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조합 정화 조치’는 시작에 불과했다. 간부들이 쫓겨난 빈자리를 메우기도 전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1980년 12월 신군부가 만든 입법회의에서 노동관계법이 개정됐다. 유니온숍 제도가 폐지되고, 산별노조가 기업별 체계로 바뀌었다. 80년대 내내 악명을 떨친 3자 개입 금지 조항도 이때 신설됐다.
 
유니온숍 폐지와 산별노조 해체

이러한 사태는 노동조합에게는 미증유의 대재앙이었다. 물론 유신 때도 산별노조는 명맥만 유지했을 뿐이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노동계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나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산별노조가 없어지면서 지역지부도 해산해야 했다. 부산에서는 금속노조 부산지역지부가 해산되자 약 50여개의 노조가 생겨났다. 하지만 노조를 세우지 못하는 사업장도 있었다. 사업장 규모가 너무 작거나, 조직 역량이 취약한 곳이 여기에 해당됐다. 이 사업장들에서는 노동조합 설립부터 도와야 했고, 노조별로 직접 단체교섭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한 최소한의 연락체계라도 갖춰야 했다.

‘정화 조치’에서 살아남은 간부들을 중심으로 1980년 겨울 전국 각 지역에 ‘업종별 지역연락협의회’가 만들어졌다. 일종의 ‘자구책’이었다. 부산에서도 금속부산지역연락협의회가 발족했다. 전국금속노조 부산지역지부 사무장으로 일했던 나는 이 업종별지역협의회의 초대 의장을 맡았다. 의장이 된 내가 돌아다니며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앞으로는 여러분들이 직접 단체협상을 하고 도장을 찍어야 합니다”였다.

5·16 쿠데타 뒤 설립된 금속노조의 최초 규약에 따르면 조합원 1천명 이상은 기업별 지부, 그 미만은 분회로 지역지부의 분회가 됐다. 몇 년 뒤 규약 개정으로 지부 기준이 700명 이상으로 변경됐고, ‘정화 조치’ 직전에는 500명 이상이면 기업별 지부가 됐다.

3공화국에서 4공화국으로, 다시 5공화국으로 가면서 노동자의 단결권은 점점 더 축소됐다. 유신체제에서 산별노조 위원장은 기업별 지부의 교섭과 체결에 대한 권한이 없어졌다. 사실상 기업별 노조가 된 셈이다. 그러나 이렇게 독재자들이 노동자의 단결권을 제한하는 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던가. 우리 스스로 규약을 변경해 기업별 지부를 늘려 왔던 것이다. 
 
“이번에는 팽종출 후보를 밀어줍시다”
 
금속노조도 금속노련으로 바뀌었다. 1968년부터 1979년까지 12년 동안 ‘장기집권’을 했던 김병용씨가 퇴장한 뒤 금속노련 임원 보궐선거가 1981년 2월에 있었다. ‘정화 조치’ 직후 금속노조 위원장 직무대행을 맡았던 팽종출씨가 출마했다. 유력한 후보는 금성사 출신의 최종규씨였다.

서울에서 선거운동을 하던 팽종출 후보가 내게 전화를 했다. 나와 친한 경인지역의 ‘개혁파’ 표를 모아 달라는 것이었다. 한숨부터 나왔다. 이런 와중에 선거라니. 게다가 팽종출 직무대행이 금속노련 위원장이 되더라도 제대로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내 판단은 긍정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결심을 하고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탔다. 선거 며칠 전의 일이었다. 서울역 앞 옥다방에서 대한전선의 한달수 전 지부장을 만났다. 거의 30년 전의 일인데 다방 이름까지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당시 나는 꽤 심각했던 모양이다.
 
“이번 선거에서 팽종출 직무대행을 밀어줍시다.”
“조공 때 구속된 당신들한테 어떻게 했는데, 그런 말이 나와요?”
“그럼 어떻게 할 겁니까? 금성사 출신 후보는 안 됩니다. 선배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선배님이 출마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요.”
 
한달수씨는 ‘정화 조치’로 지부장에서 사퇴를 했고, 회사로부터는 사표를 내라는 압력까지 받고 있었다. 결국 한달수씨는 고개를 끄덕였고, 경인지역 개혁파들의 표는 팽종출 후보에게 갔다.

선거가 끝나고 경인지역 개혁파 김장선과 부산의 박인상이 금속노련 비상근 부위원장에 이름을 올렸다. 팽 위원장을 견인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표를 준 대신에 자리를 받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름을 올린 이유가 후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상근 부위원장이라는 자리와 표를 바꾸기에는 경인지역 개혁파의 표는 정말 소중했다.

어쩌면 그 표야말로 우리가 금속을 개혁할 바탕이 되는 유일한 ‘종자돈’이었다. 나와 경인지역 개혁파들은 이 표로 대공장 노동조합에 맞서는 반대전선을 친 것이었다. 기아 출신의 김병용 위원장은 금성사 노동조합들과 손잡고 10년 넘게 금속노조를 좌지우지했다. 이번 선거에서 또다시 대공장 출신이 위원장이 되면 앞으로 우리 힘으로는 돌이키기 어려운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게 개혁파들의 판단이었다.
 
철탑산업훈장

시절은 어수선한데, 난데없이 상복이 터지는 계면쩍은 일이 연달아 생겼다. ‘정화 조치’의 상흔이 채 가라앉지도 않았을 무렵이다. 어느 날, 부산시에서 연락이 왔다. 정부에서 나에게 훈장을 주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내가 1979년 8월 말부터 1980년 3월까지 6개월 동안 미진금속에서 살다시피 했을 때 시청 공무원·경찰, 그리고 기관원들이 뻔질나게 찾아왔다. 미진금속 부도가 부산에서는 큰일이었고, 노동자들이 임금을 못 받고 있으니 데모라도 크게 하는 것 아닌가 해서 왔던 것이다. 그런데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해결이 되는 눈치가 보이니까 안심을 하고 돌아갔다. 이때 담당 공무원들이 상부에 보고를 했는데, 그 내용을 ‘위’에서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정화 조치’가 있기 전이었는데, 부산시의 담당 공무원으로부터 금속노조 부산지역지부가 미진금속 사태를 잘 해결했으니 정부에서 주는 상을 받게 해 주겠다며 보고서를 내라고 연락이 왔다. 사무장인 나는 수상자를 정남수 지부장으로 해 지부장 명의로 요청받은 서류를 작성해 제출했다.

그런데 그 사이 세상이 바뀐 것이다. 부산시의 담당 공무원은 정남수 지부장이 ‘정화 대상’으로 물러났으니 수상자 이름을 내 이름으로 바꾸라고 요구했다.

내가 꺼려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리하여 나는 철탑산업훈장이라는 것을 받았다. 1981년 초의 일인데, 그해 3월 근로자의 날에는 노동부에서 주는 표창장도 받고 기념식 사회까지 봤다.

상 받는 것 싫어할 사람은 없는 법인데, 상 주는 사람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함께 동고동락했던 동료들을 내쫓은 정부라는 게 문제였다. 내 꼴이 약간 우습게 됐다. 주변에서 ‘상복 터졌다’며 놀려대는 통에 웃고 말았다.
 
한국노총 부산시협 사무국장이 되다

생각지도 않던 ‘상복’이 터지더니 이번에는 ‘감투’가 생겼다. 금속노련 부산지역연락협의회 의장과 한국노총 부산시협의회 사무국장을 겸임하게 된 것이다. 부산시협도 ‘정화 조치’로 사정이 복잡했다. 김영태 의장이 ‘정화 대상’으로 물러난 뒤 부산시협은 국제상사의 김양호 위원장이 직무대행을 맡고 있었다.

보궐선거를 앞두고 김양호 직무대행이 같은 화학노련의 삼화고무 정금환 위원장을 추천했다. 김양호씨와 정금환씨가 “사무국장은 금속 출신이 좋겠다”며 나를 내정했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다.

이때 부산에서는 고무사업장 노동조합이 가장 컸다. 조합원수가 많기로는 자동차노련이었지만 택시사업장이 많아서 각각의 노동조합 규모는 작았다. 그 다음으로 조합원수가 많은 곳이 금속이었다. 이런 사정으로 금속 출신인 내가 발탁이 된 것 같다.

정금환 의장은 50대, 나는 40대 초반이었다. 나이 차이가 있어서인지, 정 의장은 웬만한 일은 내가 알아서 하도록 여유를 줬다. 업무상으로도 특별히 부딪힐 일은 없었다. 하지만 1987년 6·29 선언 이후에는 부산시협의 일이라는 게 단순하지 않았다.

부산에서 고무사업장이 가장 컸지만, 부산에서 가장 아픈 사업장도 이곳이었다. 수만 명의 젊은 여성 노동자들이 신발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1987년 여름 노동자대투쟁이 시작됐을 때 부산에서는 이 여성 노동자들이 맨 앞줄에 섰다.

그들은 임금인상과 함께 “어용노조 물러가라”고 외쳤다. 자신들이 회사로부터 화장실 가는 것까지 감시당하며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을 때 당신들은 노동조합 간부라면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는 비판이었다.

금속노조 부산지역지부에 있을 때와는 달리 부산시협 사무국장은 고무나 화학·항운 쪽 일도 신경을 써야 하는 자리였지만, 이쪽의 노동조합 위원장들은 대부분 나보다 연배가 위였다. 특히 ‘경계를 넘어’ 다른 노동조합 일에 개입하는 것이 금기시되던 때였다.

이래저래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오죽하면 동료·후배들이 만들어 준 문집 <영원한 위원장>에 실린 부산시협 사무국장 관련 사진은 단 한 장뿐인데, 그것도 ‘근로자가요제’ 사회를 보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었다.
 


‘조직’은 못하고 ‘교육’만 하는 신세

나는 부산시협 사무국장으로 있으면서 ‘조직’이나 ‘쟁의지원’보다는 ‘교육’에 신경을 더 썼다. ‘3자 개입 금지’ 조항 때문에 말 그대로 개입도 어려웠지만, 교육을 통해 단위노조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풀어 나가려 했다. 방문하기 전에 현장 사정을 알아볼 만큼 알아보고 갔다. 내가 가면 사측도 긴장하는 눈치였다. 노동조합에 관한 한 전문지식이 있었고,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다는 것도 신경이 쓰이는 대목이었을 게다.

때로는 교육시간에 조합원들로부터 집행부를 성토하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이런 경우에는 솔직히 그 자리에서 할 말이 없었다. 집행부가 잘못한 게 분명한데, 그렇다고 내가 나서 엎으라고 선동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교육이 끝난 뒤 집행부에게 “현장이 들끓는 것 같던데 똑바로 해야 하지 않겠소?”라고 따끔한 말 한마디 던지는 게 전부였다.

기업별 노동조합이 되면서 상급단체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더 줄어들었다. 그런 만큼 회사가 노조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더 커졌다. 때문에 80년대 노동조합 결성 ‘무용담’마다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게 바로 ‘여관방’이다.

1970년대에도 노동조합을 결성하려고 하면 회사 관리자들이 찾아와서 노조위원장이 될 사람을 돈으로 회유를 했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서는 이것이 더 심해졌다. 기업들도 덩치가 더 커졌고, 비축해 놓은 자금도 더 많았다. 게다가 기업별노조였다. 숫제 상급단체를 신경 쓸 필요 없이 자기 회사 근로자만 구워삶으면 된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실제로 회유나 협박을 통한 노조 파괴 공작의 성공률이 높아졌다. 이러다 보니 ‘여관방’이 등장했다. 회사의 공작에 번번이 당한 상급단체 간부들은 노동조합 결성식 전날에는 설립 주역들을 아예 집에 보내지 않고 여관방에 붙들고 있게 된 것이다.
 
“끝까지 들어보고 난 뒤 얘기하시오!”

단위노조 위원장의 권한이 커지면서 내가 덕을 보는(?) 일도 생겼다. 단체협약으로 따낸 교육시간에 외부강사를 불러 조합원 교육을 하는데, 강사 선정 권한은 전적으로 위원장의 몫이었다.

연합철강의 박기식 위원장과는 금속노조 부산지역지부 시절부터 가까웠는데, 박 위원장은 내가 6개월 동안 연합철강 조합원을 상대로 교육을 할 수 있게 해 줬다. 6개월 동안 한 달에 한 번씩 교육을 했으니까, 연합철강 노동조합은 교육시간을 몽땅 다 내게 ‘헌납’한 셈이었다. 나로서는 금속 조합원들도 만나고, 활동비(강사료)도 벌충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시절이 시절이라 강의 내용에는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이 좋아했던 말 가운데 하나가 ‘생산성’이었다. 분회 교육을 하는 자리에 ‘생산성 향상을 위한 근로자 교육’이라는 현수막을 붙여 놓아야 했다. 1980년대라고 다르지 않았다. 특히 초반에는 더 거칠었다.

연합철강에서 첫 교육이 끝난 뒤 회사가 노조에 불만을 제기했다. 강의 내용 가운데 여러 회사에서 벌어진 실제 부당노동행위 사례를 소개하면서 이런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노동자들이 단결해야 하고, 노동자 혼자 힘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는데, 이것을 문제 삼은 것이다.

그러나 유신체제 때도 악명 높은 정보부 기관원들의 ‘트집’에 걸리지 않고 할 말은 다 했던 나였다. 다음부터는 ‘살살 하겠다’고 약속 아닌 약속을 했는데, 실제로 그렇게 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강의를 하다 보면 스스로 도취돼 목소리가 높아질 수 있으니까.

아무튼 회사 관리자들에게 강의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보고 난 뒤에 얘기하라고 했다. 결국 그 다음 교육시간에 관리자들이 몇 명 들어와 참관을 했는데, 지루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내가 진짜 살살 해서 그랬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 뒤로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심덕운동’으로 ‘스타’가 된 정학균 위원장 

노동조합이 ‘동면’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던 시절이었다. 그래서일까. 내 기억도 파편으로만 남아 있다.

1980년대 초반 부산 노동계의 ‘핫 이슈’는 ‘심덕운동’이었다. 쉽게 말하면, 노동자는 양심껏 열심히 일하고 회사도 노동자의 양심을 믿고 노동자를 인간적으로 대접함과 동시에 적자 타령만 일삼지 말고 양심껏 경영 상태를 공개해 임금을 지급하라는 주장이었다.
심덕운동의 창시자는 대동조선의 정학균 위원장이었다. 정 위원장은 1980년 12월부터 대동조선에서 이 운동을 시작했는데, 회사도 이에 호응해 잔업 때 관리자를 두지 않고 노동자 자신이 잔업시간을 계산하게 했다.

이 사실이 언론에 나갔고, 전두환 대통령의 귀에 들어가 정 위원장은 대통령 초청으로 청와대까지 다녀왔다.

나중에 정 위원장에게 자세히 들으니, 전 대통령은 심덕운동을 칭찬하고서는 청할 게 있으면 하라고 했단다. 정 위원장은 망설임 없이 대동조선이 1만톤급 선박을 만들 수 있게 해 달라고 답했다. 당시 대동조선은 새로운 조선소 부지를 진해만 근처에 물색하고 있었는데, 해군 군사시설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노동조합이라면 ‘빨간 색안경’ 쓰고 보던 대통령인데 회사를 위하는 노동조합 위원장의 발언에 얼마나 감동했겠는가. 화끈한 성격답게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돼 대동조선은 새 조선소를 지을 수 있었다.

일이 이렇게 돌아가자 지역언론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보도했고, 부산지역의 상공인들도 덩달아 심덕운동을 거들고 나섰다. 정 위원장은 ‘스타’가 됐고, 심덕운동 강의를 하러 전국을 누볐다. 그런데 정 위원장의 강의에는 조건이 있었다. 업무시간에 노사가 함께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 위원장은 부산시협 사무국장으로 있던 나에게도 협조를 구했다. 부산시협 산하 노동조합에 ‘정학균의 심덕운동’ 강의를 듣도록 주선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 무렵 회의 참석차 한국노총에 갔을 때 정책실장으로 있던 김금수씨에게 심덕운동이란 게 있다고 소개했다. 내 얘기를 들은 김금수 실장은 “취지는 이해하지만 결국은 회사 입장에 선 운동”이라고 충고했다.

나 역시 우려되는 지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정학균 위원장의 인격을 믿었기에 강의를 주선했다.

정 위원장은 틈만 나면 우리나라 노사관계는 교섭이라기보다는 ‘구걸’하는 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강조하곤 했다. 노동자의 ‘노’자도 꺼내지 못하게 하던 때, 근로자라는 단어는 죽어도 입에 올리기 싫어 고심 끝에 ‘노서방’이라는 엉뚱한 개념(?)까지 만들어낸 정 위원장이었다. 사실 심덕운동도 따지고 보면 노동조합의 단체교섭력을 높이기 위한 방안 가운데 하나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심덕운동은 오래 가지 못했다. 심덕운동의 요람인 대동조선이 경영 실패로 무너졌고, 무엇보다 독재정권 하에서 ‘내 탓이오’ 식의 운동은 그 진정성을 의심받기 쉬웠던 것이다.

내가 정학균 위원장과 심덕운동을 길게 소개한 것은 그와 가까웠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일화가 후배들에게 어떤 시사점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
노동조합을 공격하는 언론 보도가 나올 때마다 나는 정 위원장을 떠올리며 요즘 후배들은 어떤 궁리를 하고 있을지 궁금해지는 것이다.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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