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 탈출’이라는 주장을 하면 공장은 버려야 할 곳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공장과 직장을 모두 버리고 밖으로 나가자는 말이 아니다. 노동조합이 주목해야 할 활동이 무엇인지를 냉철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는 뜻이다. 임금의 노예, 임금실리만을 추구하는 ‘공장귀신’이 아닌 ‘잠일술 인생’에 대한 전반적인 성찰과 이를 통해 삶의 시간적 재편, 건강권에 대한 새로운 인식, 가족과 사회관계 및 문화적 영역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만들어 가야 한다.
 

고참은 보급로, 신참은 공격로

대공장 노동자들이 비정규직과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를 위해 파업을 하기는 힘들다.
밖에서 또 파업하냐고 떠들고, 급기야 현장의 일부 조합원까지 파업 좀 그만하자고 난리를 친다. 비정규직법 개악에 맞서 투쟁할 때도 ‘정치파업 이제 그만’이라고 비난한다. 아예 ‘파업 그 자체에 대한 혐오감’을 공공연하게 드러낸다.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하면 실제 금속노조를 제외하고는 많이 참여하지 못한다. 금속노조의 파업은 현대차나 기아차·대우차 등 대공장이 참여하지 않으면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자꾸 현대차를 파업으로 내몰면, 거꾸로 집중적인 공격에 시달린 나머지 내부에서 반대세력이 생겨난다.

‘신참은 공격로를 챙기고 고참은 보급로를 챙긴다’고 했다. 역전의 용사인 고참 상사가 소총 들고 돌격대의 맨 앞에 서는 것은 효율적인 역할 분담이 아니다. 고참은 오랜 전투경험을 바탕으로 전투 전체를 살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대공장 정규직 노동조합은 고참 역할이 제격이다. 비정규직이 투쟁하면 똑같이 싸우지 못하는 대신 기금을 지원하고 물자를 공급해 주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러나 이마저도 쉽지 않다.

“그러면 정규직은 싸우지 말고 투쟁기금이나 대고, 비정규직들이나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이 총대 메고 앞에 나서라는 얘기냐”고 비판할지 모른다. 물론 힘겨운 전투, 병사들 모두가 전진공격이 어려울 때는 역전의 용사가 앞장서야 한다. 그러나 고참을 시도 때도 없이 앞세우면 그 군대는 패한다.

가마솥은 한참 장작불을 태워야 끓는다. 대공장이 전투의 전면에 나서야 할 때와 방법을 고민해야 할 시기다.



콩 한 쪽의 철학

요즈음 ‘나눔’은 그럴싸한 감성을 자극하는 기업의 광고에도 등장한다. 그래서 나눔을 얘기하면 무슨 맛이 가도 한참이나 간 소리냐고 비웃는다. 하지만 나눔은 누가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기업들의 나눔 운동은 시혜를 넘어 기업이윤을 위한 이미지 개선광고에 불과하다. 그러나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한다면 그것은 연대다.

포항의 진방스틸에서 정리해고에 맞서는 투쟁을 할 때 정리해고자나, 임금이 삭감된 조합원이나, 정상임금을 받는 조합원이나 모두 주머니를 털어 120만원 이상을 받게 했다고 한다. 똘똘 뭉친 조합원과 그 가족들은 하나가 됐다. 1차 정리해고는 부당노동행위로 판정됐다. 승리였다. 2차 정리해고자 명단이 또 발표됐다.

“해고 명단에 들어가지 않은 조합원이 먼저 회사에 항의합시다. 나는 왜 당첨되지 않았냐고 항의합시다.”

2009년 3월 아직도 정리해고에 맞선 투쟁을 계속 이어가는 진방스틸 지회장의 사례발표는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일까? 내가 정리해고 명단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안심하는 다른 정리해고 사업장들과 전혀 다른 이 같은 분위기는 ‘나눔’에서 비롯됐다.

‘일자리 나누기’를 정부가 나서 한국노총과 노사민정 합의로 추진하면 임금삭감 수단으로 전락한다. 힘 없는 대기업 신입사원의 임금만 깎아 버린다.

대구의 삼우정밀에서는 휴업수당도 받지 못하는 이주노동자를 대신해 정규직 조합원들이 휴업하고 이주노동자들이 정상근무를 했다. 인종을 넘어서는 위대한 나눔이다.
우리는 자꾸 큰일을 생각한다. 지역파업? 지자체와 한판? 가능하면 좋다. 하지만 작은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2008년 9월, 한 대기업 노조의 지회가 지역의 장애아동과 인연맺기 ‘호프데이’를 했다. 투쟁도 아니고 이따위 맛이 가도 한참 간 행사를 하다니! 그러나 이날 행사에는 음식이 동날 정도로 많은 조합원이 참가했다.

낡은 프레임을 버리지 못한 간부들과 현장의 활동가들은 ‘낡은 창’을 통해 바라본다. 호프데이를 개최한 현장조직의 한 조직원은 우쭐해하면서 말했다.

“이번 선거에서는 우리가 당선가능성이 높다.”
다가올 선거에서 경쟁할 다른 현장조직원들이 호프데이를 비난하는 소문을 퍼뜨린다.
“쟤들(호프데이 추진한 현장조직)이 선거를 위해 회사로부터 지원을 받고 그런 일을 했다.”

한 조합원이 답했다.
“에라이, ○○○아. 그러면 니들도 회사 돈 받아서 해도 좋으니까 지역을 위해 좋은 일 좀 해 봐라.” 



지역에서 ‘배부른 귀족 노동자’라고 욕먹는 조합원들이 지역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것을 어찌 마다하겠는가! 2009년에는 회사 관리자들이 쓰던 건물을 비우고 지역주민을 위한 도서관을 만든다고 한다.

나눠 먹던 버릇을 가진 사람은 콩 한 쪽도 그냥 입에 넣지 않는 법이다. 늘 혼자 먹던 사람은 생각도 않고 그냥 먹는다. 회사와 부딪치는 일만 했던 공장감옥에 갇힌 노조와 노동자들이 경제위기 상황에서 실업자와 떡을 나누고 상담도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민주노조운동이라는 것도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계급이론을 배우고, 투쟁을 외치고, 머리띠를 매는 것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다. 현장의 노동자들은 찬 소주를 같이 들이키며 신세한탄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쓰린 속을 부여잡은 끝에 드디어 일어날 수 있었다.

민주노총의 핵심이라는 금속노조의 ‘경제위기 대응계획’에는 각 사업장마다 ‘함께 살기’ 1실천 운동을 하라는 지침이 있다. 역시 제대로 하고 있다는 소식은 잘 들리지 않는다.

일상(日常)없는 비상(非常)?

2009년 4월 간부의 성폭력 사건으로 인해 사퇴한 지도부를 대신해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민주노총 신임지도부는 ‘사회연대 노동운동’으로 거듭나겠다고 선언했다.
노동조합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각종 사회적 비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집단이기주의’ ‘자신들을 위한 배부른 투쟁’ ‘약자에 대한 외면’이라는 지적을 피하기 위해 나름 노력했다. 

조합원들의 임금인상이나 노동조건 개선만이 아니라 사회공공성을 위한 투쟁을 고민했다. 때문에 늘 시민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온 철도나 지하철 노동조합은 ‘시민의 안전’을 주요 요구로 내걸었다. 인력감축이 조합원들의 고용만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철도나 지하철의 안전성을 떨어뜨려 사고 위험을 높이기 때문이다. 시민의 안전을 지키는 공공서비스의 질을 높이는 투쟁이다.
그러나 그간의 노력에 대한 평가는 내부에서도 호의적이지 않다. 
 
“한 지역의 육아시설은 그 지역에 사는 철도조합원의 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필요한 정원을 채우지 못한 채 운영된다. 그래서 철도조합원만이 아니라 지역민에게도 참여할 수 있도록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니까 ‘왜, 철도조합원을 위한 육아시설을 개방하냐’는 비판이 나왔다.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상황에서 공공성 투쟁은 허구가 된다. 이것을 넘어서지 않으면 공공성 투쟁은 운동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위한 말장난이 될 것이다.”  
- 2008년 10월 철도노조 간부 인터뷰
 
“평가도 이런 쪽으로 고민해 봐야 한다. 철도나 지하철이나 모두 공공성을 외치고 시민의 안전을 외쳤는데, 파업투쟁 결과 그것이 상실돼 버렸다. 이에 대해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 2008년 11월 서울지하철노조 간부 인터뷰
 
“최저임금이나 비정규직에 대해 얘기하면 ‘우리 사업장이나 잘하지 상관없는 얘기만 하냐’는 반응을 보인다. 실천단에게 ‘어이, 실천단, 사업장에서 왕따당하는 사람들 아냐?’는 농담을 스스럼없이 한다. 노조 질서를 뛰어넘으라고 하지만, 사람들의 관계를 묶어 놓는 것은 노조나 사업장이다. 이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
- 2008년 10월 서울지역에서 실천단 사업을 했던 단체 활동가
 
그간의 노력들은 결국 비난을 피해 가려는 립서비스 혹은 면피용 전술이었던 셈이다. 그것은 사기다. 거짓말을 할 바엔 아예 솔직하게 얘기해야 한다.
 
“우리 자신을 위해 투쟁하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구나 더 많은 소유를 원한다. 가진 게 많은 부자들은 많이 가졌는데도 악착같이 더 많이 소유하기를 바라지 않나. 이게 자본주의의 본질이다. 우리도 더 많은 것을 갖고 싶다. 왜 우리만 비판하나.”
 
이렇게 주장하면 공감을 얻기는커녕 반감만 커질 것이다.
87년부터 본격화돼 이제 20년이 넘은 민주노조운동은 단단히 굳어 버린 콘크리트 같은 느낌을 준다. 창조적으로 모양을 만들 수 있는 부드러운 찰흙이 아니다.


민주노총은 매년 이슈를 크게 걸고 총파업을 선언한다. ‘비정규직법 개악에 맞선 총파업’ ‘한미 FTA반대를 위한 총파업’ 등 거대한 이슈를 내걸고 큰 투쟁을 기획한다. 경제위기 상황에서 ‘실업대란 국가가 책임지라’고 대규모 투쟁을 만든다면 그게 가능할까?

대다수 조합원들은 ‘공장감옥’의 프레임 속에서 ‘일부만 일어서기’를 반복하고 있다. 이런 일상들이 수년간 지속돼 왔는데 갑자기 비상시기가 오면 어떻게 될까? 뻔하다. ‘함께 살자’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나만 살자’고 하지 않는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공장감옥에서 현장 투쟁을 하다가, 어느 순간 거리에서 ‘노동자·서민 살리기’를 위한 대규모 투쟁을 하는 것이 가능할까? 

임금협상을 위해 매년 ‘기업경영분석’을 해 온 노동조합이 갑자기 ‘예산분석’을 통해 ‘노동자·서민 살리기’를 위한 투쟁을 봇물처럼 일으키기를 기대한다면 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가! 차라리 로또 복권에 당첨되기를 기대하는 것과 다를 게 뭔가.

2009년 2월,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은 [기본소득보장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책자를 냈다.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기본소득보장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은 어떻게 할 것인가?
차라리 경제위기가 심화되고 조합원들의 상당수가 해고돼 실업자로 거리로 밀려날 때, 조직된 노동자나 실업노동자나 벽이 없는 같은 처지에 설 때, 비로소 실업자동맹과 같은 조직을 만들어 국가에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는 투쟁을 하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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