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뙤약볕이 내리쬐는 여름날 시내 중심가에서 한참을 벋어난 동네 골목, 오래된 빛바랜 건물에서 우리는 그렇게 시작했다. 2002년 6·13 지방선거를 마치고 후보들 몇몇이 기꺼이 호주머니를 털어 진보정당의 씨앗을 뿌려보자던 결의로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필자는 90년대 중반까지 진보정당운동을 뒤로하고 병원노동자로 생활하다 당시 민주노총후보로 당후보로 출마한 남편의 선거운동을 계기로 선거가 끝난 후 진보정당운동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2002년 지방선거를 남편과 함께 뛰면서 내 안에 있던 운동에 대한 열정과 진보정당운동에 대한 열망을 자각하는 계기가 된 것이었다.

서툰 실무력으로 좌충우돌 하면서 그렇게 가장 밑바닥에서 시작하고 있었다. 일명 ‘청림동 당사시절’로 명명되는 그때를 되돌이켜 보면 코끝 한켠이 시큰하기도 하다.

썰렁한 사무실에 종일 있어도 사람 그림자를 보기 어려운 날이 대부분이었고, 여름엔 더위와 겨울엔 추위와의 싸움이었고, 또 비라도 오면 노후 된 건물엔 방수가 잘되지 않아 바닥에 흥건히 빗물이 고여 종일 물을 퍼내느라 정신이 없던 그런 시절이었다. 처음 시작한 당원이 60여명, 중앙당에서 내려오는 교부금으로는 사무실 운영과 한명의 상근자의 임금을 맞추기엔 불가능한 구조로 60만원으로 책정된 나의 임금은 언제나 체불되기 일쑤였다.

우리는 그렇게 그해 겨울 대선을 맞이했다. 선거에 돌입하면서 우리는 진보정당에 대한 열망으로 거의 미쳐 있었다. 지역조직력이 없었던 우리는 길거리 운동을 중심으로 할 수밖에 없었고 거리 운동은 언제나 우리가 1등이었다. 시민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통일된 몸짓을 준비하려 했으나 도저히 맞추어지지 않는 동지들로 인해 이내 포기를 하고 율동이 아닌 막춤이 거리를 휩쓸었다. 돌이켜보면 쑥쓰러움에 얼굴이 화끈하기도 하지만 그때의 우리는 너무나 진지했고 열심이었고, 열정적이었다. 지역에서 지방선거보다 높은 당지지율을 만들어낸 우리는 고무되었고 감격스러웠고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2003년 봄, 대한민국을 뒤흔든 화물연대투쟁이 이곳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집회 때 무대에 선 것이 인연이 되어 화물연대투쟁 영상물 제작에 나레이션으로 참여한 나는 민주노동당이라는 명칭이 영상물 한 자락에 비친다는 사실에 감격스러워 했다. 화물연대의 투쟁은 화물노동자들의 집단 입당으로 이어졌고 어느덧 당원들의 수자는 400명을 돌파하고 있었다.

지역에서의 크고작은 투쟁들은 언제나 당원 배가로 이어졌다. 당과 민주노총의 단단한 연대가 이러한 공식을 가능케 한 것이었다.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민주노동당'이라는 공식을 실현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2003년 겨울, 우리는 또한번의 중요한 결단을 했다. 2004년 총선에서 2개의 지역구에 모두 후보를 낸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또 이 보수적인 한나라당의 안방인 지역에서 두 곳 중 한 곳을 여성으로 낸다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후보로 결단할 것을 요구받고 거의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였다. 왜냐면 개인으로서의 나는 너무도 작고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남편은 건설노조의 투쟁으로 수배되어 곧 구속을 눈앞에 둔 상태였다. 마침내 출마를 결의하고 당은 모든 것을 올인하였다.

당 득표 15%! 새로운 희망과 가능성을 만든 선거였다. 밑바닥에서부터 함께한 당원들의 땀과 눈물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우리가 민주노동당 당원이라는 사실이 너무도 자랑스러운 시간이었다. 당의 성장 속에 함께 했다는 사실이 너무도 자랑스러웠다.

새로운 지도부가 어제 확정되었다. 새삼 그간의 당 건설과정을 되돌이켜 보았다. 그렇게 울고, 웃고, 땀 흘리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눈물짓고 그렇게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피와 땀과 눈물로 일군 민주노동당, 내가 아닌 우리를 소중한 가치로 한 민주노동당!

새로운 지도부에게 작은 바램을 적어본다. 민주노동당의 당원임을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 당의 모습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진보정당답지 않은 행태에 대해 지금 바로잡지 않으면 당의 내일은 없다. 무엇보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상처받은 당원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일일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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