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대란 극복방안 공방의 허와 실

실업대란이 임박했다. 정부는 ‘일자리 나누기’를 해법으로 제시했다. 임금을 삭감해 일자리를 나누자는 것이다. 정부의 이러한 제안을 경영계는 환영하고 노동계는 외면한다.
실업대란을 막기 위해 일자리 나누기가 필요하다는 데에는 공감하지만 실현 방법에 대해선 의견이 다른 것이다. 실업대란 극복 방안을 둘러싼 공방의 허와 실을 살펴봤다.

‘일자리 나누기’(Job Sharing)가 연초부터 우리 사회의 화두다. 노동계에서 시작된 일자리 나누기 제안은 정부와 재계로 확산됐다. 노사정이 제안하고 있는 일자리 나누기에는 ‘지키기’·‘나누기’·‘만들기’ 등의 개념이 포함돼 있다. 노사정 모두 최종 목표지점은 다르지만 임박한 실업대란을 막아야 한다는 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각 주체들이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는 인식도 동일하다. 고통분담으로 위기를 극복한다는 취지에서 일자리 나누기는 논의 활성화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모두 가진다. 그러나 노사정이 일자리 나누기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르다. ‘누가 어떻게 고통을 분담할 것인가’에 대한 견해 차이가 뚜렷하다. 노사정 모두 상대방을 향한 요구사항만 나열하고 있다. 고통분담 방안은 내놓지 않고 있다. 경제위기극복의 방안이 일자리 나누기라는 사실에는 공감하면서도 해답에 이르는 과정에서 이견을 보이고 있다.



쏟아지는 일자리 나누기 제안

물론 노사정이 마음을 모았다고 해서 일자리 나누기가 당장에 성사되는 것은 아니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달라진 경제·산업·노동시장 구조는 일자리 나누기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경제위기 극복방안이라는 일자리 나누기는 이뤄질 수 없는 대안일까. 일자리 나누기 제안은 국내 최대 산업별노조인 민주노총 금속노조에서 시작됐다. 당시 금속노조 내에서는 사업장별로 진행되고 있던 비정규직 인력감축 등 구조조정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일자리 나누기를 정부·기업에 제안해야 한다는 논리가 작동했다.
금속노조의 일자리 나누기가 공개된 것은 지난 8일이었다. 금속노조는 이날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금속노조 사회선언’에서 노동시간을 단축해 일자리를 만들자고 정부와 재계에 제안했다.
금속노조는 노동시간 단축방안으로는 주간연속 2교대제 시행을 제시했다. 또 △국민기본생활 보장 △모든 해고 금지, 총고용 보장 △재벌기업 잉여금의 사회환원 △제조업·중소기업 기반강화 등의 요구안을 제안하고, 이를 위해 노·정, 노·사 교섭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노동계에서 제기된 일자리 나누기는 정부와 재계가 바통을 이어 받으면서 확산됐다. 이명박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일자리 나누기를 거론한 데 이어 지난 15일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는 고통분담 차원에서 임금을 낮춰 고용을 늘리는 일자리 나누기가 위기극복 방안으로 제시했다. 대통령의 말 한 마디는 정부방침으로 이어졌고 29일에는 일자리 나누기 활성화방안을 발표했다. 정부방안에는 △임금삭감액의 일정비율 세법상 손비처리 △고용유지지원금 규모 확대 △실업급여ㆍ퇴직금 산정의 특례 도입 등이 포함됐다. 세제부문 혜택을 제외하면 이미 연초에 고용유지방안으로 발표된 내용이다.
정부의 활성화방안 발표에 앞서 한국노총과 한국경영자총협회는 22일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민정 비상대책회의’ 구성을 제안했다. 업계 관계자는 “불황국면에서 일자리정책은 있는 일자리를 나누는 것 외에 뚜렷한 방안이 없다”며 “과거 노동계의 요구사항을 정부와 재계에서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사정 일자리 나누기 ‘동상이몽’

일자리 나누기란 임금삭감 또는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일자리를 유지하거나 창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노사정 모두 일자리 나누기라는 같은 단어를 사용하면서도 상대방의 제안에는 동의하지 않고 있다. 노동계의 제안에는 정부·재계가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정부의 지원방안 발표는 노동계가 외면했다.
한국노총과 경총의 노사민정 비상대책회의 구성 제안은 정부에서 환영을 표시했지만 민주노총이 거부했다. 노사정의 간극은 일자리 나누기에 대한 핵심 전제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정부의 고용안정대책은 임금삭감에 중점을 두고 있다. 노동계는 정부·기업에 고통분담을 요구하면서 임금삭감에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재계는 비정규직 고용기간 확대와 최저임금 적용기준 완화 등 일자리 나누기와는 다소 동떨어진 주장을 펴고 있다. 또 비정규직 문제가 정규직의 과보호로부터 비롯됐다며 정규직의 고용경직성을 완화하지 않고서는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공세를 취하고 있다. 결국 일자리 나누기에 대한 서로의 주장만 나열되고 있는 실정이다. 무엇보다 일자리정책을 주도해야 할 정부가 앞장서 임금감소부터 거론했다. 김성희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은 “98년 외환위기 시절, 정부·기업의 정리해고와 노동계의 일자리 나누기는 대립되는 개념이었다”며 “지금은 정부와 기업에서 일자리 나누기를 임금감축과 정규직 양보를 전제로 사용하는 용어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정부의 일방통행이 대화 가로막아

노와 사가 섣불리 일자리 나누기에 화답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경제의 불확실성이다. 국내 제조업의 생산량은 지난해에 비해 25%가량 감소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일부 차종을 제외하고 잔업과 특근을 중단한 완성차업계가 대표적이다. 완성차업계는 통상적으로 연말에 작성하던 연간 사업계획을 올해는 내놓지 않고 있다. 대신 시장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분기별로 사업계획을 세우고 있다. 노와 사가 서로의 제안을 외면하고 있는 가운데 나온 것이 지난달 29일 정부가 발표한 일자리 나누기 활성화방안이다.
공공·민간, 중앙·지방, 대·중소기업 등 모두가 참여하는 국가 차원의 일자리 나누기를 목표로 제시했지만 실효성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임금삭감을 전면에 내세운 정부의 밀어붙이기가 현장에서 접목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외환위기 시기인 98년을 되돌아보면 당시 임금을 삭감·반납한 사업장은 전체 사업장의 19.1%(981곳)에 불과했다. 심각한 고용위기 상황에 비해 일자리 나누기 관련 지원사업 예산이 너무 적다는 분석도 나온다. 정부는 고용유지지원금 규모를 현재 600억원에서 1천400억원으로 증액할 방침이지만 경기침체가 계속될 경우 이마저도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유급휴가 대체인력 지원금이나 임금피크제 보전수당, 노동시간단축지원금 규모도 30억~50억여원에 불과하다. 현재의 재원상태로는 정부의 대책이 미봉책에 그칠 공산이 크다.
때문에 노동자의 임금삭감을 전제로 한 정부의 설익은 정책이 일자리 나누기에 대한 논의를 가로막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금속노조 관계자는 “잔업과 특근이 줄어 상당한 수준의 임금이 줄었다”며 “여기에서 더 깎으라는 것은 노동자에게만 부담을 이중으로 전가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앞뒤가 맞지 않는 정부의 정책도 노동계의 불신을 받고 있다. 지난해 12월 농어촌공사의 인력감축을 칭찬하던 이명박 대통령은 최근 “공기업과 금융기관이 먼저 대졸 신입사원 월급을 낮춰 일자리를 늘리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정부가 연초부터 추진 중인 공공기관 선진화 추진계획에 따르면 앞으로 3~4년 동안 69개 공공기관은 모두 1만9천명을 감원해야 한다. 정부가 일자리 나누기를 강조함에 따라 한국전력 등 공공기관은 신입사원 초임을 감축하고 행정인턴 채용 늘리기에 앞장서고 있다.



일자리 나누기 사실상 어려울 수도

이렇듯 일자리 나누기에는 정부의 정책혼선과 노와 사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외환위기 시기와는 달라진 경제구조도 일자리 나누기를 개별 사업장에 무분별하게 적용하기에는 걸림돌이 된다. 일자리 나누기는 현재의 노동시간을 줄이고, 줄어드는 노동시간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는 개념이다. 일자리 나누기가 성립하려면 생산량·생산시간이 경제위기 이전에 비해 크게 줄지 않아야 한다. 외환위기 시절의 성공한 일자리 나누기 모델로 꼽히는 유한킴벌리의 근무제 개편도 생산량이 동일하게 유지되는 상황에서 적용됐다.
그런데 현재의 경제위기는 외환위기 상황과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외환위기는 우리나라와 태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의 외환수급 문제였다. 전 세계를 기준으로 국지적인 경제위기였다. 국내 경제는 내수의 침체가 있었지만, 수출이라는 활로가 존재했다.
반면 현재의 경제위기는 미국발 금융위기에서 시작돼 전 세계로 파급되고 있다. 금융위기의 밑바탕에는 과잉생산의 문제가 깔려 있다. 국내 경제는 내수와 수출의 동반 감소에 직면하고 있다. 외환위기가 수출활성화를 통해 단시간 내에 극복됐다면 현재의 경제위기는 2년이상의 기간이 소요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당장 나눌 수 있는 노동시간이 있는가의 문제도 불거진다. 지난해말 노동계 일각에서 검토됐던 잔업과 특근을 줄여 일자리는 나누자는 방안은 더 이상 적용이 불가능해 졌다. 국내 제조업 현장에서 잔업과 특근은 사실상 없어졌기 때문이다.

노동시장의 구조도 변했다. 일자리는 나눠줘야 하는 정규직보다 나눠가져야 하는 비정규직이 더 많아 졌다. 노동시장의 주변부에 위치하고 있는 비정규직이 99년을 기점으로 50%를 돌파해 2001년부터 55~56%대를 형성하고 있다. 빈약한 사회안전망도 노동자들이 일자리 나누기를 수용할 수 없는 원인 가운데 하나다.
노사정의 뜻도 모아지지 않고 경제구조도 변화된 상황에서 일자리 나누기를 위기극복 방안으로 적용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사정 사이의 일자리 나누기 공방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논의는 필요하다
일자리 나누기의 필요성 때문이다. 위기극복을 위한 다른 대안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고통분담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는 가장 손쉬운 접근 방법일 수 있다. 정부와 재계·노동계 등이 처한 시급한 상황도 일자리 나누기를 공론화시키고 있다. 경제가 점차 악화되고 고용대란이 발생하게 되면 정부와 재계·노동계 모두는 더 큰 시련을 겪게 된다.
집권 2년차에 접어든 정부는 조기에 경제위기와 고용대란을 봉합하지 못할 경우 내년부터 조기 레임덕을 겪을 공산이 크다. 기업 입장에서 일자리 확대는 붕괴된 수출시장 대신해 내수기반을 강화하는 견인차 역할을 할 수 있다. 노동계의 위기의식은 더 높다. 사업장 구조조정으로 인해 지난 10년 동안 조직화의 대상으로 삼았던 비정규직과 하청노동자들이 잘려 나가고 있다. ‘고용의 바람막이’ 역할을 해 온 비정규직과 하청업체에서 시작된 구조조정이 정규직으로 전이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외환위기 과정에서 전개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리가 또다시 재연되면 노동운동의 고립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로 인해 일자리 나누기를 포함한 경제위기 극복과 고용안정 방안을 위한 논의가 진행돼야 한다.
이상호 금속노조 정책연구위원은 “고용대란을 극복할 현실적인 대안이 없다는 것이 고민의 지점”이라며 “아무런 대책없이 위기에 직면하기보다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고용연대를 정착시켜 위기를 극복할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렇다면 일자리 나누기는 어떻게 도입되야 할까. 노사정이 진지하게 머리를 맞대 일자리 나누기를 포함한 다양한 고용안정 방안을 논의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밀어붙이기식의 일자리 나누기가 아니라 이해와 설득을 통한 고통분담이 이뤄져야 한다.
전제조건의 1순위는 노사신뢰다. 사업장에서부터 중앙단위로 이어진 불신풍조를 줄여야만 일자리 나누기와 같은 고용안정 방안이 도입될 수 있다.
기본 전제는 기업경영의 투명성이다. 기아자동차 생산직 이아무개(37)씨는 “일하는 시간 줄이고 돈을 좀 적게 받을 수 있겠지만 회사가 돌아가는 상황은 알아야 한다”며 “회사가 매년 하고 있는 어렵다는 말은 믿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투명경영·사회안전망 구축 등 접근 필요

사회안전망의 확대를 통해 국가가 사회적 임금의 일부를 책임질 필요도 있다. 교육·의료 등에 대한 지원확대다.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는 임금감소가 수반된다.
노동계층의 빈곤화로 연결된다면 일자리 나누기가 수용될 수 없다. 제조업에서 일반화된 임금체계인 시급제의 월급제 전환도 고민해야 한다. 제조업 현장에서는 노동시간이 곧 임금수준으로 연결된다. 시급제가 그대로 유지되는 한 기존 노동자들이 일자리 나누기를 수용하기란 쉽지 않다.
또 일자리 나누기 과정에서 대기업과 중소영세기업 간 양극화 극복도 고려해야 한다. 막대한 현금을 보유하고 있는 대기업은 자체적으로 일자리 나누기를 추진할 수 있지만 중소기업은 재정지원 없이 일자리 나누기가 어렵다. 여력이 부족한 사업장을 지원하기 위한 ‘산업별 고용안정기금’과 같은 지원방안이 필요하다. 일자리 나누기가 임시·일용직과 단시간 노동자 양산으로 이어져서도 곤란하다. 아울러 정규직의 적극적인 자세도 필요하다.

노동시간 단축 과정에서의 임금감소폭을 최소화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임영일 한국노동운동연구소 소장은 “이번 상황에서 벗어나면 내년부터는 나아진다는 단기적인 대응책을 세워선 안 된다”며 “일자리와 복지를 동시에 추구하는 중장기적 전망을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2009년 2월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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