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시장통합법 집중분석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에 관한 법률’이 4일 시행된다. 노동계는 국내 금융시장이 ‘도박판’으로 변질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법 시행과 경제위기가 맞물리면서 금융업종 구조조정도 예상된다.



캐터필러(미국 중장비업체) 2만명, 와이어스(미국 제약업체) 1만9천명, IBM 2천850명, 제너럴모터스(GM) 2천명….
지난달 26일(현지 시간)과 27일 이틀 간 미국으로 부터 대대적인 인력감축 소식이 전해졌다. 지난해 4분기 미국 기업들의 실적은 심각했다. 미국뿐 아니라 유럽과 일본의 주요 기업들도 이날 하루에만 10만명 가까운 인원을 감축하겠다고 발표했다. 미국 노동통계국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미국 50개주 모두에서 실업률이 상승했다. 오일쇼크가 터진 76년 이후 33년만이다. 낮은 실업률을 자랑해 왔던 미국의 체면이 구겨진 것이다. 노동통계국이 지난달 27일 발표한 지난해 12월 미국 내 실업률은 7.2%로 전년 동기 4.9%보다 크게 높아졌다.

잘나가던 미국식 금융시스템

미국 경제난의 원인인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 사태에 따른 주택시장 침체도 여전하다. 미국의 20개 대도시 집값은 사상 최대로 추락했다. 2003년부터 2006년까지 52%나 올랐던 미국의 집값은 2006년부터 곤두박질치고 있다. 소비심리도 얼어붙었다. 미국 소비자 신뢰지수는 37.7로 떨어졌는데, 지난 67년 통계를 내기 시작한 이후 최저 수준이다. 미국경제는 대규모 감원, 실업률 증가, 집값하락, 소비침체라는 ‘4중고’를 겪고 있다.
미국의 위기는 어디서 시작됐을까. 그동안 미국은 금융시스템, 특히 투자은행(IB)분야에서 세계 최고를 자부해 왔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미국경제를 뒤흔든 원흉은 투자은행이다. 미국 금융위기는 상업은행(CB)과 투자은행(IB)의 동반부실에서 비롯됐다.
상업은행은 고객의 예금을 받아 돈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대출해 준다. 자금은 예금을 통해 상업은행으로 흘러들어갔다가 대출을 통해 기업 등 필요한 곳에 전달된다. 이 과정에서 예금은 은행의 부채가 되고 대출은 은행의 자산이 된다. 반면 투자은행은 주식이나 채권 등 증권이나 파생상품이 거래되는 자본시장이 있어야 한다.
자금이 필요한 기업은 주식이나 채권을 발행해 시장에 팔고, 증권과 파생상품을 투자자들이 매입하면 매수대금이 기업으로 흘러들어가 기업의 자금이 된다. 투자은행은 이 과정에서 증권과 파생상품에 대한 중개와 자기자금투자, 자문 등 다양한 업무를 한다. 투자은행은 주택담보대출에도 손을 뻗쳤고 주택대출담보부증권을 만들어 거래하기 시작했다. 주택담보대출→유동화→자금회수 과정을 거치며 막대한 이익을 얻게 된 것이다.

투자은행들은 급기야 비우량 소비자에게까지 담보대출을 해 줬다. 주택가격이 떨어지면서 거품이 붕괴됐고 투자은행은 부실을 떠안게 됐다. 결국 미국의 프레디멕과 패니메이 등 금융기관이 국유화됐고 리먼브러더스는 파산신청을 했다. 투자은행의 드림으로 여겨졌던 메릴린치는 100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게 됐다.
지난해 9월 리먼브러더스 파산을 도화선으로 시작된 투자은행의 파산은 상업은행까지 위험에 빠뜨렸다.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경제학 교수는 최근 “글로벌 은행들의 신용위기 손실이 현재의 세 배가 늘어난 3조달러에 달할 것”이라며 “정부 지원이 없으면 1천500개가량의 미국 지방은행이 파산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 모델로 탄생한 자통법

4일 시행을 앞둔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자통법)은 투자은행 중심의 미국 금융시장을 모델로 만들어졌다.<표1 참조>
자통법은 증권거래법·선물거래법·간접투자자산운용업법·신탁업법·한국증권선물거래소법·종합금융회사에관한법률·기업구조조정투자회사법 등 7개 법률을 통합한 것이다.
각 법률에 따라 역할이 나뉘었던 증권·선물·자산운용·신탁·종금사는 통합돼 금융투자회사로 재탄생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금융시장은 은행-보험-금융투자회사의 3대 축으로 재편된다. 특히 금융투자회사는 투자매매업·투자중개업·자산운용업·투자자문업·투자일임업·자산보관관리업 등 6개 금융투자업을 자회사를 통하지 않고 직접 수행할 수 있게 된다. 투자상품 판매 절차와 규율체제도 바뀐다. 금융투자회사는 모든 금융투자상품을 설계하고 취급할 수 있다. 예컨대 금융당국에 신고만 하면 날씨·재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품을 개발하고 판매할 수 있다.

열거된 금융투자상품만 허용되는 ‘열거주의’에서 ‘포괄주의’로 바뀌는 것이다. 이와 함께 금융기관을 불문하고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면 동일한 규율을 적용받게 된다. 지금까지는 같은 펀드상품을 판매해도 ‘간판’이 다른 은행과 증권사는 각각 다른 규제를 받았다. 아직 은행과 증권사 간 협의가 끝나지 않아 잠시 미뤄졌지만 금융투자회사는 은행의 고유 업무였던 지급결제기능까지 수행할 수 있게 됐다. 정부와 대형증권사들은 자본시장 규제완화와 겸업화로 세계적인 투자은행 육성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금융상품의 포괄주의가 투자은행의 경쟁력을 강화시킬 수 있다고 전망한다.

 
박준현 삼성증권 사장은 지난달 20일 ‘자본시장통합법 시행기념 국제세미나’에서 “앞으로 10년 안에 글로벌 증권사와 경쟁할 수 있는 1~2개의 국내 증권사가 탄생한다면 자통법 시행이 성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며 “앞으로 증권업계는 3~4개 종합 증권사와 특화된 증권사로 재편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노동계는 정부가 국내 재벌과 초국적 금융자본의 요구와 이해를 전격 수용한 것으로, 국내 금융시장을 ‘도박판’으로 만들 것이라고 우려한다.<표2 참조>
다양한 경제주체(특히 기업)에 장기자금을 공급한다는 자본시장 고유의 사회적 역할은 사라질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한진 진보금융네트워크 준비위원은 “자통법은 자본의 중개라는 금융의 본원적 기능보다는 초국적 자본과 재벌에게 금융을 수익창출의 도구로 이용하게끔 하는 것”이라며 “금융자본의 수익극대화를 위한 자산운용 측면만 강조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사모펀드 규제완화와 헤지펀드 허용을 놓고도 의견이 나뉜다. 정부는 자본시장 내 경쟁력 있는 플레이어 육성으로 금융시장의 효율성과 경쟁력이 강화될 것이라고 낙관한다. 반면 노동계는 글로벌 금융위기에 사모·헤지펀드의 투기적 행태는 위기를 심화시켰고, 사모·헤지펀드의 규제를 강화하는 세계적 추세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대와 회의 교차

당장 가시적으로 나타나진 않더라도 자통법 시행으로 금융산업의 일대 변화는 불가피할 전망이다. 당장은 우려가 높다.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 국가들이 규제강화를 추진하는 상황에 우리만 규제완화를 강행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11월 워싱턴에서 열린 첫 G20정상회담에 참석한 각국 정상들은 강도 높은 금융개혁과 재정지출에 따른 경기부양책 강화, 금융위기 재발 방지를 위한 금융시스템 규제·감독에 협조하기로 하는 공동선언문을 발표한 바 있다. 우리만 역주행을 하고 있는 셈이다.
무엇보다 경제위기 상황에서 굳이 법 시행을 강행해야 하냐는 목소리가 높다. 많은 금융전문가들과 노동계는 자통법의 모델이었던 미국 금융시장이 무너졌고, 전 세계에 금융위기가 몰아친 상황에서 예정대로 법을 시행하는 것은 경제위기를 가속화 시킬 수 있다고 우려한다. 민경윤 현대증권노조 위원장은 “자통법은 자본시장을 활성화시켜 투자를 늘리겠다는 건데 현재 같은 경기침체 상황에서 누가 투자에 나서겠냐”고 말했다. 

 
지금 필요한 건 ‘은행지원 강화’

그는 “설사 자통법이 시행돼 은행의 자금이 파생상품으로 전환된다고 해도, 이는 은행의 부실화만 키워 경제를 파탄낼 것”이라며 “지금은 자통법 시행이 아니라 은행 지원을 강화할 때”라고 강조했다. 최대 수혜자로 꼽혔던 증권업계에서도 회의적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기대한 대로 ‘한국판 골드만삭스’로 상징되는 글로벌 금융투자회사가 탄생할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한다.
현재 국내 대형증권사들의 자기자본은 글로벌투자은행의 10분 1에도 미치지 못한다. 리스크 관리 능력 등 내부 인프라도 글로벌투자은행보다 상당히 취약하다. 그나마 자통법 시행을 앞두고 투자은행 투자에 적극 나섰던 증권사들조차 경제위기가 도래하자 앞다퉈 투자를 중단하거나 아예 철수해 버렸다.
투자은행인력도 대거 구조조정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투자은행에 투자자금이 들어와야 하는데 펀드도 반토막 난 상황에서 누가 자금을 넣겠냐”며 “지금으로서는 투자은행에 대한 환상이 없다”고 말했다. 일부 증권사들은 자통법에 대한 준비를 미루고 틈새전략을 세우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2009년 2월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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