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시작됐다. 기온이 올라가고 비가 자주 내리는 6월이 되면 정부는 질식사고 경보발령을 내린다. 이 시기에 맨홀이나 저장탱크 같은 밀폐공간에 미생물 번식이 활발해져 산소가 부족해지고 유해가스가 증가하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땅속 맨홀에 들어가 구슬땀을 흘리는 노동자들이 있다. 전화선을 설치하기 위해 맨홀 안에서 케이블 포설작업을 하는 KT노동자들이다. 지난 15일 <매일노동뉴스>가 이들의 작업현장을 들여다봤다. 이날 오전 8시30분 인천광역시 남동구 간석1동에 소재한 KT 인천지사. 고객서비스팀의 케이블매니저(CM)인 김동삼(51) 실장과 이정화(44) 사원이 20여분 떨어진 남현동의 한 신축건물로 출발했다. 최근 공사가 끝나 조만간 입주가 시작될 건물이다. 매달 한 번 지역을 순회하는 KT노조 이동정책실과 김구현(52) 노조 위원장도 동행했다.

건물 주변에 차를 세우고 작업이 시작됐다. 맨홀 뚜껑을 여니 흙탕물이 차 있다. 양수기를 이용해 물을 뽑아내니 검은색 케이블선이 보인다.
“신도시라 물의 악취가 덜한 편이에요. 각종 오폐수가 다 들어와서 냄새가 심한 곳은 정말 지독하죠.”

김동삼 실장의 말이다. 겨울엔 맨홀 뚜껑이 얼어서 안 열리기도 한단다. 미리 깔려 있는 케이블선에 새로운 전화회선을 연결한 뒤 건물로 케이블선을 이어야 한다. 서로 다른 색깔의 전화회선 25개가 하나의 케이블 안에 담겨 있다. 김 실장이 ‘커넥터’라는 기계에 회선을 하나하나 연결한다. 25개 색깔의 순서를 모두 외우고 있어야 한다.
“아무렇게나 연결하면 개똥이네 집에 전화를 걸었는데 새똥이가 나오게 되는 겁니다.”
회선이 제대로 연결됐는지 확인하기 위해 인근 논현분기국사로 향했다. 국사에 있는 MDF(Multi Distribute Frame)이라는 기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 작업은 케이블선이 맨홀 속에 들어갔을 때 물이 새지 않도록 열수축관을 씌우는 것이다. 이때 소형 휴대용 버너인 ‘토치램프’를 이용한다. 작업자들은 화상을 방지하기 위해 여름에도 긴팔 셔츠를 입는다. 김 실장이 시범을 보인 후 김구현 위원장이 작업에 나섰다.
“닭고기도 타지 않게 노릇노릇 구워야 하잖아요. 열수축관이 잘 밀착되도록 골고루 열을 가해야 합니다.”

우리가 집이나 회사에서 전화기를 사용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칠까. 지하에는 상·하수도관만 지나가는 것이 아니다. 전화선이 지나는 '케이블길(관로)'이 따로 있다. 각 지역의 전화국에서 뻗어 나온 케이블길 중간에는 246미터마다 맨홀이 있다. 최대 3천600개의 회선을 갖고 있는 케이블선이 동네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간다. 이때 회선이 갈라지는 지점에 맨홀이 있다고 보면 된다. 일반 가정으로 들어가는 전화회선은 지하에서 올려온 선을 통신전주에 단자를 붙여 각 가정으로 연결한 것이다. 전화선에도 48볼트의 미세한 전류가 흐른다. 일반 건물에는 케이블선을 맨홀에서 지하로 연결해 위층으로 올려 준다.
맨홀 열고 환기작업이 최우선

점심식사 후 인천지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현장으로 출발했다. 큰 도로와 골목길이 만나는 지점에서 두 개의 맨홀 뚜껑을 열었다.
“케이블에서 공기가 새어 나와서 열수축관을 교체해야 됩니다. 열수축관으로 감싼 부위에 공기가 어느 정도 있어야 물이 못 들어오거든요.”
공기의 농도에 이상이 생기면 지사에 있는 시험실 컴퓨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시험실은 일반인 통제구역이다.

맨홀 안의 물을 빼내고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산소와 유해가스 농도를 측정하는 일. 김 실장이 노란색 가스측정기로 산소 농도를 측정했다.
“산소농도는 18% 이상, 탄산가스는 1.5% 미만이어야 합니다. 황화수소는 10ppm 이하여야 하고요.”
이어 송풍기를 통해 바깥 공기를 맨홀로 들여보낸다. 공기를 주입해 안의 가스를 바깥으로 빼 주는 것이다. 지나가는 시민들이 작업현장을 쳐다본다.

김응민(42) 팀장과 김정수(44) 과장이 안전모를 쓰고 2.5미터 아래 맨홀로 내려갔다. 김 실장이 맨홀 안에서 땀을 닦을 종이수건을 건넨다.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신고 사다리를 이용해 반대편 맨홀로 그들을 따라 들어갔다. 6.6제곱미터(2평) 남짓한 공간에 수십 개의 케이블선이 지나가고 있었다. 굵기도 제각각이다.
"이 정도면 그래도 넓은 편이에요. 여긴 맨홀 뚜껑이 3개잖아요. 간혹 맨홀 한 개만 열고 작업할 때도 있거든요."

제조일자가 2002년 5월23일이라고 쓰인 케이블도 있었다. 인터넷에 이용되는 광케이블선도 눈에 띈다. 빨간색 회선은 주요회선이라고 한다. 작업공간은 어두컴컴했다. 두 개의 맨홀 뚜껑에서 손바닥만한 햇빛이 들어올 뿐이다. 케이블선이 지나가도록 뚫어 놓은 관로 사이로 물이 계속 흘러 들어왔다. 바닥은 진흙으로 질퍽해 발을 떼기가 쉽지 않다.

“열수축관을 봉합해 놓은 연결부위가 노후된 거예요.”
김 팀장과 김 과장이 토치램프를 이용해 케이블 열수축관에 열을 가하기 시작했다. 예전 것을 뜯어 새것으로 교체하기 위해서다. 맨홀 안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니 오금이 저린다. 유해가스가 있을 경우 자칫 폭발할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다. 그런데도 김 팀장과 김 과장의 얼굴표정은 무덤덤했다. 두 사람의 얼굴에 금세 땀이 맺혀 뚝뚝 떨어진다.

“‘빼빠’(사포) 주세요.”
바깥에서는 맨홀로 갖가지 작업도구를 건넨다. 원래 2인1조로 작업을 하지만 그 이상의 인원이 필요할 때가 많다. 김 과장이 사포로 연결부위에 남아 있는 접착물을 떼어 냈다. 두 사람이 서 있는 쪽에 송풍기가 있어 바깥 공기가 계속 공급됐다. 오래된 열수축관을 새것으로 바꾸고 케이블선을 감쌌다. 다시 토치램프로 열을 가했다. 1미터 남짓 떨어져 있었지만 열기가 그대로 전달됐다. 6.6제곱미터 남짓한 공간이 순식간에 사우나로 변했다. 열을 가해 열수축관을 봉합하는 동안 연기가 피어올랐다.

“매듭짓는 부분을 잘 연결해야 공기가 새지 않아요.”
작업을 마치고 ‘C-87, 1~3600p/s’라고 적었다. 케이블선 안에 3천600개의 전화회선이 지나간다는 뜻이다.
“맨홀 위아래 모두가 호흡이 잘 맞아야 작업을 원활히 할 수 있습니다.”
맨홀 안에서 작업을 하다 보니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금방 옷이 더러워지는 것은 물론이고, 어떨 땐 맨홀 안에서 뱀이 나온다. 특히 시장이나 바닷가 근처 맨홀은 각종 오물로 유달리 악취가 심하다고 한다.
점점 줄어드는 현장요원

가장 힘든 일 중 하나는 민원업무다. 전화선을 옮겨 달라는 재배선 업무 또는 증설작업이 그것이다. 고객들은 빨리 처리해 주기를 바라지만 작업자는 한정돼 있다.
“급하게 재배선 작업을 해 달라거나 회선이 모자란다고 증설작업을 요구하면 참 힘들죠.”
인천지사에서 관리하는 가입자는 20만명 정도. 전화·인터넷 회선을 깔아 주고 유지·보수 업무를 맡는 현장요원은 6명에 불과하다. 개통업무 담당직원은 따로 있다. 보통 2명이 1조로 작업을 한다. 안전하게 작업을 하려면 인원이 보충돼야 한다. 시민들이 자칫 맨홀에 빠지지 않도록 길을 안내하고, 차량의 이동을 통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국 320여개 KT 지사에 있는 CM요원은 400여명. 과거에는 3천명에 달했다고 한다. 인터넷 보급으로 업무가 늘어났음에도 정작 인원은 크게 줄어든 것이다. 특히 제조업 현장의 자동화와는 달리 CM 현장요원들이 하는 일은 아직까지 사람이 직접 손으로 해야 하는 일이다. 그것도 5년 정도는 돼야 작업을 손에 익힐 수 있다.

하지만 인원충원 소식은 좀처럼 들려오지 않는다. 1년에 100여명의 신입사원이 KT에 입사하지만 현장으로 배치되는 인원은 거의 없다.
“올해 19년차인데 여전히 막내입니다. 18년 전에는 5명이 함께 일했었죠.”
이정화씨의 말이다. 김응민 팀장은 “최소한 3인 1조는 돼야 한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임시직으로 보조를 해 주는 인원이 있기도 했어요. 임시직으로 들어와 정규직으로 전환되기도 했고요.”

92년 KT에 입사한 김정수 과장은 아내와 작업을 같이하기도 했다.
“아내가 현장에서 보조업무를 하다가 사무실로 옮겼는데 3년 뒤에 결혼을 했죠.”
지금도 산간오지에서 전화 개통업무를 하기 위해 직접 전봇대를 어깨에 이고 전화를 설치해 주는 노동자들이 있다. 기계장비가 들어갈 수 없는 지역에서는 삽으로 땅을 파고 통신 전주를 심어야 한다. 기업의 이윤만 고려한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고객이 사유지라며 통신 전주를 옮겨 달라고 민원을 제기하면 전주를 뽑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

KT는 2002년 민영화됐지만, KT노동자들은 여전히 보편적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최근 KT와 KTF의 통합 과정에서 경쟁사들이 필수설비 분리를 요구한 것에 대해 노조가 반발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김구현 위원장은 “KT노동자들은 수십 년 동안 길 위에서 더위와 추위를 견디며 보편적 서비스를 제공해 왔다”며 “다른 경쟁업체들과 똑같은 사업자로 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맨홀(manhole)이란
맨홀은 노면에서 지하공간으로 사람이 출입할 수 있게 만든 구멍이다. 관의 굵기나 방향이 바뀌는 곳, 기점이나 교차점, 길이가 긴 직선부의 중간에 설치된다. 시공하기가 수월한 원형 모양이 가장 많고, 보통 지름이 60센티미터 정도인 주철 또는 철근콘크리트로 만든다. 현재 국내에서 사용되는 맨홀은 용도에 따라 상하수도·전기·소방용 등으로 분류된다. 모양이 제각각이다.

 
KT노조(위원장 김구현)의 중앙본부 정책기획실은 매달 지부로 2박3일 파견을 나간다. 이른바 ‘이동정책실’이다. 정책기획실 중앙상무집행위원이 지역을 순회하며 조합원의 고충을 듣고 개선사항을 접수한다. ‘현장과 함께하는 노동조합’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출범한 10대 집행부가 현장 중심의 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올해 처음 시도하는 것이다.
지난 2월 강원지역을 시작으로 4월에는 충북지역을 순회했다. 지난달 단체교섭을 마무리한 뒤 이달에는 인천지역을 순회했다. 현장을 찾은 이동정책실 간부들은 직접 조합원들과 함께 현장에서 가설과 정비·영업·망 관리 등의 업무를 체험한다. 간부가 현장을 체험하고 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파악해 시정조치한다.
전형집 정책1국장은 “처음엔 조합원들이 말도 잘 안 하다가 현장에서 작업을 같이하고 나면 동지애가 생겨 속마음을 열기 시작한다”며 “그때부터 스스럼없이 고충을 들을 수 있다”고 전했다. <매일노동뉴스>가 현장을 방문한 지난 15일, 이동정책실에는 김구현 노조 위원장도 함께했다. 한 조합원은 “20여년 가까이 회사를 다녔지만 현장에서 위원장과 직접 작업을 해 본 것은 처음인 것 같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이날 오후 조합원들과 간담회를 갖고 의견을 수렴하기도 했다. 김 위원장은 "간담회에서 나온 의견 중 당장 개선해야 할 사항은 회사에 바로 건의한다"고 말했다. 조현미 기자




◇노사협력으로 산업안전활동 강화= KT노조에 따르면 KT의 재해율(노동자 100명당 재해자 비율)은 매년 감소하고 있다. 2004년 0.226에서 지난해 0.153까지 줄어들었다. 지난해 전체 노동자 3만7천878명 가운데 재해를 당한 노동자는 58명이었다. 2007년 대비 9.4% 감소한 수치다.<표 참조>

산업안전보건 활동에는 노사가 따로 없다는 인식하에 공동사업을 벌이고 있다. 매년 5월 노사가 함께 산업안전보건대회를 여는데 올해로 8회째를 맞았다. 사업장에서 발생한 사고사례는 전국 사업장 순회전시회에서 직원들이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게 한다. 정기적으로 작업환경측정을 실시하고 전 사원을 대상으로 매년 질병·직업성 질환 조기발견을 위한 종합건강검진을 실시하고 있다. 안전보건관리책임자와 명예산업안전감독관은 매월 4일을 안전점검의 날로 정하고, 현장의 안전조치 미흡사항에 대해 지도하고 있다. 이런 활동들이 성과를 거둬 지난해 407개 사업장 가운데 352개 사업장에서 무재해를 달성했다고 노조는 밝혔다. 조현미 기자




 
<2009년 6월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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