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정현(가명·51)씨는 외환위기 직전인 96년 12월 구조조정으로 은행을 그만 둔 뒤 10여년 간 ‘비정규직 인생’을 살고 있다. 최근까지 다녔던 은행에서도 지난 1월말 계약해지를 당했다. 김씨가 거친 은행만 세 곳. 잠시 국민연금공단 비정규직으로 근무한 것을 제외하면 은행 비정규직으로 12년을 살아온 것이다. 83년 스물다섯 살에 정규직 은행원으로 일을 시작해 쉰이 넘은 지금도 은행업을 떠나지 못했다. 일을 할 수만 있다면 비정규직이건 후선업무건 따지지 않았다. 1년짜리, 심지어 3개월짜리 계약도 맺어봤다. 최근 금융위기 여파로 다시 실직자 신세가 된 김씨의 한숨은 깊었다. “아이들은 커 가는데 벌이는 시원찮고 살림살이도 각박해졌어요. 삶이 쪼그라드는 것 같아요.”

#2 박성철(39)씨는 최근 경기침체 소식에 좌불안석이다. 과거 일터에서 내쫓긴 경험이 있어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다. 2001년 2월 GM대우(당시 대우자동차)에서 1천725명에 달하는 대규모 구조조정이 진행될 때 박씨도 회사를 나와야 했다. 그리고 2년 뒤인 2002년 12월 어렵게 복직됐다. 남들보다 일찍 회사로 돌아갔지만 2년의 기간은 그에게 힘겨운 세월이었다. 요즈음 그는 또다시 일자리를 잃진 않을까하는 두려움을 안고 살고 있다. “정리해고가 있었던 그 해에 결혼을 했어요. 날짜를 잡을 당시만해도 정리해고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한동안은 장모님에게 실직 사실을 숨기려고 대우자동차 작업복을 입고 다녔죠.” 박씨는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서 건설일용직으로 날품팔이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다시는 그 옛날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3 모 공사에 다니던 신주형(가명·57)씨는 지난 98년 초 명예퇴직을 했다. 당시 정부의 지침으로 공기업에도 구조조정 광풍이 불었다. 퇴직금과 동료들이 한푼 두푼 모아 준 퇴직위로금을 털어 의류업에 뛰어 들었다. 공기업에 다닌 경험밖에 없다보니 쉽지 않았다. 고전을 면치 못하다 4년 만에 1억원가량을 모두 날렸다. 신용불량자로 전락했고 더 이상 경제활동이 불가능해졌다. 가정은 깨졌고 아이들도 엇나갔다. 현재는 작은 건설업체에 관리자로 근무하고 있다. 이마저도 건설경기 불황으로 위태위태하다. 퇴직 직후에는 함께 근무했던 동료들과 가끔 만나 술자리도 갖고 안부도 주고 받았는데 지금은 아예 연락을 끊었다. “시간이 갈수록 비참하다는 생각만 들어요. 무엇을 하든 자신이 없어요. 공기업을 신의 직장이라고 부르는 소리만 들으면 과거 생각에 가슴이 미어집니다.”

경제위기는 멀쩡하던 인생을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트린다. 잘 나가던 은행원이 비정규직으로 전락하고, 멀쩡한 대기업 직원은 노가다판으로 내몰렸다. 외환위기로 자의반 타의반 길거리로 내쫓긴 사람들의 삶은 말 그대로 비참했다. 실태조사 결과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대부분 빈곤층으로 전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규직→비정규직→실직

외환위기 당시 퇴출된 은행원들 중 많은 수가 비정규직으로 재취업했다. 지난 2003년 한국노동연구원 통계에 따르면 금융업에 종사했던 경험자 64.7%가 재취업 과정에서 정규직으로 취업하지 못했다. 실제로 한 언론사가 지난 98년 퇴출된 동화은행 퇴직자들의 재취업 실태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조사대상 229명 중 84명(36.7%)이 비정규직으로 전락했고, 20명(8.7%)은 실직상태인 것으로 나타났다.
함께 퇴출된 충청은행 출신들의 실태는 더 끔찍하다. 한국빈곤문제연구소가 지난해 내놓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전체 조사대상 235명 중 111명(23.9%)이 무직상태였다. 금융관련업 비정규직은 24명(10.2%), 비금융관련업 비정규직은 55명(23.4%)에 달했다. 은행권을 뺀 다른 업종의 경우 통계를 찾기 어렵지만 공기업·제조업 등에서 쫓겨난 사람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퇴직자 자살률 230배

한 공기업노조 관계자는 “외환위기 당시 대부분의 공기업에서 적게는 10% 많게는 30%까지 인력구조조정이 진행됐는데 퇴직한 직원 대부분의 연락이 두절된 상태”라고 말했다. 사무직의 경우 공인중개사 등으로, 기술직인 경우 관련 일반 기업에 재취업됐지만 많은 사람이 실직했거나 어려워졌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것이다.

최근 다시 시작된 경제위기로 그나마 유지하고 있던 생계터전마저 위협받고 있다. 심각한 것은 이들이 경제빈곤뿐 아니라 심리빈곤까지 겪고 있다는 점이다. 가정파탄으로 이어지거나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우리나라 자살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경제상황 악화로 자살률이 급증했다는 설명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10만 명 당 자살로 인한 사망자 수가 24.8명으로 세계 1위를 기록했다. 일본(24명)·벨기에(21.3명)·핀란드(20.35명)보다 높은 수치다. 미국은 11.1명이다.

실제로 동화은행 퇴직자 대부분이 ‘더 우울해졌거나(108명) 절망감(60명)’을 느끼고 있다고 답했다.<그래프 참조> 조사대상 중 30% 이상은 자살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충청은행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178명이 부부갈등을 경험했고, 이중 47명은 별거를 했다. 이혼한 사람도 17명에 달했다. 5명(5.3%)은 자살을 선택했다. 빈곤문제연구소 관계자는 “충청은행 퇴출자의 자살자율은 한국사회 전체 자살인구비율보다 무려 230.4배나 높다”고 지적했다.
다시 몰아닥친 경제위기로 빈곤층의 삶은 또다시 벼랑 끝에 놓이게 됐다. 경제위기가 시작되자 금융권들은 잇따라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일순위는 은행권 비정규직. 비정규직으로라도 생계를 연명하던 이들은 김정현씨처럼 다시 길거리로 내몰릴 위기에 처했다.

 

다시 몰려드는 실업 공포

제조업에도 경제한파가 몰아치고 있다. 제조업을 떠받치고 있던 자동차산업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종사자들은 대규모 구조조정에 내몰리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다.
한번 대규모 구조조정을 겪은 GM대우직원들의 불안감은 더욱 크다. 박성철씨는 “현장 조합원들이 과거처럼 정리해고가 진행될까봐 불안해 한다”며 “해고경험이 있던 분들은 더 위축돼 있다”고 전했다. 고용안정만 확보 되면 모든 것을 수용하겠다는 직원이 많다고 전했다. 최근 법정관리에 들어간 쌍용자동차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자금난으로 2월 직원들에게 급여를 지급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쌍용차는 잔업과 특근이 중단된 것은 물론 지난해 말부터 휴업을 반복해 직원들의 실질임금이 크게 떨어진 상태다. 쌍용차 평택공장 관계자에 따르면 15년차 생산직 직원의 경우 세금 등을 떼고 나면 고작 50~60만원을 받는다. 일부 직원은 대리운전 등 ‘투잡’을 하고 있다. 주부들도 팔을 걷었다. 지난 25일 열린 ‘구인·구직자 만남의 행사’에 지역주민들은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 평택시 관계자는 “최근 쌍용차법정관리로 인해 주부들이 대거 생활전선에 나서고 있다”며 “쌍용차 위기가 지역경제 위기로 번지고 있다”고 말했다.

외환위기 때와 차원이 달라

정부는 지난 11년 동안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비정규직 문제와 심화된 사회양극화 부작용을 해소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역량·비용을 쏟았다. 전문가들은 무분별한 인력구조조정이 계속되면 더 큰 부작용이 발생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최영기 노동연구원 석좌연구위원은 “이번 경제위기가 노동시장에 가할 충격은 외환위기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말했다.
그나마 외환위기 때는 연명할 ‘총알’이라도 있었다. 10년 전에는 공기업·재벌 대기업·금융기관 등 1차 노동시장의 정규직 노동자들이 주된 고용조정 대상이었고, 기업들은 명퇴금을 챙겨줄 여유가 있었다. 실직자들은 목돈을 갖고 전업과 전직을 모색할 수 있었다. 일부는 비정규직 일자리라도 찾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기업도 노동자들도 더 이상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최 연구위원도 “좋지 않은 고용사정 속에서 제2의 고용쇼크가 오면 충격은 클 것”이라고 경고했다. 빈곤층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수밖에 없고 이는 경제위기 극복을 어렵게 하는 걸림돌로 작용해 악순환이 계속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우리나라 실질실업자는 약 350만명으로 추산된다. 올해 마이너스 성장으로 경제위기가 심화되면 400만명이 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분석이다. 일자리를 잃거나 구하지 못해 생존권이 벼랑 끝에 몰릴 경우 극단적 선택은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이 인력구조조정 자제와 취약빈곤층에 대한 집중 지원을 정부와 기업에 주문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워지지 않는 아픔이 다시 두려움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는 박성철씨, “한 번 밀리기 시작하면 끝없이 내몰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는 김정현씨의 얘기가 예사로 들리지 않는다.



김봉석 기자 seok@·신현경 기자 joeun@



<2009년 3월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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