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사람들이 글을 써야 세상이 바뀐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오매불망 문학에 목숨을 건 글쟁이들의 잘난 글도 세상을 바꾸지 못하는데 말이다. 글에 관한 한 도가 튼 문인들이 ‘문학의 위기’라고 목 놓아 울어도 ‘아주 오래된 농담’으로 들리는 이 시절에 일하는 사람들이 뺑이 치다 잠시 시간 날 때 긁적인 글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20년 동안 버스운전사로 일해 온 안건모씨(월간 <작은책> 발행인)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버스운전사로 생활하며 쓴 일터 이야기를 모아 <거꾸로 가는 시내버스>(보리출판사, 312쪽)를 내놓았다. 이 책은 “일하는 사람들이 글을 써야 세상이 바뀐다”는 신념의 결과물인 셈이다. 


글쓴이는 1958년생으로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노동자가 됐다. 형님이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에 간 덕분에(?) 고등공민학교에서 검정고시를 보고 공고에 입학해 2년 다닐 수 있었다.  집이 철거되면서 학교를 중퇴하고 다시 노동자가 되어 이 일 저 일 해 봤지만 오래하지 못하고 고생만 진땅하다 시내버스 운전사가 됐다.

가난한 집 아이가 겪어야 할 고생은 다 겪었다. 의처증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학교 앞에서 뽑기 장사를 하는 어머니, 육성회비 가져 않는다고 때리는 선생님. 가출까지. 노동자가 되기도 쉽지 않았다. 도급을 맡은 오야지가 석달치 월급을 떼먹고 나르고, 대못이 발바닥 깊숙이 박히는 사고를 당하고, 일을 구하지 못해 직업소개소를 전전했다. (‘고추장에 꽁보리밥을 비벼 먹으며’, ‘철거계고장에 학교를 그만두고’, ‘내 일을 찾았다’) 

노동자라면 갖고 있음직한 한 많은 사연을 안고 시내버스기사가 되어 살아가던 중 글쓴이는 집으로 가는 골목길에 있는 주민독서실에서 <쿠바혁명과 카스트로>라는 만화책을 발견했다. 300원을 주고 책을 빌려 왔고, 그때부터 버스 운전을 하는 틈틈이 <태백산맥>, <거꾸로 읽는 세계사>, <노동의 새벽> 등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주민독서실’)

“책은 나를 어둠에서 처음으로 끌어내고, 세상에서 다른 한편을 볼 수 있게 만들었다.” 독서는 그에게 ‘인식의 지평’을 선사했다. 글쓴이의 표현으로는 "깜깜한 굴속에서 빠져나온 것 같았다." 그러나,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갈증은 지워지지 않았다. 1996년이었다. 우연히 <작은 책>을 보다가 ‘아! 우리 같은 노동자도 글을 쓸 수 있구나’ 깨닫고는 ‘작은 책 글쓰기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다. 글쓰기는 인식을 넘어 세상과 호흡할 수 있는 기회였다.  

평범한 노동자에서 각성된 노동자로, 게다가 ‘글’이라는 무기를 손에 쥔 그가 할 일이란 바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쓰는 것이었다. <거꾸로 가는 시내버스> 1장인 '시내버스 알고나 탑시다' 편은 자신이 하고 있는 시내버스 운전에 대한 글들이다. 마치 초점을 당겨 그린 정밀화를 보는 것처럼, 글쓴이는 자신이 겪고 있는 세계 구석구석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우선 눈이 좋아야 멀리 숨어서 단속하는 경찰관은 발견할 수 있다 … 달리기 실력이란 속된 말로 ‘조진다’고 한다. 운전하면서 옆 차 백미러와 내 차 백미러 사이에 두꺼운 도화지 한 장을 끼우면 딱 맞을 정도로 사이를 두고 70~80킬로미터를 조질 수 있는 실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종점에 들어가서 오줌 눌 시간을 벌 수 있다.”(‘시내버스 알고나 탑시다’ 중에서)

어쩌면 이것은 생중계다. 이 대목에서는 차라리 교통전문가들의 처방보다 안건모씨의 그것이 훨씬 더 낫다는 생각까지 들게 된다. 실사를 몇백번 나가는 것보다 교통지옥의 현장을 체계적으로 잘 이해할 수 있을 게다. 하기는, 위정자들이 몰라서 안 하는 건 아니겠지만.
 
그의 시선은 이웃으로 옮아간다. <거꾸로 가는 시내버스>의 2장 '시내버스를 타는 사람들' 편을 보면 온갖 사람들이 등장한다. 멋쟁이처럼 하고 다니며 상습적으로 시비 걸어 ‘불친절’로 신고하는 아저씨, 찜통버스 안에서 연신 부채질을 하다 땀흘리는 기사를 보고는 슬쩍 운전대 뒤로 다가와 부채질해 주는 아줌마, 식당에서 일하는 엄마 마중 나가기 위해 혼자 버스를 탄 여섯 살짜리 꼬마 손님.

그의 눈에 비친 이웃은 시내버스를 타고 다니는 ‘나’의 모습인데, 깐깐한 성격의 소유자일 것 같은 글쓴이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자신의 잣대로 이웃을 평가하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 못난 놈은 못난 놈으로, ‘또라이’는 ‘또라이’로, 담담하게 그려낸 ‘시내버스를 타는 사람들’ 편을 읽다 보면 눈물이 날 듯 말 듯하다. 일부러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은, 사람은 생각처럼 바뀌는 게 아니라는 걸 그는 안다. 그래서 더 감동적이다.     

이제 그는 자신과 동료의 권리를 찾기 위해 나섰다. 3장 '삶이란 곧 싸움이다'에서 그의 글들은 박진감이 넘친다. 읽다 보면 가슴에서 욱 하는 것이 치밀어 오르며 그와 함께 싸워야 될 것만 같다. 여태껏 나왔던 ‘시내버스 파업’이 노동자들 파업이 아니라 시내버스 사업주들과 어용조합, 게다가 정부까지 한패가 되어 짜고 한 파업이라는 사실을 파업 현장 가까운 곳에서 본 생생한 이야기들, 또 기사들이 하는 삥땅에 대해서도 가감 없이 쓴다.

“삥땅 이야기는 쓰기가 참 곤란했다 … 이런 이야기를 나 같은 시내버스 운전사가 아니면 누가 쓰랴. ‘우리시대의 논객’ 강준만님이 쓰겠는가. ‘파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님이 쓰겠는가.”(‘삥땅전쟁과 감시카메라’)

맞다. ‘삥땅’은 너무나도 치졸한 일이지만 그 세계에서는 너무나도 절실한 일이다. 당사자가 아니면 고백하지도 못할 뿐더러 해결방법을 제시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삥땅’을 놔두고 ‘부정부패’를 없애는 일이 가능할까. 이 대목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글을 써야 세상이 바뀐다”는 안건모씨의 주장은 다시 한번 힘을 얻는다.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거꾸로 가는 시내버스>는 손에서 도저히 책을 내려놓을 수 없게 만드는, 그런 흥미진진한 책은 아니라고. 그럴 수도 있다. 오늘이 ‘혁명전야’도 아닌데, 버스 운전하면서 오늘 일어난 일을 제 아무리 잘 그려낸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다. 이 책만의 숨은 힘을 모르는 소리다.

그것은 바로 '내가 풀어놓는 나의 이야기'다. <거꾸로 가는 시내버스>에 실린 이야기들은 너무나도 정직하고 솔직해서 ‘아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글쓴이와 동료 노동자는 아주 착하디 착한 변호사를 소개받아 ‘공주병 환자가 아니라 소탈한 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지식인들을 믿지 못해 몇번이나 시험을 한다. (‘노동자와 변호사’)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는 건 예수님의 말씀이지 노동자의 말씀은 아니다. 

요즘 같은 시절에 자신을 이렇게 훤히 드러내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다, 세상이 이상해졌다. 대통령부터 노동자까지 말하는 투가 대개 비슷하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내 생각은 원래 이런데, 상황이 이래서….’ 거기에는 생존의 지혜는 있을지언정, 변화를 함께 도모하게끔 만드는, 거부할 수 없는 솔직함이 없다. 그래서, 이 책을 한 편 한 편 읽다보면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일하는 사람들이 글을 써야 세상이 바뀐다”는 안건모씨의 주장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주억거려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4장으로 구성된 <거꾸로 가는 시내버스>에는 모두 55편의 글이 실려 있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솔직하지 않으면 결코 꼼꼼할 수 없다는 것, 거꾸로 꼼꼼하지 않으면 결코 솔직할 수 없다는 진리를 확인하게 된다. 안건모씨에게 있어서 글쓰기는 세상과 호흡하는 창이다. 그것이 솔직하지 않다면 글쓴이는 질식할 수도 있다.

글을 쓰면서부터 글쓴이는 동료들을 조직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지혜와 지식의 바다로 항해를 시작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조합으로부터 제명당하고, 두번의 테러까지 당했다. 체계적인 문학교육 한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고교 2년 중퇴의 시내버스 운전자가 가식과 교만 없이 세상을 그려내는 양서(良書)의 편집자가 됐다. 그것이야말로 80년대 이후부터 식자들이 그토록 칭송하고 기다렸던 ‘리얼리즘의 승리’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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