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야말로 가장 낮은 사회적 계급에 속한 사람들이었고, 저용량의 화학물질에 만성적으로 노출된 희생자들이었다. 이 사회의 시스템에는 화학물질 노출이 있었는지, 어떤 사업주가 그렇게 만들었는지, 과연 그 노출이 질병의 유일한 원인이었는지를 밝혀야 할 책임을 노동자와 그 가족들에게 부담시키는 계략이 분명히 숨겨져 있다.”

언뜻 보면 삼성반도체 백혈병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아니다. 서부 스코틀랜드 '그리녹'이라는 마을에 있는 다국적 반도체회사 내셔널반도체 생산공장 노동자들의 이야기다. 내셔널반도체에서 일하다 암에 걸린 노동자들은 지역노조 등의 도움을 얻어 지난 98년 영국에서는 처음으로 반도체 노동자들의 안전·보건 문제를 세상에 알렸다.

“노동자와 그 가족들은 회사가 갖고 있는 그 어떤 정보도 활용할 수 없고, 보건 지원체계는 비참할 정도로 부족하며, 법적 절차들은 끔찍하게 복잡하고 돈도 많이 들어가는 것” 또한 놀랍도록 한국의 현실과 닮아 있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이 최근 ‘Challenging The Chip-세계 전자산업의 노동권과 환경정의’(테드 스미스 외 지음·공유정옥 외 옮김·메이데이·2만5천원·사진)를 번역해 출간했다. 이 책은 전 세계 반도체 공장에서 노동·환경보건을 위해 투쟁했던 각국의 사례를 최초로 묶은 책으로, 2002년 ‘기술의 사회적 책임을 위한 국제운동’이라는 단체가 주최한 국제토론회에서 발표된 15개국의 사례를 모은 책이다. 반올림이 결성되기 1년 전인 2006년 발간됐다. ‘전문 번역가를 구할 만한 조건이 아니었기 때문에’ 공유정옥 반올림 활동가를 비롯해 학생·연구원·의사 등 15명의 다양한 사람들이 번역에 나섰다. 옮긴이에 따르면 이 책은 “세계 반도체·전자 산업의 노동권과 환경정의의 문제를 망라한 최초이자 거의 유일한 단행본”이다.

미국의 IBM·대만의 RCA(전자업체) 노동자들이 ‘굴뚝 없는 청정산업’이라는 신화를 깨고 전자·반도체 산업의 직업성 암에 대해 첫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작업장에서 건강하고 안전하게 일할 권리는 인권의 핵심’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노동자 스스로 침묵을 깨는 과정은 삼성반도체 노동자들과 비슷하다. 이들 사업장에 노조가 없다는 점도 판박이다.

이 책을 통해 미국에서 첨단기술산업의 생산공정에서 유독화학물질을 없애기 위해 20년 동안 활동해 온 ‘실리콘밸리 독성물질 방지연합’(SVYC)과 20년 이상 독성 화학물질에 노출된 전자산업 노동자들을 전문적으로 변호해 온 미국의 아만다 허즈 변호사의 활약상과 성과도 엿볼 수 있다. 허즈 변호사는 “노동자를 발암물질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조치들을 취하기 싫다면, 이에 대한 명백한 대안은 발암물질 사용을 즉각 중단하는 것뿐”이라고 강조한다.

반도체를 생산하는 데 사용하는 화학물질의 종류가 1천가지를 넘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처럼 일터에 존재하는 유해물질은 곧 지역사회에 영향을 끼친다. 이 책은 다국적 전자산업이 작업장에서나 지역사회에서 지속가능한 환경을 만들도록 올바른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국제적인 연대와 실천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한 지역에서만 노동조합을 조직하려다 보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도 않고, 회사들이 이에 맞서 공장을 옮기거나 해고해 버리겠다고 위협할 여지를 남기고는 한다. 하지만 특정기업이 경영하고 있는 세계 모든 지역에서 국제적 협력을 통한 조직화 운동을 펼친다면, 어느 한 지역의 공장에서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방식보다 훨씬 더 대중적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수익금의 일부는 최근 백혈병이 재발해 투병 중인 삼성반도체 노동자 박지연씨의 치료비에 지원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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