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이 위기라고 합니다. 그것이 자본의 위기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노동의 위기에서 파생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올해는 경제위기 한파가 일자리를 끊임없이 위협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매일노동뉴스>는 노동운동의 위기를 극복하는 해법이 ‘현장’에 있다고 믿습니다. <편집자>

지난 6일 오전 서울 강남구 한국감정원 종합상황실 회의실. 김주현(28) 부동산조사처 부담당역(대리)이 등기부등본과 건축물대장 등 미리 준비한 사전조사 결과물로 브리핑을 시작했다. 부동산조사처 직원 4명이 김 대리의 브리핑을 유심히 듣고 있었다.
김 대리가 이날 조사를 맡은 곳은 강남구 삼성동의 ‘아이파크아파트’다. 지난해 공시지가 기준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다. 269제곱미터(약 81.5평) 아파트의 거래가격이 100억원에 달한다.
“본 단지는 총 3동 449세대로 구성된 아파트로서 2004년 3월18일 사용승인됐습니다. 269제곱미터 41층의 실거래가는 100억원이며, 145제곱미터 18층의 실거래가는 24억원입니다. 다음에 보실 자료는 호별 위치도와 조망 등을 반영한 가격입니다.”


다가오는 한파, “현장을 돌아야 할 때”

공동주택은 아파트·연립주택·다세대주택을 말한다. 한국감정원은 지난 2005년부터 공동주택가격의 공시를 위한 조사업무를 하고 있다. 한국감정원은 당시 다세대주택과 중소형 연립주택 167만호의 가격을 결정·공시했다. 2006년부터는 아파트를 포함한 전국 871만호의 공동주택 가격을 공시하기 시작했다. 가격정보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세금을 부과하는 자료로 활용된다. 공동주택가격은 매년 1월1일을 기준으로 하며, 4월 말에 발표된다.

입사 3년차인 김 대리는 올해로 3번째 공동주택가격 조사·산정 업무를 하고 있다. 본격적인 현장조사는 매년 11월 중순에 시작된다. 현장조사는 등기부등본·건축물대장 자료와 이미 나온 가격자료 등을 참고로 한 사전조사 결과를 발로 뛰며 검증하는 절차다. 사전조사가 책상 위에서 이뤄진다면, 현장조사는 길거리 위에서 이뤄진다. 김 대리는 “겨울에 본격적인 현장조사를 하는 감정원 직원들은 날이 추워지면 '이제 슬슬 현장을 돌아야할 때가 왔구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현장조사는 매년 11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이어진다. 김 대리도 이날 사전조사 브리핑을 마친 뒤 한 손에 사전조사 자료를, 다른 손에는 카메라를 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필수준비물은 '자양강장제'

김 대리는 감정원에서 도보로 30여분 거리에 있는 강남구 삼성동 아이파크아파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도면을 들고 각 호수를 돌며 조사해야 하지만, 요즘 고급아파트의 경비실 문턱을 넘기는 좀처럼 쉽지 않다. 외부인의 방문에 폐쇄회로(CC)TV가 설치된 아파트에서 조사를 위해 사진이라도 찍고 있으면 ‘왜 사진 찍냐’는 핀잔을 듣기 일쑤다. 한국감정원에서 나왔다고 해도 협조를 받기가 쉽지 않은 경우가 다반사다.

결국 김 대리는 인근의 부동산 중개업소의 문을 두드렸다. 부동산 중개업소를 방문해 거래가격과 거래상황 등을 조사하는 것도 업무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한국감정원은 전국 5천여개의 부동산 중개업소를 회원으로 두고, 전화와 팩스를 통해 부동산 가격정보를 조사한다. 회원 중개업소를 대상으로 1년에 두 차례 교육도 실시한다. 그러나 부동산 중개업소 입장에서는 ‘도움될 게 없는 손님’일 뿐이다.

김 대리는 부동산 중개업소 사장에게 건넬 자양강장제 한 박스를 손에 들고 있었다. 보통 두꺼운 외투에 등산화를 신고 다니는데, 아직 쌀쌀하지 않은 날씨 덕에 오늘은 말끔한 양복을 입었다. 중개업소 사장에게 한국감정원 직원이라고 소개한 김 대리가 “요즘 시세는 어떤가요”라며 말을 건넸다.

“2007년과 비교하면 올해는 거래 자체가 줄었어요. 올해도 사정이 좋지 않아요. 주택담보대출(DTI) 규제를 포함한 심리적인 요인도 작용한 것 같아요. 가끔 나오는 급매물이 나오긴 하지만요.”

10여분간 중개업소 소장과 담소를 나눈 김 대리가 박카스 한 박스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중개업소를 나온 그는 “이렇게 친절하게 대화를 나누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다”고 말했다. 그는 신입사원 시절에 잘하고 싶은 마음에 중개업소를 방문해 집을 사러 온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한 적도 있다.

“중개업소 사장님들은 터줏대감입니다. 척 보면 이 사람이 정말 거래를 할 사람인지 아닌지를 눈치 채더라구요. 그래서 지금은 솔직하게 감정원에서 왔다고 말합니다.”


민간업체와 경쟁하는 유일한 공기업

한국감정원은 89년 ‘부동산가격공시 및 감정평가에 관한 법률’(옛 지가공시 및 토지 등의 평가에 관한 법률)이 개정된 이후 민간의 평가업체와 감정평가부문에서 경쟁을 하고 있다. 한국감정원이 법 개정 이전에 감정평가를 독점했을 때 감정평가를 의뢰하는 곳에서 차를 보내 평가해 달라고 한 적도 있지만, 그야말로 옛날 이야기가 된 지 오래다.

현장조사는 겨울에만 하는 것도 아니다. 정기공시 기준일인 1월1일부터 5개월 동안 새로 지어진 공동주택의 가격을 조사해 추가공시를 위한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조사업무는 연중무휴인 셈이다. 추가공시를 위한 조사는 정기공시보다 업무량은 적지만, 업무절차는 똑같다.

김 대리는 “신이 내린 직장인 줄 알았는데 막상 들어오니 그렇지 않다는 점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대신 그는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이 부동산에 관심이 있어 누구를 만나도 얘기할 거리가 많다는 점이 이 직업의 장점이라면 장점”이라고 말했다.


자나 깨나 부동산…젊은 부동산전문가의 꿈은?

오전 내내 현장조사를 마친 김 대리가 정오를 조금 지나 10분 만에 점심식사를 마쳤다. 이어 한국감정원 지하1층 헬스장으로 갔다. 2002년 대학교에 다닐 때 운동을 시작한 그는 점심시간에 30분 정도 짬을 내 운동을 한다. 운동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현장에서 뛰려면 체력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운동시간에도 늘 부동산이 화제에 오른다.

“제 월급으로 당장 집을 장만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근로소득자들이 평생 돈을 모아도 살 수 없는 집들이 너무 많아요. 베이붐세대인 50세 전후의 우리 부모님세대가 은퇴하고, 그분들이 어떻게 움직이냐가 중요하다고 봐요. 은퇴한 분들은 소형평수와 전원주택을 좋아합니다. 소형평수를 찾는 서민들이 은퇴한 세대들과 경쟁하는 구도가 앞으로 주택시장에서 계속 나타날 겁니다.”

오후 2시. 현장조사 결과를 컴퓨터에 입력했다. 일단 조사업무는 마무리된 것이다. 층별·위치별 요인을 담은 특성과 거래사례·평가사례 등도 함께 담아낸다. 김 대리가 작성한 정보는 이후에도 검증시스템을 거쳐 재조사를 거친다. 공시 이전에 이의신청을 받으면, 다시 현장에 가서 정확한 가격을 조사해야 한다.

“감정평가업무가 주축인 만큼 감정평가사 자격증을 따는 게 개인적인 목표예요. 아직 자격증이 없거든요. 짧지만 증권사에서 일했던 경험도 살리고 싶구요. 주식·부동산을 포함한 자산시장의 전문가가 되는 게 꿈입니다.”  

[Tip] 공동주택이란

주택법 제2조2호 규정에 따르면 공동주택은 아파트·연립주택·다세대주택을 말한다. 아파트는 주택으로 쓰는 층수가 5개층 이상인 주택이다. 연립주택은 주택으로 쓰는 1개동의 바닥면적(지하주차장 면적 제외) 합계가 660제곱미터(약 200여평)를 초과하고, 층수가 4개층 이하인 주택을 말한다. 다세대주택은 주택으로 쓰는 1개동의 바닥면적 합계가 660제곱미터 이하이고, 층수가 4개층 이하인 주택이다. 한국감정원은 매년 공동주택가격을 결정해 공시한다. 내년에 공시될 전국의 공동주택은 약 995만호로 추산된다.


 
국내 대부분의 공기업은 설립 법률에 따라 해당 사업의 독과점이 인정된다. 대표적인 게 철도·택지개발·전력이다. 하지만 한국감정원은 유일하게 민간업체와 경쟁을 벌여야 하는 공기업이다. 감정원 업무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분야는 부동산 감정평가인데, 감정평가는 89년 법 개정 이후 독점이 인정되지 않고 민간 업체와 똑같은 조건에서 경쟁을 해야 한다.
김성찬 금융노조 한국감정원지부 위원장(46·사진)은 “공기업이지만 설립 근거법이 없어 대형 감정평가법인 10개 정도와 경쟁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현재 공동주택 공시업무만 유일하게 민간이 하지 않고 있는 것인데, 이것마저 협회 등 민간에서 빼앗으려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공기업인 만큼 한국감정원은 전국 곳곳에 지점을 두고 부동산가격을 평가한다. 감정원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으로 감정원이 공동주택 933만호를 조사하는 데 든 비용은 127억원. 한 집당 1천361원이 든 셈이다. 그러나 민간 감정평가업자들은 단독주택 422만호를 조사하는 데만 476억원의 조사비용을 썼다.
김 위원장은 “2명의 감정평가업자가 표본을 조사·평가하고 표본을 기준으로 지방자치단체 공무원이 산정하는 단독주택 조사방식은 공동주택에 비해 호당 8배의 비용이 더 든다”고 강조했다.
공기업인 한국감정원은 국정감사와 감사원 감사, 국토부 감사 등 연중 감사를 받는다. 매출액의 0.3%를 판공비와 업무추진비로 쓸 수 있다. 그럼에도 국정감사에서는 항상 업무추진비가 많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감정원 부서장의 업무추진비는 월 60만~70만원 정도다. 임원 5명의 업무추진비도 월 100만원 수준에 그친다. 업무추진비 사용에 제약이 덜한 민간 감정평가법인과 영업부문에서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김 위원장은 “공정한 과세표준을 위한 자료를 만든다는 공익성을 위해서라도 공동주택 가격조사부문만큼은 공기업인 한국감정원이 계속 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재현 기자



[현장분석] “공정과세 기준설정은 공기업이 맡아야”
“강남 은마아파트와 용인 수지의 한 아파트가 건물가격으로 재산세를 책정하다 보니 예전에는 은마아파트보다 용인의 아파트의 입주자가 더 많은 재산세를 내는 오류도 있었어요. 거래시세를 감정원 조사에 반영하면서 그런 오류가 고쳐지기 시작했습니다.”
전국 975만호의 공동주택 가격조사를 도맡고 있는 한국감정원의 공동주택가격 조사·산정 업무는 방대하다. 조사결과가 세금과 직결되기 때문에 조사의 전 과정에서 민감할 수 밖에 없다. 부동산가격의 오류는 곧바로 대량 민원으로 연결된다.
실제로 공시가격이 나오는 매년 4월 말 이후 감정원에는 문의전화가 빗발친다. 콜센터 인원을 보강해야 할 정도다. 콜센터는 공시가격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고 1차적인 민원을 대응하는 곳이다.
975만호의 공동주택 조사도 쉽지 않다. 1월1일부터 5월30일까지 매년 신축되거나 변경된 공동주택의 추가공시는 11월에 한다. 1년 내내 쉴 틈이 없다.
한국감정원은 다른 민간 부동산정보업체에 비해 신뢰성을 인정받고 있다. 권영식(44) 부동산조사처 부장은 “2005년부터 공동주택 조사 업무를 시작한 이후 이의신청 건수가 매년 줄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감정원의 조사업무는 종합부동산세 대상을 선정함에 있어 공평한 과세를 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윤종돈 금융노조 한국감정원지부 조직부장은 “감정원 공시업무의 강점은 39개 지점이 전국에 분포해 어느 지역에라도 부동산 가격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점”이라며 “서울에서 근무하면서 가끔 지방에 내려가는 민간업체에 공동주택가격 조사를 맡기는 것은 감정원이 가진 공적 기능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오재현 기자


[Tip] 공동주택가격 공시업무 절차


접수→배정→사전조사(목록정비 및 확정·공부대조·가격자료 검색·도면작성)→현장조사(사진촬영·특성조사·가격조사)→가격검토 및 산정(가격자료 검토·가격산정·가격입력)→자격검증 및 심의(가격검증·가격심의·가격열람)→의견청취(의견제출서 검토·현장 및 가격조사·검토서 작성·결재·결정공시)→이의신청(이의신청서 검토·현장 및 가격조사·검토서 작성·결재·조정공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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