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진영 전체입장에서 87년 대선은 대단히 아쉬운 순간이다. 백기완 후보가 DJ와 YS의 후보단일화를 종용하며 중도 사퇴했다. 후보단일화는 실패했고 한쪽은 김영삼에게로 한쪽은 김대중에게로 갔다. 진보민중진영의 분열은 그렇게 시작됐다. 92년 민중후보 백기완 후보는 0.9%의 지지를 얻는데 그쳤고 이후 97년으로 이어졌다. 97년 대선이 갖는 상징적 의미는 세월만 10년이 흐른 게 아니라 진보적 대선후보 전략에 노동자 조직이 본격적으로 붙었다는 점이다. 87년에서 97년으로 이어졌던 10년이라는 기간은 민주노조운동 방향에서 산별노조 건설과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라는 두 가지 역사적 과제를 도출해냈던 과정이기도 하다. 97년에 민주노총이라는 노동자의 대중조직이 결합하면서 진보운동의 대중적 기반이 마련됐다. 민주노총은 97년 3월 대의원대회에서 “대중적 합의를 바탕으로 노동자가 적극 참여하고…. 우리 사회의 민주적 개혁을 실현하고 노동자의 이익과 요구를 철저히 대변하는 새로운 정당 건설의 토대를 구축한다”며 독자적 정치세력화 방침을 분명히 했다. 민주노총의 전신인 국민승리21이 만들어졌다. 이때부터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가 시작됐다. 이근원 국민승리21 기획국장(현 민주노총 공공운수연맹 정치위원장)은 “비판적 지지가 가장 왕성했던 시기였고 민주노총의 대선전술은 사실 초보운전기”였다고 술회했다. 민주노총이 대선후보로 내세운 민주노총 초대 위원장 출신인 권영길 후보는 30만6천26표를 득표했다. 참패였다. 하지만 97년 대선의 실패가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실패를 의미하진 않았다. 지난 10년의 과정에서 내성이 길러졌고, 민주노총이라는 대중조직이 건재했던 만큼 국민승리21은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으로 이어졌다. 2002년 대선 역시 사표방지심리의 확장판이었다. 진보진영의 마의 한자리수 대선 득표율이 계속됐다. 두 번째 대선에 도전한 권 후보는 전체유권자 중 95만7천표(3.9%)의 지지를 얻었다. 2002년부터 민주노총은 계급투표전략이라는 대선방침을 전개했다. 노동자는 노동자 후보에게 표를 줘야 한다는 논리이다. 하지만 이것이 발동하기 위한 전제는 노조의 조직률이 높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노동자에 미치는 후보의 실제 영향력이 강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오삼교 위덕대 교수는 “노조 조직률이 낮을 때 노조의 영향력이나 노동자 정당의 정치적 지지도가 높기를 기대할 수 없다”고 말했다. 위 교수는 또 “분열된 노동운동은 지지의 분산과 상호 갈등을 초래하여 경쟁적 정치사회세력의 공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대선개입의 방향이 달랐다. 2002년 대선에서 한국노총은 정치방침이 별도로 없었고 16개의 산별연맹 대표자들이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공개 지지했다. 또 기업별 노조체계로 인해 기업별 노조의 분산성이 노동자 정당의 강화에 유리한 조건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했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조직된 노동자들이 공장의 울타리를 넘지 못했던 한계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본격 등장, 자본의 이데올로기 공세 등으로 민주노동당으로의 계급투표전략은 실효성을 잃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민주노총은 변함없는 민주노동당의 든든한 기반이었다. 이로 인해 대선패배 충격에 좌고우면 하지 않고 총선으로 진군할 수 있었다. 과거에 비판적 지지로 갈렸던 자민통 계열의 활동가들도 당으로 속속 들어오기 시작했다. 민주노동당 관계자는 “10년이라는 기간은 진보정치 측면에서 꾸준한 성장의 시기이자 진보정치의 현실화 시기”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신자유주의 질서는 공고해 졌고, 노조는 힘을 잃으면서 방어적 투쟁으로 내몰렸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현재의 모습으로 안 된다. 대중운동의 고양도 같이 따라가야 가능하다”고 말했다. 당 관계자는 “2007년 대선을 거치면서 국민정당화 경향을 보일 것”이라고도 말했다. 그 관계자는 “대중운동이 뒷받침이 안 되면 당은 초창기의 원칙을 조금씩 풀 수밖에 없다”며 “비록 당은 성장하지만 민주노동당의 정체성은 희석되는 길로 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금은 닫힌 구조이지만 당명과 강령의 급진성들이 언젠가 도마에 오르리라는 예상이다. 당의 문호는 개방됐지만 여론주도층이 회피하면서 조직라인이 꾸준히 자리를 채워나갔다. 상층라인이 생기면서 역사를 만들어간다는 자부심의 빈자리에 의회 내 자리싸움이 파고들었다. 민주노동당의 영원한 동맹군인 민주노총의 정치활동은 점차 위축되고 있다. 민주노총 독자적 정치활동과 노동조합의 정치활동이 없어지고 선거 때마다 돈대고 몸대는 것으로 대치된다는 활동가의 푸념이 들려온다. 이근원 공공연맹 정치위원장은 “얻은 것은 민주노동당이요, 잃은 것은 노동자의 정치운동”이라고 말했다. 사회양극화의 심화는 진보정치가 성장할 수 있는 토대도 제공했지만 민중들의 절망과 고통을 대변할 정치지향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절박감도 동시에 던져줬다. 노동운동이 비록 약화됐다고 하나 그것을 뒷받침할 정치는 성장했다. 정치가 전반적으로 침체된 운동을 고양시키지 못하면 거꾸로 전체운동이 진보정치의 발목을 잡아 끌 수도 있다는 지난 10년의 역사적 부침이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다. 부성현 기자 b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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