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대 국회 개원 후, 내가 첫출근을 할 때는 많은 기대도 있었고, 국회의 새로운 전형을 만들어나가는 데 한몫을 단단히 하겠다는 다짐으로 나의 마음을 중무장한 상태였다.

'여기 아무도 없네?'

그러나 출근한 지 하루만에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큰 장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의원실로 걸려 오는 전화를 받으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 보좌관 좀 바꿔줘!”라는 말로 시작한다. 또, 우리 의원실로 타당 보좌관이 찾아왔는데 “여기 아무도 없네?” 그런다. 처음엔 싸우기도 하고 항변도 해보았지만 점점 갈수록 전화벨 소리를 들으면 피하고 싶어지고 지금은 모르는 사람이 찾아오면 또다시 상처받지 않기 위해 무관심해지게 되었다.

나도 사람이고 의원실 내에서도 동등한 나의 몫을 다하고 있고 밤낮 없이 정말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그것은 여전히 나만의 환상이었나 하는 생각 때문에 정말 화가 난다.

기혼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맞벌이가족은 일련의 변화 속에서 증가한 가족으로, 남성 중심의 전근대적 이데올로기를 청산하거나 거부하지 못한 상태에서 가족의 경제수준만을 향상시키려는 목적을 앞세우면서 형성된 가족형태이다. 이는 여성 자신 역시 가족의 부양자로서 당당한 몫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과 동등한 공동부양자로 인식하기보다 보조자로 생각하고 있으며, 남성 역시 신전통주의적 역할구분 의식과 전통주의적 성역할의식이 혼재되어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직장에서도 같은 시선으로 본다는 게 더 큰 문제다. 예를 들면 맞벌이 부부니까 급여가 적어도 되지 않겠냐는 인식이다. 여기에서 나는 액수의 문제보다 나의 존재가치의 의미에서 더 화가 난다. 나도 엄연한 사회 구성원의 일부이며 가족의 부양자임임을 소리치고 싶다.

두번의 국정감사

그러나, 국회의원의 보좌관 생활을 돌이켜 보면 절망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민주노동당 최순영 의원이 2004년 국정감사에서 제일 먼저 제기한 여학생 생리 공결제 문제가 올해부터 출석으로 인정되었으며, 공공기관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실태를 면밀히 파악하여 이후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지위 향상을 위한 방향을 제시하였다. 또, 2004년 국정감사에서 보육의 공공성 확보를 위해 자료를 요청하였으며, 그 자료를 분석한 결과로 공보육 실현을 위한 밑거름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런데 2005년 국정감사에서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하게 되었다. 국정감사를 위해 자료를 요청하면 여성위원회 의원에게 모두 그 자료를 나누어주는데, 2005년에는 여성위원회 소속 의원 거의가 최순영 의원이 요구했던 자료를 요구했던 것이다. 이는 보육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가 커다란 획을 그었다는 것이기도 해서 매우 기쁘기도 했다. 또, 민주노동당에서는 여성과 함께 하는 국정감사라는 타이틀을 걸고 성인지 국정감사를 최초로 시행하였으며 그 바탕으로 성별영향평가, 성인지예산정책들을 내놓고 있다.

몇년이 흘러야 하나?

얼마 전 암울한 소식을 하나 접하게 되었다. 영국에서는 30년 전에 발효된 성차별금지법에도 불구하고 200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야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권력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고 기회균등위원회(EOC)가 밝혔다고 한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 상승을 가로막는 장벽이 신속하게 해체되지 않는다면 영국은 앞으로 다가올 여러 세대를 통해서도 여성의 재능을 활용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였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나라에서는, 이 곳 국회에서는 몇년의 세월이 흘러야 한다는 소리인가?

또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며

그래도 희망을 버리고 싶지 않다. 원내에 민주노동당이 입성하면서 타당의 보좌관들이 해준 말이 기억난다. “좋은 시절 다 갔다”라는 표현이다. 민주노동당이 진보정치의 역사에 하나의 획을 그었다면 나는 여성으로 이 세상을 살기 위한 또 하나의 역사적 획을 긋기 위한 힘겨운 투쟁을 할 것이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 상승을 가로막는 장벽은 투쟁으로 돌파하지 않으면 절대로 쟁취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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