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분리 완화를 규정한 은행법 개정안의 2월 임시국회 처리가 무산됐다. 한나라당이 3일 단독으로 정무위원회를 열어 강행 처리한 것에 민주당·민주노동당이 반발하면서 은행법 개정안은 법제사법위원회에조차 상정되지 못했다.
출자총액제한제 폐지를 담은 공정거래법 개정안은 본회의에서 표결처리됐다. 출자총액제한제는 재벌그룹 계열사가 순자산 40% 이상으로 다른 회사의 주식을 사지 못하도록 규정한 것이다. 출자총액제한제가 폐지됨에 따라 재벌그룹을 규제할 수 있는 장치가 사라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나마 재벌그룹이 은행을 소유할 수 있는 은행법 개정안 처리가 무산된 것은 다행이다. 은행법 개정안은 한나라당이 단독 처리할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금산분리 완화로 인한 후폭풍을 고려해야 한다.
은행법 개정안을 보면 산업자본이 보유할 수 있는 의결권 있는 지분이 현행 4%에서 10%로 늘어난다. 은행지분이 분산돼 있는 것을 고려하면 지분 10%를 보유한 산업자본은 단번에 대주주로 올라설 수 있다. 사모펀드투자회사(PEP)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는 규정도 문제다. 개정 법안에는 사모펀드에 대한 현행 10%의 산업자본 지분을 20%로 확대하도록 했다. 현재 사모펀드에 의한 은행소유는 아무런 제한이 없다. 사모펀드인 론스타가 소유하고 있는 외환은행이 대표적이다.

한나라당은 은행법 개정안이 ‘경제살리기 법안’이라고 강변한다. 금산분리 완화가 금융위기로 인해 유동성 부족을 겪고 있는 국내 은행의 자본확충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과 한국 외에 산업자본의 은행 소유를 막는 나라는 없다는 ‘역차별론’을 해소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금융기관을 ‘사금고화’한 것도 모자라 부실화시켰던 재벌기업의 행태를 고려하면 한나라당의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증권·투신·보험 등 재벌이 소유한 제2금융권의 부실사례만 봐도 그렇다.

98년만 해도 업계 1위였던 대우증권은 대주주였던 대우그룹의 부실을 막으려다 되레 부도위기에 내몰렸다. 결국 대우증권은 대우그룹의 부도로 7천억원의 빚만 떠안은 채 산업은행에 매각됐다. 당시 대우그룹은 대우증권 지분의 30%를 가지고 있었다. LG투자증권은 외환위기 시절 부도위기에 처한 LG종합금융을 인수했다. 모그룹인 LG그룹의 결정이었다. 계열사였던 LG카드 부실사태 여파로 LG투자증권은 지분 평가손실을 떠안았다. 급기야 LG투자증권은 2004년 우리금융지주회사에 매각됐다.

뿐만 아니다. 대한생명의 대주주였던 신동아그룹은 외환위기 직격탄을 맞자 부실 계열사에 대한 부당대출을 지시했다. 대한생명의 고객자산을 부실 계열사 살리기에 동원한 것이다. 공적자금이 투입된 대한생명은 2002년 한화그룹에 매각됐다.
산업자본이 금융기관을 소유할 경우 내부자금을 조달을 하거나 기업의 부실을 떠안을 수밖에 없었던 사례들이다. “그룹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총수의 말 한 마디에 금융기관이 복종한 것이다. 재벌그룹 총수들이 세습을 위해 금융기관을 악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때문에 총수에 의해 지배되는 산업자본이 은행을 소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국내자본의 역차별론도 마찬가지다. 세계에서 우리나라처럼 산업자본이 보험·증권·투신사를 계열사로 지배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외국의 경우 산업자본의 은행소유를 법으로 금지하지 않지만 금융 관행이나 금융감독당국이 정책으로 금산분리 원칙을 잘 지키고 있다.
한국과 같이 산업자본의 은행소유를 금지한 미국의 최근 정책방향은 우리와 정반대다. 대표적인 산업자본이자 금융계열사를 거느린 GM·제너럴 일렉트릭(GE) 등은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금융계열사에다, 모그룹의 부실이 겹쳐 몸살을 앓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산업자본의 금융계열사 지배에 대한 규제를 검토하고 있고, 부실한 거대은행의 국유화를 추진하고 있다. 우리나라만 이러한 추세에서 역주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나라당이 은행법 개정안을 ‘경제살리기 법안’이라고 하니 어이가 없다. 철저히 재벌의, 재벌에 의한, 재벌을 위한 법안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은행법 개정안의 국회 본회의 통과가 무산된 것은 당연하다. 우려의 시선을 무시하고, 강행 처리를 추진해 온 한나라당의 자업자득이다. 앞으로 여야가 은행법 개정안을 두고 활발한 토론을 벌이길 기대한다.


<매일노동뉴스 3월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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