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국민의 사망원인 1위인 암. 지난 2월 통계청이 발표한 ‘2008 한국의 사회지표’에 따르면 2007년 기준 사망원인 1위는 암이다. 인구 10만명당 137.5명이 암으로 사망했다. 그동안 암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 잘못된 생활습관으로 인한 병 등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의 백혈병 발병과 1급 발암물질인 석면 검출 등의 논란을 계기로 최근 ‘직업성 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암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암을 일으키는 원인인 발암물질부터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법. 관련 정보를 구축하고 발암물질을 감시하기 위해 민간 단체가 나섰다. 원진 노동환경건강연구소는 9일 오후 서울 중구 환경재단에서 시민·노동·환경 단체와 함께 ‘발암물질 감시네트워크’를 발족한다. 연구소 산하 발암물질정보센터도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직업성 암’에 대한 인식 부족

국제노동기구(ILO)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매년 60만9천명의 노동자가 직업성 암으로 사망하고 있다. 52초마다 1명이 직업성 암으로 사망하는 셈이다.

국내 상황은 어떨까. 우리나라는 분기별로 산업재해 통계를 발표하고 있지만 직업성 암에 대해서는 별도로 공표하지 않고 있다. 2006년 안연순 교수가 발표한 ‘우리나라 직업성 암 발생현황’에 따르면 99~2005년 산업재해보상보험법상 직업성 암으로 인정된 사례는 모두 149건이다. 호흡기암이 93건으로 가장 많았고, 조혈기암(50건)과 기타 암(6건) 등의 순이었다.

곽현석 발암물질정보센터 기획실장은 “1년에 약 20~30건 정도가 산재로 인정받고 있다”며 “외국의 직업성 암에 대한 규모를 추정한 보고와 비교할 때 직업성 암 인정규모가 매우 낮은 수준”이라고 말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직업병에서 암이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로 보고되고 있을까. 미국산업의학회는 2007년 1월에 발표한 논문에서 직업적 사망원인 1위로 암(32%)을 지목했다. 순환계질환(26%)과 업무 중 사고(17%)가 뒤를 이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06년 발표한 보고서에서 “개발도상국의 경우 일반 대중의 암 사망 중에서 직업적인 노출 때문에 발생한 암이 4~20%”라고 밝혔다. 작업장에서 직업성 암을 예방하면 매년 수백 만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지적도 빼놓지 않았다.

 
 



턱없이 적은 국내 발암물질 목록

국내에서 직업성 암으로 인정되는 사례가 적은 이유 중 하나는 정부가 지정하고 있는 발암물질의 범위가 좁은 것도 한몫하고 있다.
노동부 고시는 ‘화학물질 및 물리적인자의 노출기준’에서 56종의 물질을 발암물질로 규정하고 있다. 이 가운데 업무상질병 인정기준에서 정하고 있는 발암인자는 방사선 피복·염화비닐·크롬·벤젠·석면 등 7종이다. 건강관리수첩 발급대상 발암물질은 석면 등 14종에 불과하다.
WHO 산하 국제암연구소(IARC)는 71년부터 역학연구와 동물실험에 기초해 발암물질 보고서를 발간하고 있다. IARC는 발암성 평가 결과를 5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Group 1’은 인간에게 암을 일으키는 물질·혼합물·노출환경을 가리키는 것으로 지난해까지 105종이 발표됐다. ‘Group 2A’는 인간에게 암을 일으킬 개연성이 있는 물질로 66종, ‘Group 2B’는 인간에게 암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물질로 248종이다. ‘Group 3’에는 인간발암성 정도에 대해 분류가 불가능한 물질로 515종, ‘Group 4’는 인간에게 암을 일으킬 개연성이 없는 물질로 1종이 포함됐다. IARC는 이 가운데 직업적 노출이 문제되는 발암물질로 186종을 제시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노동부가 지정한 발암물질은 겨우 56종. 국내에서 직업성 암을 관리하기 위해 우선 발암물질 목록부터 다시 정비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9일 발족하는 발암물질정보센터는 발암물질에 대한 자료를 구축하고 현장 노동자들이 발암성 물질을 제대로 알 수 있도록 진단사업을 펼칠 예정이다. 시민·노동·환경단체, 전문가들과 네트워크를 구성해 발암물질 제품을 감시하고 정부에 제도 개선을 요구할 방침이다.
지난달 31일 서울 면목동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사무실에서 곽현석(39·사진) 발암물질정보센터 기획실장을 만났다.
“유럽에서는 산업별로 발암물질 노출인구를 추정하고 있습니다. 산업별로 발암물질에 노출되는 인구가 얼마나 되는지 확인할 수 있죠. 특정산업에 노출되는 인구가 많으면 그 산업을 집중적으로 관리합니다.”
곽 실장은 우리나라의 경우 발암물질과 관련한 정보가 제대로 구축돼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암 예방정책이 금연 프로그램이나 식습관 프로그램에 국한돼 진행되면서 직업성 암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그는 “생활습관으로 암이 발생한다는 주장은 한마디로 철지난 이론”이라고 말했다 .
“발암물질정보센터를 만든 이유 중 하나는 현장 노동자들이 자신의 사업장에 발암물질이 있는지 여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발암물질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개인 보호장비와 배기장치도 요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최근에서야 삼성반도체 백혈병 등을 계기로 직업성 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발암물질정보센터는 3년 전부터 발족 논의가 시작됐다. 석유화학 장치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화학물질 노출 문제가 관심을 받으면서부터다.
“대부분의 경우 암은 퇴직한 후에 발생합니다. 60~70%는 65세 이상에서 발생합니다. 일할 때 발암물질에 노출된 것을 모르고 그냥 퇴직하기 때문입니다. 퇴직 이후 암이 생기면 직업병으로 인식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직업성 암으로 산재 인정도 못 받고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겁니다.”
발암물질감시네트워크가 펼칠 활동 중 하나는 발암물질 대체물질 사용을 확대해 나가는 것이다. 곽 실장은 “발암물질 사용을 금지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석면 같은 경우 이미 다양한 대체품이 개발돼 있어요. 포름알데히드도 그렇고요. 외국에는 대체물질을 알려주는 사이트도 있습니다. 아직 대체물질이 개발되지 않았다면 노출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죠.”
곽 실장은 “직업성 암에 초점을 맞춰 활동을 시작하지만 결국 환경으로 인한 암 문제까지 영역이 확장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사업장에서 발암물질을 안 써야 폐수와 토양 등의 오염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대체물질 사용은 해당 사업장뿐만 아니라 지역주민의 건강까지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발암물질감시네트워크에는 노동환경건강연구소와 민주노총·한국노총·홍희덕 의원실·김상희 의원실·백도명 서울대 교수 등이 발기인으로 참여한다.


 <2009년 4월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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