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 민주노동당은 10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했다. 원내 교두보 확보에 목말랐던 진보진영에게는 그야말로 대사건이었다. 민주노동당은 노동운동과 실질적으로 결합한 최초의 진보정당이라는 점에서, 죽산 조봉암의 진보당 이후 원내에 의석을 가진 최초의 현실 진보정당이 됐다는 점에서, 6월 항쟁과 7·8·9노동자 대투쟁 이후 수차례 시도된 바 있는 ‘진보정치’의 경험과 역량이 총동원됐다는 점에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좌우양축으로 굴릴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독자세력화의 한길로 나아간 ‘민주노총’ 지금으로부터 110여년 전 영국 철도노조 간부 토머스 스틸스는 “하나의 강력한 노조가 한 사람의 대표만이라도 독자적으로 의회에 내보낼 수 있다면 그것은 가장 유능한 50명의 자유당 혹은 보수당 의원들을 보내는 것보다 훨씬 커다란 발전이다. 그것은 노동계급의 반란을 보여주는 더없이 좋은 증거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이면에는 민주노총이라는 숨은 공신이 존재했다.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과 그 전신인 97년 국민승리21, 97년 노동법 총파업과 95년 민주노총이라는 대중조직의 탄생까지 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 민주노총이라는 노동자 대중조직이 불씨였다면 96년 노동법 날치기 저지 총파업은 심지였고, 민주노동당 창당은 그 연료였던 셈이다. 그렇게 민주노총의 정치적 방침은 결실을 맺었다. 하지만 지역구 의석 2석, 비례대표 8석에서 보여지듯 지역정치를 근간으로 하는 국회의원 선거제도에서 아직 10분의2의 승리에 불과했다. 1인2표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55석은 김대중 정부의 정치개혁에서 자양분을 얻고 노무현 정부에서 비로서 완성됐다. 신자유주의 사회양극화와 계급갈등에 대한 제도권 정치의 포용방식일 수 있다. 민주노총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통일이라는 관점에서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방침을 결정했다. 하지만 중간계급을 포섭하려는 국민정당으로의 탈색 유혹은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을 의심케 했다. 대표적인 게 97년의 ‘일어나라 코리아’ 구호다. 당시 민주노총 조직위원장을 맡았던 이근원씨는 “일어나라 코리아는 심한 마찰을 불러왔다. 2002년도 대선에서도 TV광고와 관련해 보다 계급적인 내용을 주장하는 것과 표를 의식한 부드러운 이미지 사이의 갈등이 항상 존재해 왔다”고 말했다. 당시 일화 가운데 하나는 ‘일어나라 중산층! 일어나라 노동자!’ 등 일어나라 코리아의 연장선에서 고민됐던 캐치프레이즈들이다. 노동자라는 표현대신 봉급생활자라는 표현을 쓰자는 의견도 제시됐다. 그것이 2007년 3번째 대선 도전에 나서는 권영길 후보의 코리아 연방공화국 구상의 앞머리를 ‘일어나라’가 장식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낳기도 한다. 노동계급 최고의 조직형태라는 노동자정당에 대한 민주노총의 우려지점이기도 하다.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총 간부들의 관심은 온통 비례대표에 집중됐다. 하지만 이에 반비례해 지역에 많이 출마해 정당지지율을 올리고 민주노동당으로 존재 이전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힘을 얻었다. 당시 민주노총 정치위원장이었던 김형탁 민주노동당 대변인은 “모범을 보이기 위해 비례대표 불출마를 선언하고 지역에 뛰어들었다. 우리들이 밑거름 돼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전사가 돼 지역에 나가 장렬히 전사하자”라고 독려했다고 전했다. 당선 보장이 없던 민주노총 지역구 출마자들은 그의 표현대로 장렬히 전사했다. 하지만 그만큼 민주노동당의 의석수는 10석으로 늘어났다. 2007년 민주노총은 민중참여경선제라는 카드를 빼들었다. 80만 조합원의 민주노동당으로의 당원 유도와 선거참여의 폭을 넓히기 위한 구상이었다. 하지만 이미 상급단체가 된 민주노동당은 3월 대의원대회에서 당원직선제를 고수했다. 이영희 민주노총 정치위원장은 “주는 밥상도 걷어찼다”고 힐난했다. 배타적 지지라는 민주노총의 항구적인 정치방침과 민-민 관계의 현실 사이에 간극이 더욱 벌어지고 있다. 한국노총 50년 역사상 처음 야당과 정책연합 1997년 12월 18일 저녁 한국노총 수뇌부는 팔래스 호텔 스위트룸에서 대선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12시가 넘어서면서 김대중 국민회의 후보의 당선이 뚜렷해졌다. “우리는 살았다.” 긴 안도의 한숨이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박 위원장이 부산에서 가져온 양주 한 병을 여럿이 달게 마신 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한국노총은 정책연합을 정치방침으로 결정한 이후 후보 발표를 목전에 두고 조직내외적으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조직 외부에서는 제정당과 노동부, 정보기관의 압박이 다반사로 벌어졌다. 그 당시 정책연합은 한국노총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정치방침일 수 있었다. 한국노총의 독자적 힘으로 노동자 정당을 만들기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민주노총과 함께 하기는 컬러가 맞지 않았다. 300대 정책요구를 15대 핵심과제로 집약하고 각 정당의 대선 후보들에게 10월경 전달했다. 조합원 여론조사도 4차례나 진행했다. 12월1일부터 시작된 정책공약 평가 결과, 900점 만점에 김대중 후보가 500점으로 1위를 기록했다. 여론조사도 맨 처음 조사에서 이인제 후보가 1위를 한 것 빼고는 DJ가 부동의 1위를 달렸다. 이제 97년 정책연합 후보 발표만 남았다. 하지만 애초 정책연합 방침에 찬성했던 친 이회창계 산별위원장들이 12월3일 소집된 중앙정치위원회에서 집단적으로 반발했다. 책상이 날아다니고 욕설이 난무하는 등 정책연합 공개를 주장하는 측과 반대파 사이에 일전이 붙었다. 자칫하면 조직이 깨질 위기였다. 반발하던 산별위원장들은 ‘선거법과 노동조합법 위반’과 ‘지역구도가 온존한 상태에서 조직적 분열을 초래할 수 있다’는 논거를 들이댔다. 발표를 강행하자는 정책연합 준비측과 일부 산별위원장들에 대한 폭언과 위해가 계속됐다. 33년간 조직노동운동가로 잔뼈가 굵은 박 위원장은 정책연합 한번 하려다가 50년 노총의 역사가 문을 닫게 생겼다는 위기감에 발표를 유보하고 회의장을 박차고 나갔다. 그 다음날 열린 정책연합 실현을 위한 전국노조대표자회의 역시 파란 속에서 진행됐다. 일부 대표자들은 단상을 점거한 채 대상자를 공개하라고 요구했다. 홍재복 당시 천안지역지부장은 5일부터 노총 회의실에서 항의농성에 돌입하기도 했다. 9일 현기환 정치국장과 이정식 기획조정국장이 이른 아침 박 위원장의 자택을 찾았다. DJ 지지선언을 위한 박 위원장 명의의 개인성명을 의논하기 위해서다. 박 위원장이 지지성명에 사인하자 두 사람은 부리나케 한국노총으로 향했다. 언론에 성명을 뿌리고, 지역단위로 사람을 내려 보내 현장단위로 성명을 뿌렸다. 검찰은 DJ 지지선언에 대해 박 위원장, 이 기획조정국장, 최대열 홍보국장 등 3명의 노총 간부에 소환장을 발부했다. 박헌수 화학노련 위원장과 유재섭 금속노련 위원장 등 산별대표자들도 성명서를 뿌렸다는 이유로 소환장이 날라갔다. 박 위원장은 9일 정보기관과 경찰을 피해 경남 고성의 옥천사라는 사찰로 피신했다. 현 국장이 뒤이어 내려왔다. 박 위원장과 현 국장은 18일 대선 전까지 포항과 경남 일대, 군포, 안양 등지를 숨어 다니며 선거운동을 벌였다. 박 위원장의 부산 지인이었던 김영길 전 제일택시노조 위원장이 빌려준 포텐샤를 끌고 김해공항을 지날때 트럭 한 대가 느닷없이 달려와 위원장 일행의 차를 박았다. 과실은 트럭 운전사에게 있었지만 보상을 받을 처지가 못돼 되레 사과를 하고 보험처리를 해주겠다고 한 일화도 전해진다. 19일 대통령이 된 DJ는 맨 먼저 박 위원장을 국회 귀빈식당으로 불렀다. DJ는 “나는 복이 많아서 감옥에서 영어도 하고 책도 읽었지만 박 위원장은 복이 없어서 그렇게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노총 집행부에게 발부된 소환장이 휴지조각이 되는 순간이다. 정책연합의 성공은 한국노총의 위상을 급변시켰다. 국정원장이든 주요 내각인선이 오고갈 때 박 위원장의 문안인사는 통과의례처럼 됐다. 현 국장은 “정리해고 법제화로 DJ와의 정책연합이 파기될 때까지 정권의 작은 축을 담당했다”고 말했다. 노동조합의 정치활동 참여에 발목을 잡았던 선거법 87조 폐지는 정책연합 요구사항 중 맨앞에 들어갔던 내용이다. 98년 4월 DJ는 정치활동 금지 대상에서 ‘노조 제외’라는 단서조항을 단 선거법개정안을 국회에 통과시켰다. 부성현 기자 b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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