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이 위기라고 합니다. 그것이 자본의 위기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노동의 위기에서 파생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올해는 경제위기 한파가 일자리를 끊임없이 위협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매일노동뉴스>는 노동운동의 위기를 극복하는 해법이 '현장'에 있다고 믿습니다. <편집자>

'증권사의 꽃'이라고 불리는 증권사 영업부. 증권사 영업노동자는 '고객이 맡긴 주식이 떨어질까, 유망종목을 고객에게 빨리 추천해야 한다'는 생각에 눈과 마음을 단 1분도 쉬지 못한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19일 교보증권 영업부의 입사 7년차인 김영훈(32) 대리의 하루를 함께 했다.

오전 7시, 교보증권 영업부

"오늘은 네번째 국내 이동통신사 출현 가능성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바마 정부의 의료보험 정책 발표로 유망한 국내 종목은 ㅇㅇ약품 등입니다."

오전 7시33분 여의도 교보증권 2층. 영업부·법인영업부·리서치부 직원 38명이 아침 회의에 참석했다. 매일 아침 영업부 객장에서 진행되는 회의. 객장 의자는 모두 26개. 의자가 없는 직원 12명은 '교보데일리'라고 적힌 보고서를 들고 서성이다 여기저기서 사무실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교보증권 객장에는 유가증권과 코스닥 상장사 700여개사의 이름이 빼곡히 적힌 전광판이 있다. 전광판의 불이 켜지기까지 아직 1시간 30분이 남았다. 보통의 노동자들이 출근을 앞두거나 출근하는 시각. 주식시장 최전선에 선 증권노동자들의 하루가 시작된다.
"각 부서 직원들이 전날 주식시황, 오늘의 유망종목을 브리핑하는 거예요. 15분 정도 하는 회의지만 짧고 굵게 진행되죠."
김영훈 대리의 설명을 듣자마자 객장 스피커에서 '국민체조' 음악이 흘러나왔다. 영업부 직원 모두 체조를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우두둑, 우두둑' 소리가 났다. 무릎과 허리에서 나는 소리였다. 전날 영업 때문에 만난 고객과 한 술자리의 취기가 아직 남은 듯 아직 얼굴이 붉은 직원들도 있었다. 체조를 마치고 나니 스피커에선 녹음된 인사말이 나왔다.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등 4개의 인사말을 직원 모두가 2번씩 외쳤다. 업무의 시작이다.
끝난 줄 알았던 회의가 오전 8시 또 시작됐다. 'MB정부의 녹색성장 정책'에 영향을 받은 '풍력에너지'와 관련한 종목에 대한 의견이 오갔다. 커다란 TV모니터에 경제TV의 뉴스가 쏟아졌고, 하나둘씩 고객들이 객장에 들어섰다.

교보증권 영업부의 선장인 박성진 영업부 이사의 한 마디가 오늘도 김 대리의 졸린 눈은 물론 마음까지 깨운다.
"1천만원으로도 1억 만들고 10억 만들 수 있습니다. 흐릿하게 눈을 떠서는 안 돼요. 눈을 부라려 뜨고 유심히 봅시다. 발 빠르게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전광판에 불이 들어오면 전쟁의 신호탄

김 대리는 오늘 서울 양평동 집에서 새벽 5시 40분에 출발했다. 아침 7시까지는 회사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이다.
김대리의 책상에는 전화기 두 대와 모니터 두 대가 놓여 있다. 왼쪽 모니터에는 종합주가지수가 실시간으로 뜬다. 그가 오늘 선택한 3~4개의 관심종목은 오른쪽 모니터에 띄어 놓았다. 시황정보는 1분 단위로 갱신된다. 모니터를 주시하던 김 대리가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십니까 교보증권 김영훈입니다. 지수는 6포인트 빠졌고요. 1천107포인트입니다. OO차 7천600원입니다, XX제지 7천960원, OO전자 8천340원. 네 감사합니다." 단 1초의 머뭇거림 없는 답변이었다.
"교보증권 김영훈입니다. OO약품이요. 네, 340원 올랐습니다. 어제 오늘 빠진 걸 다 메꾸고 있습니다. 글쎄요. 반등 폭이 어중간합니다."
오전 10시. 장이 열린 지 1시간 동안 그가 받은 전화가 10통이 넘었다. 김대리의 입술이 벌써 바짝 말랐다.
2~3년 전 주식시장이 호황이서 주문이 많을 때는 전화기 두 대와 휴대폰까지 함께 울렸다고 한다. 하지만 지난해 10월 본격화된 금융위기로 주가가 대폭 하락한 뒤 6개월 동안 주식시장의 침체가 이어지고 있다. 이날도 3일째 주가가 하락했고, 1주일만에 종합주가지수는 100포인트가 하락했다. 김 대리는 "어차피 최고 주가와 저가를 맞추기란 힘든 일"이라며 "가장 근사치를 맞추려고 이렇게 계속 모니터를 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모니터를 '노려보는 일'은 업무시간이 아닌 때도 이어진다. 미국 증시가 우리 시간으로 밤 11시30분부터 새벽 6시 직전까지 열리기 때문이다.
"새벽 3시에 일어나 나스닥이 어떻게 됐나 보고 자는걸요."
김 대리는 "고객이 맡긴 주식을 많이 갖고 있는 날에는 다음날 떨어질까하는 걱정에 자다 벌떡 일어난다"고 말했다. 결혼 5년차인 그의 부인은 처음엔 잔소리를 했지만 이젠 이내 익숙해져 버렸다.
"점심이요? 그 시간에도 시장은 돌아가잖아요"

국내 주식시장은 오전 9시에 개장하고 오후 3시에 폐장한다. 일본이나 홍콩은 점심시간에 휴장하지만 한국은 점심시간에도 장을 운영한다. 점심시간 개장이 시작된 2000년대 초반 이후 증권노동자들의 점심시간 풍경도 변했다.
김 대리는 오늘 점심을 위해 11시30분에 자리를 나섰다. 줄 서서 기다리지 않기 위해 회사 주변 식당에서 김치찌개로 끼니를 해결했다. '차 한잔의 여유'를 누릴 시간은 없었다.
"점심은 30분 안에 해결합니다. 세계에서 점심시간에 개장하는 건 우리나라 뿐이죠."
이 때문에 영업부 직원들이 교대로 점심식사를 한다. 지하 1층 직원식당에서 식사를 하다가 급한 전화를 받고 다시 뛰어 올라오는 경우도 있다. 이른 출근시간 때문에 아침을 거르는 일이 다반사인 증권사 영업노동자들에게 '점심시간의 여유'조차 사라진 지 오래다.
그는 식사를 마친 뒤 바로 자기 자리에 앉아 쏟아지는 문의 전화와 주식시장 시황에 눈을 떼지 못했다.
오후 2시. 이제 한 시간이면 장이 끝난다. 김 대리가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기자가 어디 불편하냐고 물었더니, 어색한 웃음과 함께 "담을 달고 살죠"라고 말했다. 증권사 영업노동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요통과 어깨결림 등을 안고 산다.
그가 먼저 "같이 담배 한 대 피러 갈까요"라고 말했다. 오전 7시부터 쭉 지켜보았기 때문에, 기자는 업무중 자리를 한 번도 뜨지 않았던 김 대리를 비흡연자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하루에 한 갑 정도를 피는 애연가였다. 담배 필 시간도 없는 셈이다.
교보증권 2층 영업부 김 대리 자리에서 건물 밖까지 이동하는 데 1분이 걸렸다. 김 대리와 담배 피우면서 얘기를 한 시간은 고작 5분. 올라오는데 1분. 정확히 7분 만에 휴식시간은 끝났다. 자리에 앉은 김 대리의 첫 마디는 "에휴, 또 내렸네"였다.
증권노조가 지난해 3월 발표한 ‘증권노동자 노동조건 및 건강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영업직 포함 증권사 직원의 평균근무시간 중 일손을 놓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의 비율은 전체 노동시간(평균 10시간10분) 중 '18%(점심시간 포함, 1시간40분)'에 머물렀다. 지난해 자동차 판매 분야 노동자 1천36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근무 중 여유시간(평균 38.1%)과 비교하면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치다.
전광판 불은 꺼졌지만…

오후 3시. 주식시장이 끝나고 전광판 불도 꺼졌다. '소일거리' 삼아 객장을 찾는 머리 희끗한 노인들도 하나둘 자리를 떴다. 하지만 김 대리에겐 아직 30분 동안 장후 시간외매매가 남아 있었다. 장후 시간외매매는 당일 종가로 거래가 있을 때만 가능한 거래를 말한다.
"네 손님. (주식시장이) 방금 끝났습니다. 오늘 OO차가 종가에서 밀리면서 끝났습니다. 장 끝나기 전까지 2시까지는 7천900원까지 올랐는데요. 오늘 160원 빠져서 7천600원으로 끝났습니다."
이날 하루 6천만원의 돈이 김 대리의 손을 거쳐 갔다. 기자가 놀라는 표정을 짓기도 전에 김 대리는 "오늘 저는 하위입니다"라고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영업부 이사의 개별면담이 잡혔다. "영무를 정리하면 순서대로 들어오라네요."
오후 4시. 영업이사 방에서 면담을 마친 김대리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스트레스를 달래려 담배 한 대를 피고 온 그가 책을 펼쳤다.
지난 2월 자본시장통합법 이후 주식 위탁매매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자격증이 2개나 늘었기 때문이다. 파생상품펀드투자상담사와 부동산상품투자상담사 자격증 시험일이 이제 2주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지난 2004년 결혼 해 네살배기 아들을 두고 있다. 6월이면 둘째가 세상에 나온다. 요즘 걱정되는 일이 무엇이냐 물었더니, 그는 "출산을 앞둔 부인과 둘째 아이보다 먼저 미국 주가가 또 빠질까봐 걱정"이라고 말했다.

흑자는 '주식보다 바보가 많으면 주가가 오르고 바보보다 주식이 많으면 주가는 떨어진다'고 말했다. 이는 증권시장의 투기성을 지적하는 격언이다. 또 '주식시장을 통한 부의 이전과 약탈에 저항해야 하고, 불로소득의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정작 약탈의 시장에서 일하는 증권노동자들. 그들은 하루 종일 보는 모니터 때문에 눈의 실핏줄이 터지고, 제 때 식사를 못해 위장병에 시달리고 있다. 김 대리의 퇴근 시간은 오후 5~6시. 영업이 끝나더라도 '잠재고객'과의 술자리가 있을 때가 많다. 잦은 술자리로 속도 곯아가지만, 인간관계를 잘 해야 영업도 잘한다는 생각에 마다할 수 없다. 김 대리의 월급은 350만원 정도다. 영업을 위한 고객접대로 한달에 200만원을 쓴 적도 있다. 남는 건 150만원이다.
"증권노동자들은 불확신한 미래를 파는 사람들입니다. 밖에서는 우리가 고연봉을 받는다고 하는데요. 우리가 받는 월급, 그건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고객 대신 스트레스를 떠안고 사는 대가가 아닐까요."


<매일노동뉴스 2월23일>

증권노동자 스트레스 높이는 '미스터리 쇼핑'
금융감독원이 다음달부터 금융기관에 대한 '미스터리 쇼핑'을 시행한다. 고객을 가장해 금융상품을 제대로 설명하고 파는 지 감시하겠다는 것이다. 증권노동자들도 '불완전판매'를 막겠다는 취지에 대체로 공감하고 있지만, 늘어날 노동자들의 정신적 스트레스에 대한 대책이 없다는 점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교보증권 영업팀의 한 직원은 "자통법 시행 전 10분 안에 끝나던 상품가입 절차가 고객의 성향까지 파악해야 하는 절차가 생기면서 이제는 30~40분으로 늘었다"고 말했다. 그는 "미스터리 쇼핑이 고객을 위한 것이라 하지만 일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고 덧붙였다.
서비스업종에 많은 미스터리 쇼핑은 직원들의 노동강도와 스트레스를 높이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사실상 노동자 감시수단으로 전락했다는 비판도 잇다.
반면 감시에 따른 우울증 등 정신적 스트레스에 대한 대책은 미흡하다. 증권노조가 지난해 3월 발표한 ‘증권노동자 노동조건 및 건강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응답자의 41%가 우울상태이며 중증 이상의 우울 상태에 있다고 대답한 응답자들도 18.5%에 달했다.
공유정옥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는 "금융시장에 영향을 미칠 자본시장통합법 시행으로 증권노동자들의 불안은 더욱 커지고 있다"며 "금융투자협회 차원의 정신건강상담소 설치 등 대책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오재현 기자


◇중소 증권사 임직원, 역삼각형 구조 심각=자통법은 증권업종 내 구조조정을 예고하고 잇다.
증권업협회(현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국내 증권사 47곳과 외국계 증권사 14곳의 지난해 11월 기준 임직원수는 3만9천254명이다. 증권업이 자통법 수혜업종으로 꼽히면서 지난해만 8개의 증권사가 새로 생겼고, 기존 증권사들도 경쟁적으로 영업 확장에 나섰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부 증권사들은 새로운 부서를 만들면서 직원수는 그대로 두고 임원수만 늘리기도 했다. 지난해 9월 기준으로 삼성증권 등 국내 10개 증권사 직원은 1만9천587명, 임원은 191명이다. <표 참조>
직원 102명에 임원 한 명으로 뚜렷한 문제점이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중소 증권사들의 사정을 감안하면 임원과 직원 비율은 심각한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 메리츠증권의 경우 지난해 9월 현재 직원 763명에 임원 16명이다. '상무보'라고 불리는 임원 22명까지 합하면 전체 임원은 38명이다. 직원 15명에 임원 한 명꼴이다.
증권노조 관계자는 "대다수 증권노동자들은 회사의 영업확장 캠페인에 따라 자기 주머니까지 털어 실적을 채우고 있다"며 "선수들은 감독이 지시한 대로 뛰었을 뿐인데 막상 게임에서 지니 선수들만 책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오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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