라는 면모로 그 정체를 드러내고 있다.

도대체가 소통이라는 것이 없다. 일방적 결정에 따른 업무수행만 요구한다. 그러면서 민주주의와 토론에 따른 합리적 결정은 기대할 수 없게 됐다. 일체의 집회와 시위는 모두 단속대상이다. 거리에서 외치는 것이 불법이 된 세상에서 민주주의는 질식한다. 나만 말한다, 너희는 입 다물어라, 이게 이명박 정권의 신조다. 한번 결정하면 그것은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한 지도자의 고독한 결단이니 문제를 제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면서 나라 안은 생동감 넘치는 에너지가 사라지고 있다. 그냥 버티고 있을 뿐이다. 진보진영의 대연합 내지 단결이 외쳐지고 있지만 눈에 보이는 성과는 별반 없다. 지방선거가 코앞에 닥쳐야 부랴부랴 열들을 내고 나설 모양이다. 늘 이런 식이다. 그래서 국민대중은 정치에 희망을 걸지 않는다. 진보진영은 관심대상에서 누락되고 있다. 힘이 없다는 거다. 또한 누가 해도 비슷하다고 여긴다. 포기상태다.

물론 선거가 가까워오거나 선거 중이면 열들을 올릴 것이다. 그러나 그때 뿐이다. 국가의 중핵을 거머쥐고 긴 안목으로 나라의 장래를 도모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이런 와중에 잠깐 인기를 모으거나 정세에 편승해 표를 얻는 자들이 지배자로 군림한다. 국민들은 선거에만 잠시 동원되는 수단에 불과해진다. 선거는 국민들에게 좌절감만 안겨 주는가. 그래서 투표율은 자꾸 떨어진다.

가관인 것이 이 정권은 동계 올림픽의 성적도 자기 성적으로 내세우고 있다. 국민들의 노력과 성원에 대한 존경과 치하 대신 자기 업적 과시가 이명박 정권의 장기다. 그러면서 국민들의 공을 자기가 가로채고 있다. 가로채고 있는 것이 어디 그뿐인가. 국민의 재산, 공공영역의 이익, 이런 것들을 국가의 권력의 대자본에 의한 사적 재산으로 만들기 위해 혈안이다. 그런데도 국민들은 덤덤하다. 분노하지 않는다. 하도 그런 것을 많이 봐서 그런가.

언론과 방송은 국가 권력과 삼성이라는 대 자본의 휘하에 들어간 지 오래다. 한겨레와 경향신문도 삼성이라는 거대한 자본 앞에서 움츠러들고 있다. 자본에 대한 비판은 말로만 존재한다. 이게 우리의 현실이다. 돈이 없으면 죽는다는 그런 뼈저림 때문에. 저항은 여기까지, 라는 선이 그어져 있다. 이명박 정권이 사라진다고 해서 우리 형편이 나아질 것이라고 장담하기 어려운 이유가 무엇인지 명료해진다. 그러면 물러서야 하는가.

톨스토이가 쓴 바보 이반 이야기에서 바보 이반이 황제가 돼 다스리는 나라는 돈이 없고 군대가 없으며 손에 살이 굳게 박힌 사람만 식탁에 앉을 수 있게 돼 있다. 노동의 가치를 최대한 존중하는 나라다. 돈에 매달리지 않는 사회의 힘이 무엇인지 보여 준다. 자본주의가 파고들 여지가 없는 이상향의 모습이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런 이상향을 꿈꾸기에는 너무나 치열하고 절박하다.

우리는 돈이 없는 자로 짓밟히고 능멸당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법은 돈에게 친절하다. 언론도 그렇다, 권력은 더욱 친절하다. 우리는 그 친절이 폭력이 되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중이다. MB 2년은 그런 세상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면서 여기서 어찌해야 할까.

아주 작은 걸음도 큰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정 안 되면 담벼락에다 대고 욕이라도 해야 한다고 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시크릿'이라는 책이 한참 돌풍을 일으켰다. 바라는 바를 끌어당기는 기운을 뿜어내고 그걸 계속 생각하면 그 생각이 실제로 이뤄진다는, 이른바 성공공식의 책자다. 이 책에는 그 바라는 바에 대한 윤리적 판단이나 철학적 고뇌는 없다. 그저 성공하면 된다는 식이라 문제가 많은 책이다.

하지만 단 하나 진실은 말하고 있다. 바라는 바를 끌어당기는 힘을 가지려 할 때, 그와 관련한 것들이 하나하나 모이기 시작하고 결국 그 힘이 현실의 능력을 가지게 된다는 점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인데 그걸 '시크릿'이라고 하니 사람들이 혹했던 모양이다. 내 안에서 자장을 일으키고 그 자장이 우리가 이 나라에서 원하는 목표에 대한 기운으로 진화하는 과정, 이건 기도일 수도 있고 갈망일 수도 있으며 그래서 그 기운으로 하나가 돼 가는 과정일 수 있다.

구하라, 두드려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열릴 것이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그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2천년 전 팔레스타인의 청년 예수가 새로운 꿈과 미래를 위해 나서는 이들에게 했던 말이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로 오늘의 우리 현실에서 여전히 옳은 이야기다. 우리의 구함, 우리의 두들김이 너무 약한 것은 아닐까. 그 나라와 의에 대한 소신과 의지가 시들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마음 합쳐 기도할 때다. 그 기도는 우리의 마음, 우리의 영혼에서 강력하게 뿜어져 나오는 역사에 대한 확신이다. 작은 일상과 작은 걸음 하나가 길을 뚫어 낸다. 일상의 소소한 현장에서도 투쟁의 의지를 접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것이 혁명의 실천이다. 혁명은 갑자기 오는 것이 아니라, 그런 혁명의 순간들이 모이고 모여 결정적 차원을 여는 열쇠가 되는 것 아닌가. 거듭되는 실패가 있다 해도 그 실패가 진전의 교훈이 되고 그 교훈이 혁명의 능력이 되고야 말 것이다. 2년 동안 배우지 않았는가. 3년은 그 교훈의 실천이 이뤄지는 세월이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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