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노동자 상당수가 주야 맞교대를 한다는 사실을 아는 국민은 의외로 적다. 지친 몸으로 자고, 대부분의 시간을 일하고, 짬이 나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술이라도 마셔야 하는 인생은 말 그대로 ‘잠일술 인생’이다.”
가족 내 ‘현금인출기’로 전락한 아빠들의 하루는 고되고 외롭다. 약육강식·적자생존·승자독식의 논리가 판치는 경쟁사회는 ‘88만원 세대’인 자식과 ‘잠일술 세대’인 부모의 고통을 냉정하게 외면한다. 그도 모자라 이들 사이의 소통까지 가로막고 있다.

부모세대는 자식세대의 미래를 가로막는 구세대로 치부되고, ‘배부른 대공장 노동자’라는 불명예까지 뒤집어썼다. 외환위기 이후 최근까지 계속되고 있는 기업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는 정규직 노동자들의 뇌리에 ‘고용불안증’이라는 혹독한 악몽을 각인시켰다. 그래서 탈출구가 필요하다.
“실업자든, 취업자든 모든 노동자의 희망은 오히려 공장을 벗어나는 것”이라는 엉뚱한 제안을 담은 책 <아빠는 현금인출기가 아니야>(조건준 지음·매일노동뉴스 펴냄·1만5천원)가 출간됐다. ‘잠일술 세대가 꿈꾸는 달콤한 상상, 공장 탈출’이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의 저자는 국내 최대 산별노조인 금속산업노조에서 정책국장을 맡고 있는 조건준(43)씨다.

저자의 눈에 비친 공장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으르렁대는 ‘링’ 위의 세상이다. 정규직에게도 강력하게 작용하는 고용불안증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고용게임’을 강요한다. 다툼의 틈바구니에서 자본은 정규직을 비정규직의 표적으로 만들기 위해 열을 올린다.
“결국 범인이 바뀌었다. 비정규직 문제와 사회 양극화의 주범은 자본이 아니라 정규직 노동자가 된 것이다. 가장 치졸하고 악랄한 체벌이라고 할 수 있는 ‘서로 뺨 때리기’를 닮았다.”

'100 빼기 50'의 선택

노동자에게 기업 구조조정은 무엇을 의미할까. 저자는 ‘100에서 50 빼기의 선택’이라고 설명한다.
“기업이 가진 돈이 100만원이고 100명이 1만원씩 나눠 가지며 살았다고 하자. 그런데 경영이 악화되면서 돈이 50만원으로 줄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세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100명이 5천원씩 받고 살거나 △50명을 자르고 남은 50명이 1만원씩 받거나 △인력도 감축하고 임금도 삭감하는 방식이 있다. 노동자와 자본의 선택은 엇갈린다. 자본의 선택은 당연히 세 번째다.
“35명을 자르고 임금도 3천500원씩 삭감해 50만원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임금을 더 삭감해 42만2천500원만 소비하는 방식을 원한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은 어떤 방식을 원할까.
“마음이 복잡해진다. 내가 잘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첫 번째 방식을 선택할 것이다. 내가 잘리는 대상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두 번째, 세 번째 방식을 선택한다.”
이쯤 되면 ‘준비된 희생양’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약자부터 보호하는 미덕은 영화에서나 나오는 얘기. 내가 가진 것을 나누기보다는 비정규직부터 자르는 것을 가볍게 선택하는 상황에 이른다. 저자는 정규직만의 ‘혼자 일어서기’가 비정규직들의 시야를 가리고, 결과적으로 많은 이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한다. 맹렬한 비난의 표적 앞에 선 정규직 노동자들 역시 불행하기는 마찬가지라는 설명이다.

고참은 보급로, 신참은 공격로

“대공장 노동자들이 비정규직과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을 위해 파업을 하기는 힘들다. 밖에서 또 파업하냐고 떠들고, 급기야 현장의 일부 조합원까지 파업 좀 그만하자고 난리를 친다. ‘신참은 공격로를 챙기고 고참은 보급로를 챙긴다’고 했다. 역전의 용사가 돌격대의 맨 앞에 서는 것은 효율적인 역할 분담이 아니다. 그런 측면에서 대공장 정규직 노동조합은 고참 역할이 제격이다.”

노동계 일각에서는 “정규직의 몫을 비정규직에게 돌리는 것은 자본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노동자 책임론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저자의 생각은 다르다. 이 같은 주장이 비정규직의 계급의식을 높이는 데 기여하지 못했고, 정규직 노동자의 이기심까지 키웠다는 것이다.

저자가 던지고 있는 ‘공장 탈출’이라는 화두는 공장의 울타리를 넘어선 연대와 소통을 의미한다. 공장이라는 성의 낡은 창을 깨고 나와 소통·나눔·행복의 네트워크를 만들자는 것이다. 조돈문 가톨릭대 교수(사회학)는 추천사에서 "민주노조운동의 공간 속에서는 정규직 귀족노조도, 버려진 비정규직도, 정파 활동가도, 정치꾼도 모두 소통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며 저자의 문제제기에 공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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